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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31.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미카는 햇빛이 쏟아지는 쪽으로 걸었다.
아침으로 먹은 음식이 얹힌 건지 하루 내내 소화가 잘되지 않았다. 점심으로 학교 식당 대신 선택한 건 그레이빌 세컨더리의 거대한 본관 뒤를 동그랗게 감싸고 있는 작은 산책로였다.
미카는 낙엽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오랜만에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는 중이었다. 이런저런 일들을 무수히 겪은 데다, 할머니까지 병원 신세를 지느라 한순간도 고요를 만끽한 적이 없었다.
며칠 전, 별안간 또 나타난 미지의 전학생들 덕분에 학교가 더 떠들썩하기도 했고.
“정말 가을이네…….”
한결 시원해진 산책로의 공기도, 저마다의 색으로 물들어가는 나뭇잎도, 건조하게 불어오는 바람까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에 가을이 펼쳐졌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바스락-
꽤 먼 거리였다. 앞선 미카가 한 걸음 지나칠 때마다 똑같은 그 자리를 다른 발이 자국을 남기고 지나갔다.
좀처럼 눈이 오지 않는 도시였지만, 만약 눈이 쌓여 있었다면 발자국은 오로지 한 사람의 것으로만 남았을 터였다.
보폭이 좁은 미카의 걸음을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잠자코 따라가는 건 다름 아닌 엔지였다.
어딜 그렇게 열심히 가나 했더니, 산책로를 거쳐 미카가 돌아서 도착한 곳은 그레이빌 세컨더리의 거대한 도서관 앞이었다.
학교 재단 소유인 이 도서관은 평소에도 도시 사람들을 위해 열어두는 공익 목적의 공간이기도 했고, 그레이빌에서 가장 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는 대형 서고이기도 했다.
“그럼 그렇지.”
어디 다른 곳으로 새나 했더니, 저 범생이가 그럴 리가 있나.
엔지는 괜시리 웃음이 나왔다. 무엇 하나 예상을 비껴가지 않는 미카에 허무해하면서도, 꾸밈없이 정직하기만 한 그녀의 모든 행동이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까지 했다.
아니 잠깐만. 귀여워? 귀엽다고……?
게다가 왜 기척도 없이 미카의 뒤를 밟고 있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햇살 좋은 날 피어 있는 꽃, 맑은 하늘을 바라보기라도 하듯, 미카를 보고 그녀가 지나간 자리를 가늠해보는 것이 꼭 하나의 의식처럼 치러졌다.
이렇게 환한 대낮에, 그것도 학교 안에서, 미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는 것이 비현실적인 상상이라 생각하면서도 엔지는 제 눈에 들어온 그녀를 모른 척 지나치지 못했다.
아니면 그저 보고 싶었나. 통통 튀며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머릿속이 어지럽다.
미카가 도서관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엔지는 조용히 창가 근처에 자리를 잡고 기대 섰다. 아마 30분 즈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만 읽을 그녀다. 굳이 아는 척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엔지는 그저 드문드문 창가에 보였다 사라졌다 하는 미카를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미카가 책을 펼쳐 첫 장을 넘겨보는 그때였다.
“또 도서관이네. 안 지루해?”
낯선 인기척에 어깨를 움찔한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차분한 어투로 미카의 책 머리맡에 음료와 소화제 하나를 내려놓은 이는 다름 아닌 나자크였다.
“뭘 그렇게 놀라. 네가 있는 곳이야 빤하지.”
“……나 찾아다녔어?”
“응.”
“왜?”
“이거 주려고.”
톡톡. 나자크의 검지 끝이 작은 소화제 알약을 가리킨다.
미카는 조금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저 가까운 친구에게 베푸는 호의라고 하기엔 어쩐지 내밀하게 느껴졌으니까. 혹시 혼자서 착각에 빠진 건 아닐까 싶어 미카가 굳이 다시 확인하길 시도했다.
“아…… 고마워. 근데 나 소화 안 된 건 어떻게 알았어?”
“그 정돈 보면 알아. 점심도 거르고 물 한 모금도 안 마셨잖아.”
긴장한 미카와 달리 나자크는 언제나 그렇듯 사려 깊은 어조로, 오늘 하루 종일 그녀를 관찰하고 지켜봤음을 순순히 시인했다. 게다가 둘 사이는 곧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고, 나자크의 회색 눈동자는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미카는 솔직한 대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잊어버린 사람처럼 굳은 목으로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얼른 시선을 다시 책으로 고정시켰다.
하지만 자신의 목적은 기필코 달성할 생각인지 나자크가 약을 들어 미카가 읽고 있던 책 위에 올렸다.
“안 먹어?”
“아, 어?”
“소화제.”
“……아, 응. 먹을게.”
미카가 어색한 행동으로 얼른 알약을 입에 넣어 삼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자크는 살짝 한 발 뒤로 걸음을 물렸다. 거리가 이토록이나 가까워져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나자크는 이상할 만큼 미카에겐 사소한 부분에서 조절을 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꼈다.
“먹었어. 이제 됐지?”
미카가 음료를 삼키고 나서 나자크에게 확인받듯 묻자, 그가 어딘지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쩐지 그가 해주는 동조는 기묘하게도 미카를 안정되게 했다.
이어 옅고 산뜻한 그녀의 미소가 나자크를 향하자, 그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새 똑같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 보면 둘의 웃는 모습은 어쩐지 닮은 구석이 있다.
창가를 두고 멀리 선 엔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열패감에 사로잡혔다.
왜일까. 미카가 나자크에게 웃어줬기 때문인가. 그도 아니면 제 눈에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도 잘 어울려서?
아니. 둘 다 아니었다.
그저 뒤만 따라가기 바쁜, 내내 그 뒷모습만 바라보며 걸어왔던 그 지난한 시간을 비웃기라도 하듯 나자크는 그녀의 앞에 곧바로 섰다. 분명 후각으로 자신이 뒤에 있음을 알았을 텐데도, 어떤 망설임도 없이 미카의 곁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죽어라 노력해서 열 걸음 정도 가까워져봤자, 늘 한 걸음만에 쉽게 거리를 좁혀버리는 건 나자크였다. 그것도 마치 의도하지 않았다는 듯 자연스럽게.
그래. 왜 저 녀석을 미워했는지 이제야 완전히 기억났다.
나자크는 늘 그랬다. 뒤에서 모두를 지켜주고, 안아주고, 견디게 해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엔 늘 형제들을 대신해 위험에 앞장섰고, 생존했고, 승리를 쟁취해냈다.
그것은 선대로부터 전통을 물려받은 알파의 피, 그 자체였다.
그래서 늘 나자크가 미웠던 거다.
엔지는 비상한 머리로 무언가를 이용하고 상황을 읽어내는 데 재능이 있었으나, 정작 어떤 이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했고, 그리하여 온전히 제 것으로도 만들지 못했다.
어쩌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얻는 순간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을 갉아먹은 감정이었으니까.
“훔쳐보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밖으로 나온 나자크가 도서관을 돌아 나와 엔지를 발견하곤 말했다. 그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엔지는 굳이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자크는 처음부터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므로.
“너한테 배운 거야. 그 취미.”
언젠가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상황으로 대치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나자크가 밖에 있었고, 엔지가 미카와 함께였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 듯 나자크는 엔지의 도발에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좋아해?”
어느 곳으로도 비껴가지 않는 확실한 물음이었다. 정확하게 상대를 지목하지 않았지만, 둘은 모두 그 사람이 ‘미카’를 향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엔지는 한 번쯤은 묻고 싶었고 알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정해지기 전엔 이조차도 월권이었으나 적어도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깨달은 이상, 이 정도의 권리는 자신이 가졌다고 생각했다.
나자크는 대답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그 대답이 무엇이든, 자신의 마음을 엔지에게 밝힐 이유는 없었다.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대답해. 어쩔 생각이야, 대체.”
“조급하지 않아. 장기전이니까.”
나자크의 대답에 엔지는 보이지 않는 ‘마음’이란 것에 거대한 잿더미가 뿌려진 기분이었다. 엔지는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제 녹갈색 머리칼이 찰랑이는 감각을 느꼈다. 역시 이 빌어먹을 도시는 바람마저 짠 내가 난다.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그렇게 생각했었어.”
엔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그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마음 따위는 모두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인간을 상대로 그런 일은 결코 벌어질 리 없다고 자신했다. 죽어가는 누이의 이름을 부를 때, 이미 그런 건 다 부서져 없어졌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지금은 아니란 뜻이냐.”
나자크가 피하지 않고 엔지의 잔잔한 독백 같은 혼잣말에 반응했다.
불편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서로가 알지 못하는 마음을 들추고, 생각을 읽고, 어쩌면 잠깐의 불편함을 견디는 것. 피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언제고 한 번쯤은 치러야 할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나자크는 제게 찾아온 승부의 순간엔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다.
엔지는 그런 나자크의 성정을 알기에 더욱 빈틈없이 앞으로 질주했다.
“난 결정했어. 충분히 미카에게도 전달했고.”
“네 마음을 전달하든 하지 않든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알 텐데.”
나자크의 지적에 순간 엔지가 패착이었다는 듯 눈썹 끝을 움찔했다.
“우리가 늑대인간이란 거. 미카한테 말할 자신 있어?”
왜였을까. 왜 그걸 잊어버렸을까.
일어나는 마음들을 애써 죽이려고 노력한 건 결국 그것 때문이었을 텐데, 왜 그 본질을 간과한 채 다가가버린 거지?
“미카는 인간이야. 결국 인간들 틈에서 살게 되겠지. 우리와는 다르게.”
“……그래서 물러나라고?”
엔지가 이를 꽉 물고는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게 억지로 내리눌렀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서. 미카가 인간이어서. 그래서 포기하라고?”
꼿꼿하게 눈을 직시하는 엔지를 보며 나자크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엔지의 눈엔 억울함이 서렸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겨우 여기까지 와서 빛을 봤는데. 겨우 그딴 이유로 관두라고……?”
“엔지. 난 미카에게 짐을 지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나자크의 말에 엔지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 난 너와 이토록이나 다르다.
“그 아이가 불편해할 일은 하지 않아. 결코.”
나자크는 진심이었다.
아직 증명되지 못한 자신의 어렴풋한 마음을 가지고 미카를 흔들어 힘들게 할 생각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아직은 바라보는 것이 익숙하고, 그 옆을 지키고 있는 게 편할 뿐이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정체를 알고, 어쩌면 괴로워할지도 모르고 영원토록 받아들이지 못한 채 미안함을 안고 살아갈 미카를 배려해야 했다. 그녀는 영원히 동류가 될 수 없고, 결국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할 ‘인간’이었으니까.
좋아하기에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과, 좋아하기에 배려할 수 없는 마음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결국 어느 쪽이든 한쪽을 선택해야만 한다.
한참을 침묵하던 엔지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이내 비릿하게 미소를 흘렸다.
“그럼 우린 꽤 재밌게 됐네.”
그래. 어쩌면 이건 엔지만의 방식이다.
유감스럽게도,
“난 그 아이가 불편해할 일만 할 테니까.”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