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고요 속의 태풍
(39/40)
39. 고요 속의 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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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고요 속의 태풍
2023.08.24.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그나저나, 아주 특이한 냄새를 풍기는 녀석이 있네?’
호기심 어린 루카의 은회색 눈이 칸을 담았다.
처음 그레이빌 도시로 들어와, 여관에서 멀지 않은 빈집에 자리를 잡는 그때부터 맡았던 냄새였다. 보통의 루가루들이 풍기는 가을의 풍성함이나 포근하고 고소한 냄새가 아니라, 꼭 젖은 풀밭에 누워 있는 것 같은 상쾌한 냄새였다. 둘은 아주 비슷하면서도 명백히 다른 냄새였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너 누구야?”
분명 인간인 것 같긴 한데, 늑대인간 형제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걸 보면 또 아닌 것 같고. 루카는 정체를 짐작하기 어려운 칸 앞에서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누군지는 네가 소개해야 하지 않을까. 전학 온 건 너잖아.”
뭣하나 틀린 말 없는 칸의 답에 루카가 금방 설득당해 아,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루카야.”
“알아. 들었어.”
칸은 별다른 반응 없이 고요히 답했다.
“흠. 어쩐지 까칠한데? 나 맘에 안 들어?”
“내 맘에 안 들고 말고가 중요해?”
“일단은. 난 네가 궁금한 참이거든.”
루카는 꼭 생태계 교란종처럼 뜬금없이 나타나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늑대인간 형제들은 그런 소년의 등장에 몹시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지만 칸은 아니었다. 그에게 루카는 그다지 강렬한 존재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그렇다고 적대적으로도 여겨지지도 않았다.
칸은 여타의 인간들과 다를 바 없이 루카를 그저 ‘전학생’ 그 자체로 여기는 것에 충실할 뿐이었다. 그 사실이 너무도 가감 없이 느껴져 루카는 점점 더 칸에 대해 궁금해졌다.
칸은 분명 인간과는 확연히 다른 냄새를 가지고 있고, 그렇다고 그 냄새가 명백히 루가루의 것은 아니며, 늑대인간 형제들과 가족처럼 지내지만, 또 늑대인간인 자신은 알아보지 못한다. 대충 정리해보면 칸을 보고 판단할 수 있는 몇 가지는 그게 전부였다.
루카의 시선이 칸에게 집중될수록 나자크는 더없이 불편해졌다.
칸이 말하지 않은 보름밤 그날의 일을 기어코 알아내고자 한다면 더러운 수를 수십 가지도 더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칸을 가까운 상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뜸 나타나 제멋대로 그들의 삶을 파헤치는 루카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자크의 신경이 점점 더 곤두서고 있음을 알아차린 엔지는, 상황을 지켜보다 말고 일부러 선수 쳐 칸의 앞을 가로막고 루카와 대치하듯 마주 섰다.
이런 자잘한 신경전 같은 건 굳이 나자크가 나서지 않아도 됐다.
나자크는 언제나 잘 참고 견디는 녀석이었지만, 선을 넘는 순간 형제들 중 그 누구보다도 감정적 제어가 힘들었다. 그는 그 정도로 자신의 울타리에 들어온 이들을 지키는 것에 진심이었고,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엔지였다.
“너 대체 속셈이 뭐냐.”
“속셈?”
루카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순진한 얼굴을 하자 엔지가 쯧, 혀를 찼다. 이 지루한 기 싸움을 빨리 끝내고 그는 어떤 것이든 설명을 듣고 싶었지만, 루카는 꼭 이 상황을 즐기는 모양새였다.
“온 도시에 뱀파이어 새끼들 냄새가 진동을 해. 그런데 여길 제 발로 기어들어 왔다고?”
엔지가 낮은 목소리로 아주 조용하고 차갑게 말하자 루카는 잠시 입술을 삐죽였다.
“말해. 네 목적이 뭔지.”
물러서지 않고 반쯤은 확신을 가지고 부추기는 엔지의 태도에 먼저 뒤로 물러난 건 루카였다.
“흐음. 일단 머리가 돌아가긴 돌아가네? 본능대로 설칠 줄만 알았는데.”
어딘지 실망했단 어조였지만 루카는 외려 흥미롭다는 듯 반짝거리는 눈으로 엔지를 바라봤다.
“참 맘에 안 들어. 그 얼굴.”
“그래? 아쉽네. 난 이 얼굴 꽤 좋아하거든. 여러모로 쓸모가 많아. 사람들은 참 이상하지? 겉모습에 아주 잘 속아. 아름답고 예쁜 건 누구나 좋아하니까 말야. 그래서 난 예술이 좋아. 모조품조차 눈부시게 아름다우니까.”
“거 따박따박 되게 시끄럽네. 원래 그렇게 말이 긴 편이냐.”
루카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쌍둥이 동생이 말수가 좀 적거든. 옆에서 거의 묵언 수행하듯이 지냈더니 동료가 그리워졌지 뭐야? 그러니 내가 안 반갑겠어?”
엔지는 잘못돼도 무언가 한참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특별히 구원투수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같은 늑대인간이 그레이빌에 나타났다는 것에 경계하면서도 기대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나라도 아쉬운 이때에 어쩌면 좋은 전력이 추가될지도 모른다는 기대 말이다.
근데 이거, 완전 헛다리잖아.
“루카 형.”
어딘지 이상하게 흘러가는 대화 끝으로 그 말 없다던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루카의 어깨가 바짝 긴장해서 위로 솟았다. 또 잔소리 듣게 생겼구나, 하는 아주 귀찮은 표정과 함께.
“어! 루이, 여기, 여기!”
아닌 척 코앞에 있는 루이를 향해 루카가 크게 손을 흔들자, 역시 루이가 학생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고개를 홱 숙이며 그들에게로 빠르게 걸어와 섰다.
“그렇게 크게 아는 척 안 해도 보여. 넓으면 얼마나 넓다고…….”
어딜 가든 관심을 받는 것에 익숙한 루카와 달리, 루이는 타인들의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쪽이었다.
“또 보네.”
루이가 어색하게 눈인사를 하며 형제들을 향해 단정히 말하자 나자크가 그에 답하듯 그 인사를 받았다. 이 상황이 껄끄러운지 루이가 사선으로 서서 억지로 루카를 향해 눈치를 줬다.
“오늘은 일찍 돌아가기로 했잖아.”
“그게 말이지. 일이 재밌게 돌아가더라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만. 미안 미안.”
루카는 빡빡하게 구는 제 동생의 어깨에 손을 올려 애교스럽게 주무르며 상황을 무마했다. 이런 식의 마무리는 둘에게는 몹시 익숙한 일이었으나, 루이는 매번 반복되는 이 순간이 지겨울 뿐이었다.
늘 사고를 치고 사람들을 들쑤시고 다니는 건 형인 루카의 몫이었고, 일일이 설명 아닌 설명을 해가며 억지로 말을 늘어놓고 수습하는 건 언제나 동생인 루이의 몫이었다.
몇 분간의 차이를 두고 태어난 쌍둥이였으나 그들은 흡사한 외모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정반대였다.
“아차차. 떡은 먹어봤어? 너희들 형에게 준 거 말야.”
“먹었을 리가. 네 말대로 별 맛도 ‘없는’ 음식이잖아?”
엔지가 그때의 루카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그래도. 너희들 형은 꽤 맘에 들어 할지도 모르잖아.”
왜 갑자기 이곳에 없는 기리를 굳이 언급하는 것인지 형제들은 알지 못했으나, 루카의 말이 자꾸만 한 사람에게 향할수록 루이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
그런 제 동생의 표정을 살피면서도 루카는 형제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와 의심을 동시에 심었다.
“그를 믿어?”
완전한 정답이 있는 질문에, 그 정답이 맞냐고 묻는다.
“꽤 깍듯하게 형으로 모시던데. 언제부터 그렇게 사이가 좋았어? 처음부터?”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기리에 대해 어떤 말이라도 함부로 한다면 나자크는 당장이라도 늑대의 습성대로 공격해버릴 기세였다. 나자크에게 기리는 종교, 신, 부모 그 이상이었다. 그는 기리를 사랑했고, 기리 또한 그를 사랑했다.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그들 앞에 이런 모략을 펼치는 루카를 나자크가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었다.
그 위협을 감지한 것인지 루이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 형을 타박하더니, 긴 팔을 뻗어 그를 뒤로 물려 거리를 확보했다. 루카의 도발이 멈추지 않을 거란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어차피 말려봤자 듣지 않을 것이란 것도.
“너무 믿진 마. 너희들이 어떻게 마하바 초원에서 도망쳐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잊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결국엔 가장 믿었던 누군가의 배신이었잖아?”
잔인한 사살이었다.
당시 마하바 초원의 어린 늑대들과 그 가족들이 몰살당한 것은, 기리의 동생이었던 ‘보바’의 밀고 때문이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 가족인 기리마저 뱀파이어들에게 넘긴 배신자.
하지만 어째서 그 사실을 루카가 알고 있는 걸까. 그는 초원에서 형제들과 함께 나고 자라지 않은 늑대인간이었고, 무리 생활을 하며 다른 곳에 서식하는 동족들과 교류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자였다.
“잊지 마. 살아 있는 한, 모든 사람은 언제든 배신할 수 있어.”
이어, 고작 몇 마디 말로 아무렇지 않게 심장에 칼을 꽃은 루카가 유유히 돌아섰다.
남은 자리는 그저 고요했고, 그 속에서 휘몰아치던 잔잔한 태풍은 형제들을 단번에 집어삼켰다.
* *
돌에 맞은 새가 까무러치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약한 것들을 짓밟는 데 큰 흥미를 느끼진 못했으나, 그럼에도 유일한 흥밋거리임은 안다.
지겨운 밤이다. 라라는 유독 밤을 싫어했다. 그것은 자신이 인간이던 시절과 다르지 않은 유일한 것이었다.
불멸의 영생을 얻었으나 결코 강렬한 빛 앞에 나설 수 없고, 충성을 맹세한 시간들은 너무도 길고 지루했다. 강한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노라 여겼으나 그 또한 수백 년 동안 습관처럼 이어져 온 맹세일 뿐이었다.
툭-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온몸의 피가 빠져 축 늘어진 인간 하나가 그녀의 발밑에 으스러졌다.
“싱거워…….”
살인자로 전락해 숨어 살다 이제는 늙어버린 육신을 먹어치우며 라라는 잠시 같은 인간일 수 있었다.
그래,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
인간들조차 사회에서 없애버리고 싶어 하는 쓰레기를 대신 먹어 치워줬으니 이건 무료 자원봉사 같은 거다. 아니면 그들이 늘 울부짖으며 찾아대는 신이거나.
위선으로 위장할수록 라라의 기분은 더없이 고양되었다.
청명한 밤하늘 아래 늙은 인간의 피라니. 좀 더 달콤하고, 좀 더 진했다면 좋았을 테지만 가벼운 요기를 하기에 부족함은 없다.
“이리 온.”
라라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주변을 경계하는 작은 늑대 한 마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갈색 털을 가진 늑대의 눈은 눈자위가 노랗고 가운데 채도 낮은 초록빛이 꽃잎처럼 펼쳐져 전체적으로 오묘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어린 늑대는 곧이어 라라의 손짓에 따라 그녀의 무릎에 가지런히 턱을 올리곤 순종적인 강아지처럼 제 턱을 비볐다.
“그래, 그래. 착하구나. 루슬란.”
아주 어린 늑대 시절부터 자신이 직접 선별해 데려온 아이였다.
마하바 초원이 쑥대밭이 되고, 뿔뿔이 흩어져 무리의 힘을 잃어버린 어린 짐승들을 손안에 넣기란 싱거울 정도로 쉽고 우스운 일이었다.
라라는 제 손 안에서 잘 길들여진 루슬란의 갈기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예민하게 쫑긋 솟은 그 귓가에 달콤히 속삭였다.
“네 형이 보고 싶니?”
잔인한 물음에 루슬란의 눈에 우수가 들어찼다. 어린 늑대는 소리 내지 못했으나 물기가 맺힌 눈으로 모든 것을 대답하고 있었다.
“걱정 마. 착하게 군다면 모든 게 금방 끝날 거야. 약속할게. 널 집으로 다시 보내주겠다고.”
저조차도 진심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약속하며 라라가 루슬란의 등을 끌어안았다.
울고 싶었으나 울어지지 않는 이 더러운 기분을 너는 알까.
모두가 뱀파이어와 늑대를 천적이라 했으나,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그 단어는 무용했다.
어차피 버려진 것들의 삶이란 비슷했으므로.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