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기묘한 이웃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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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기묘한 이웃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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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기묘한 이웃사촌
2023.08.10.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크록의 납골당은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
산이 울창하고 공기가 맑은 그곳은, 평소 도시의 어둠 속을 배회하던 크록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아무도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오가지 않았는지, 유골함이 보관된 작은 유리창엔 흔한 국화꽃 한 송이조차 보이지 않았다. 덩그러니 외롭게 놓인 함을 바라보던 미카는 꽃을 창에 붙이며 꼭 스스로에게 벌이라도 주듯 힘주어 말했다.
“난 나쁜 계집애인 게 분명해.”
뜬금없는 고해성사에 함께 납골당을 찾은 칸이 미카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가지런하게 합장을 하고 묵념까지 마친 소녀의 입에서 나오기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크록의 죽음이 안타깝고 슬프지만, 마냥 슬프지만은 않아. 그렇다고 크록이 살아 돌아오길 바라지도 않아. 나 나쁜 거 맞지……?”
미카는 죄책감이 묻은 얼굴로 칸을 향해 물었다. 아니란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 동조를 바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어조였다.
크록의 죽음은 명백히 미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오히려 해코지를 당한 건 언제나 그녀 쪽이었건만 왜 그 무거운 감정의 짐을 미카 혼자만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칸은 그 사실이 더 속상할 뿐이었다.
“넌 나쁘지 않아, 미카. 네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건 그냥 사고였을 뿐이야. 불행히 벌어지고 만 사고.”
칸은 최대한 목소리 고저 없이 차분하게 말했다. 사실은 자신 또한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비난도 책망도 아닌 말투였으나 칸은 어쩐지 긴장했다.
“뭘?”
“아무렇지 않잖아. 네 얼굴에선 원망도 슬픔도 안 보여.”
“슬프지도 원망하지도 않으니까.”
그게 가능한 일일까.
미카의 기준에서 칸은 바보처럼 선하고 곰처럼 무던한 소년이었다. 덩치만 컸지 험한 세상 살아가는 법 따윈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라며 안타깝게 혀를 차곤 했었다. 하지만 미카는 최근 몇 달간 달라진 칸을 보며, 자신이 알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미카. 사실 난 뭘 괴로워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
칸은 자신이 태어난 이래로, 아니, 자신이 기억하는 그 모든 순간 이래로 요즘처럼 혼란스러운 때가 없었다. 차라리 알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여관에 찾아왔던 형제들을 받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모든 순간이 후회로 점철되는 동안 칸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해. 내 처음은 썩은 오물이 쌓인 낡은 창고였고, 날 주워준 양부모님이었어. 도대체 난 무엇 때문에 슬퍼하고, 무엇을 잃어 괴로워해야 하는 걸까. 나에겐 잃어버린 가족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데.”
처음으로 칸의 입을 통해 듣는 이야기였다. 마을의 소문이나 할머니를 통해 짐작하곤 있었지만 칸이 홀로 이만큼이나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지고 살아왔다는 건 미카조차도 완전히 알지 못했었다.
칸은 슬프지 않았다. 죽은 크록의 영정사진 앞에서도, 또 그의 유골함 앞에서도 슬프지 않았다.
인간답지 못한 자신이, 가슴이 뻥 뚫린 듯 서늘하기만 한 자신이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닐까 늘 불안했다.
“차라리 다행 아닐까.”
선뜻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미카에 칸은 말을 잃은 듯 입술을 꾹 다물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목마른 자가 생명수라도 마신 표정으로 칸이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슬퍼할 일도 괴로워해야 할 일도 없다는 건 좋은 거니까. 사람들은 다 괴롭지 않기 위해서 성당도 가고 교회도 가잖아. 그러니 억지로 널 괴롭히지 마. 그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을 거야. 넌 그냥 너야, 칸. 지금 여기 서 있고, 살아 있고, 말을 하는 너. 그것 말곤 무엇도 널 정의할 순 없어.”
제법 긴 시간 이 그레이빌에 살고 또 버텨오는 동안, 칸에게 미카는 하나의 종교였다. 그녀의 다정한 말, 따듯한 눈빛, 변하지 않는 지지는 늘 버팀목처럼 단단했고 신처럼 자비로웠으며 오후의 햇살처럼 포근했다.
“괜찮아.”
미카의 따듯하고 작은 손이 칸의 등을 토닥였다.
모두가 너에게 돌아서도 나는 아니다. 모두가 널 증오해도 나는 아니다.
“괜찮아. 난 여기에 있어, 칸.”
언제나 그렇듯.
* *
드르륵- 쾅쾅-
이른 아침부터 그레이빌 여관은 안팎으로 소음에 시달렸다.
인기척을 느낀 건 형제들이었으나, 쿵쾅거리는 소리에 아침을 만들다 말고 국자를 든 채 밖을 먼저 내다본 건 시몬이었다.
요즘 들어 배가 나온다며 아침마다 이른 운동을 시작한 그는, 언젠가부터 요한나 대신 아침 식사까지 도맡아서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저씨.”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한 기리가 까칠한 얼굴로 2층에서 내려오며 모르는 척 시몬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그래, 잘 잤니? 식사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밖이 시끄러워서 일찍 깼지?”
“그러게요. 소란스럽다 했는데 누가 이사라도 오나 봐요.”
이미 들어서 다 알면서도 기리가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고 있는 시몬을 향해 말했다.
“저 집은 꽤 오랫동안 빈집인데 드디어 이사를 오는 모양이야. 잘됐구나. 요즘 도시가 흉흉한데 새로운 사람이 이사를 온다니. 고마운 일이지.”
그래. 고마운 일이다. ‘사람’이 아니란 걸 빼면.
시몬은 우울한 나날 중에 새로운 이웃이 생긴 게 기쁜 모양인지 기분 좋게 웃으며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멀리서 그의 콧노래 소리가 잔잔히 들려올 즈음 잠이 덜 깬 엔지와 타헬, 그리고 나자크가 차례로 방에서 나와 1층으로 내려왔다.
“쟤들이지? 형이 맡았다던 냄새.”
나자크의 물음에 기리가 끄덕였다.
루가루의 냄새는 맞지만, 하나의 독립된 개체 자체를 일일이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정교하진 않았기에, 기리는 지난 며칠 동안 맡았던 늑대인간의 냄새와 동일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나온 엔지가 바람을 타고 명백히 날아오는 늑대인간 냄새를 감지하곤 번뜩 정신을 차렸다.
“……쟤들 뭐야. 동족이잖아.”
동족이라 말하면서도 엔지의 말에 누구 하나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는 이들은 없었다. 마하바 초원에서의 뼈아픈 배신은 결국 이런 경계와 불안으로 되돌아왔다.
“혹시 아는 얼굴이야?”
엔지의 말에 기리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봐. 한 번도 본 적 없는 애들이야.”
“우리랑 같은 종족인 건 맞고?”
나자크가 후각이 뛰어난 엔지에게 다시 확인했다.
“루가루인 건 분명해. 그것도 두 마리.”
꽤 먼 거리였지만 엔지는 확신했다.
“근데 저것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도시가 뱀파이어 냄새로 가득한데, 미쳤다고 죽으려고 여길 들어와? 모르긴 몰라도 저놈들도 정신 나갔어, 분명.”
“엔지……!”
거침없는 엔지의 말에 기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저지했다.
동족이라면 그들만큼이나 청각이나 후각이 뛰어난 녀석이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처음부터 형제들이 이 여관에 있다는 걸 알고 가까운 빈집으로 이사 온 것일지도 모르고.
물론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엔지의 말엔 틀린 것이 없다. 그러니 더 수상하다고 여겨질밖에.
도망가도 모자랄 판에, 형제들처럼 잠시 머무는 것도 아니고 아예 이사를 들어오다니. 도무지 그 의도가 읽히지 않아 기리는 몹시 곤란한 얼굴이었다.
“아주 요즘은 하루걸러 피곤해.”
엔지가 기리의 표정을 보곤 뻐근한 뒷목을 엄지로 지그시 짓누르더니, 빤히 다 알면서도 인기척이 없는 누군가를 눈으로 찾았다.
“그나저나 아침부터 칸, 그 자식은 어디로 간 거야?”
“새벽에 일찍 나가는 소리 들리던데. 집 앞에서 미카 누나 냄새도 났는걸? 둘이 어디 갔나 봐.”
엔지의 속도 모르고 타헬이 천진하게 미카의 이름을 꺼내자, 동시에 미세하게 나자크의 낯빛 또한 미묘하게 변했다.
“아니까 일일이 말하지 마. 짜증 나게.”
엔지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자 타헬은 무언가 건수를 잡았다는 듯 능글맞게 웃으며 제 형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이상하다아? 왜 짜증 나지? 칸이랑 미카 누나가 같이 간 게 싫어?”
“시끄러, 인마. 죽는다.”
“엔지 형, 수상해. 아-주 수상해.”
“아오. 이게 또 눈치 없이 까불지, 엉?”
엔지가 훅 타헬의 목에 헤드록을 걸며 다른 한 손으론 꿀밤을 먹이자 타헬이 양팔을 버둥거렸다.
“윽! 형, 또야, 또! 힘쓰지 말라고!”
“내가 언제 힘썼어. 네가 약한 거지, 약골 꼬맹아.”
“우씨! 약골?! 진짜 두고 봐!”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전히 상체가 잡힌 채 버둥거리는 타헬을 보며 속도 모르고 시몬이 형제끼리 참 사이가 좋다며 껄껄 웃는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루카’라고 합니다!”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한 소년.
게다가 선뜻 내미는 손이 지나치게 인간답다.
화려한 액세서리에, 자유분방한 옷차림, 투톤으로 염색된 머리는 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기척을 느꼈을 즈음엔 이미 문을 열고 들어온 다음이었고, 기리는 그 사실이 아주 많이 불편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어린 루가루 중에 이만한 실력을 가진 녀석이 있었나……?
밝은 인사와 상관없이 침묵이 이어지자 엔지가 선수를 쳤다.
“굳이 뭐 인사까지.”
“저를 향한 시선이 너-무 뜨겁길래. 모른 척할 수가 있어야죠.”
능글맞고 서글서글한 말투 안에 송곳 같은 가시가 숨었다. 어쩐지 기묘한 긴장이 팽팽하게 이어지는 와중이었다.
“누가 그렇게 남의 집에 막 들어가래?!”
거의 동시에 화난 걸음으로 따라 들어와 루카의 어깨를 뒤로 잡아당기며 물린 이는 그의 쌍둥이 동생인 ‘루이’였다.
“안녕하세요.”
루이와 이란성 쌍둥이인 루카는 아주 정중한 말씨와 태도로 인사했다.
“아, 초면인데 인사들 하세요! 여긴 제 쌍둥이 동생 루이.”
“형도 초면이거든? 진짜 부끄러워서 어딜 내놓지 못하겠네…….”
“다 들려. 무슨 혼잣말을 그렇게 크게. 하하하.”
“들리라고 한 소리거든.”
뭐지. 만담 형제인가. 형제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낯선 이들을 앞에 두고 싸우는 것이 익숙한 듯했고, 그중 빠르게 먼저 이성을 찾은 동생인 루이가 다시 한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희 형이 원래 좀 철이 없어서요.”
“아, 맞다! 떡!”
처음의 목적을 완전히 잊은 듯 루카가 제 이마를 치자, 루이가 눈가를 살짝 찌푸리더니 자신이 챙겨온 떡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악수에 이어 당황스러울 정도로 몹시 인간다운 처사였다.
“여기. 이사 떡이요.”
루이가 내밀기 무섭게 루카가 공중에서 떡을 낚아채더니 보란 듯 기리의 품에 안겨주었다.
꼭 눈으로 확인이라도 하듯 루카의 시선은 잠시였으나 노골적으로 기리를 향해 멈춰 있었다.
“맛있게 드세요. 뭐…… 별 맛은 없겠지만?”
루카가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웃었다. 알고 말하는 건지 모르고 말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태도의 연속이었다.
“앞으로 이웃끼리 사이좋게 지내요! 사이좋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나와. 안녕히 계세요.”
제 형인 루카를 끌고 가면서도 루이는 끝까지 예의를 지키는 몹시도 상식적인 늑대인간이었다.
폭풍이 지나간 듯 얼떨결에 떡을 건네받은 기리가 잠시 멍하니 서 있자, 뒤늦게 나온 시몬이 그 떡을 하나 꺼내 물고는 제법 맛있다는 듯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성도 밝고 유쾌한 아이들이구나. 하하. 그나저나 너희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던데?”
시몬의 말에 순간 엔지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설마 저 자식들, 아니겠지……?
엔지의 말에 형제들의 시선이 동시에 새 이웃 집으로 향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