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의심과 믿음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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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의심과 믿음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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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의심과 믿음 사이
2023.08.03.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이윽고 매미가 떨어졌다.
색이 변한 잎에 빗방울이 튀자, 동그랗게 말린 물방울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낙하했다.
초가을에 어울리지 않는 늦은 우기였으나, 해안 도시인 그레이빌에서는 무엇 하나 이상할 것 없는 날씨였다.
갈라진 빗살 창에 습기가 스미고, 눈앞에 실버팽을 둔 기리는 한동안 낮게 떨어지는 숨을 천천히 골랐다.
때마침 방에 들이닥친 칸은 방금 어딘가에서 헤엄치다 나온 사람처럼 머리칼이 젖어 있었고, 그에게선 어렴풋이 바다의 짠 내가 느껴졌다.
“가르쳐줘. 이게 뭔지.”
칸은 자신이 기리에게 처음으로 반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충동적인 요구였고, 그답지 않게 침착함을 잃은 목소리였으나 칸의 눈은 오로지 의문을 파헤치고자 하는 간절함만을 담고 있었다.
칸은 자신의 그 끔찍한 ‘힘’에 관해, 차마 스스로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넌 너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 칸?”
늘 생각했었다.
기억이 있던 시간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늘 제 의지를 완전히 벗어난 꿈과 환상, 그리고 어렴풋한 잔상들이 전부였다.
칸은 문 바로 맞은편에 있는 전신거울로 시선을 비스듬히 옮겼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신체 변화를 매일같이 견디며 살아왔다. 칸은 곧 모든 게 고갈되고 말 것 같은 눈동자로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낯설게 관찰했다.
“……아무것도요.”
아주 오랫동안 이어진 고요 끝엔 허무한 답이 돌아왔다.
안다고 생각했으나 알지 못했다. 알고 싶었으나 그 또한 알지 못했다.
칸은 그렇게 흐르지 못하고 오랜 시간 고여 있는 물처럼 고독했고, 외로웠고, 그렇게 조금씩 썩어들어갔다.
“저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요. 그 무엇도요.”
단언하듯 대답하는 칸을 보며 기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동안 칸에게 들었던 말 중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어조였지만 기리는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이 말을 뱉기까지 나는 슬펐나? 칸은 천천히 제 감정을 되짚어보며 지난날의 감정을 떠올려봤지만 언제나 그렇듯 돌아오는 건 역시 단 하나였다.
이유 모를 답답함과 마음에 빈 한구석을 영원토록 채우지 못하는 이 지독한 공허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귀를 기울이고 있어도,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이 육체의 주인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정답을 내리고 싶었다.
기리는 갈등했다. 답을 먼저 내어주는 것과 스스로 답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너부터 대답해, 칸. 이거 어디서 났지?”
칸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는 그 시점에 이미 실버팽을 목에 걸고 있었으니까.
“칸. 솔직하게 말해.”
기리는 그 순간 자신이 비겁한 어른임을 인정했다.
자신이 누군지 조차 알지 못하는 이 불안한 소년에게 자신도 모를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이건 형제들 모두의 안위가 달린 문제일지도 몰랐다.
“……기억나지 않아요.”
조금 느렸으나 거짓이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어조였고, 여느 때의 칸의 대답과 다르지 않았지만 기리는 의심의 끈을 놓기가 어려웠다.
비가 그쳤는지 축축하게 젖은 나뭇잎 냄새가 풍겨왔다.
“불도 안 켜고 여기서 뭐해.”
별안간 나자크가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늑대인간의 눈은 밝은 곳에서나 진배없었으나 나자크는 그레이빌 여관 안에서 인간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다.
나자크의 시선에 현현한 빛을 내며 달빛에 반짝이는 실버팽이 들어왔다.
선대의 전사로부터 나자크란 이름을 물려받을 때, 그 이름과 형태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오로지 선택받은 자만이 부여받을 수 있다는 라이칸스로프의 상징이자, 위대한 뱀파이어 사냥꾼의 피를 물려받은 종족임을 증명하는 전통의 유물이었다.
실버팽을 보자마자 동요하는 나자크의 시선이 기리에게로 향했다. 아주 짧은 찰나였으나 기리는 그 무엇도 내뱉지 말라는 경고의 눈을 했다.
나자크는 충분히 기리의 말을 알아들었음에도, 실버팽을 본 순간 반드시 한 가지는 확인받아야겠다는 듯 칸의 앞에 마주 보고 섰다.
“둘이서 뭘 얘기하든 난 모르겠고. 보름날 왜 폐공장 근처에 간 거냐?”
기리는 경찰이 물어도 절대 대답하지 않던 칸에게 나자크가 미련하게 다시 묻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말해. 왜 거기 혼자 갔는지. 뭘 알고 있는지. 공장 밖에서 짐승의 발자국을 발견했을 때 그 표정은 뭘 의미했던 건지. 다 말하라고, 칸.”
칸은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었고, 형제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일’을 겪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경계와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디까지 믿고,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먼저 이 물건에 대해 말해. 그럼 나도 얘기할 테니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기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누구 하나 쉽게 물러서는 이가 없었다.
실버팽에 대해 알려주려면 자신이 늑대인간임을 먼저 밝혀야 했다. 이 물건을 가지고 있다 해서 칸이 늑대인간이란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말 한마디의 실수로 형제들을 위험에 빠뜨릴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기리는 신중하게 말의 무게를 달았다.
“우린……!”
침묵을 견디지 못한 나자크가 몸을 앞세워 말하려 하자 기리가 그를 등으로 막아섰다.
“이 물건에 대해 아직 말할 수 없어. 널 완벽하게 믿지 못하니까.”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칸 또한 그러하므로.
기리는 다시 한발 물러나기를 선택했다.
시간이 촉박한 건 사실이었으나, 칸에 대해 아는 것이 그레이빌에 침투해 온 뱀파이어들을 사냥하는 것보다 더 먼저라고 말할 수 없다.
“섭섭하니? 칸.”
몰아세울 땐 언제고 거짓말처럼 기리의 말투에서 다독이는 듯 온기가 느껴졌다.
칸은 느리게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도 할 수 없는 일을 이기적으로 기리에게만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피곤해요. 오늘은 먼저 자야겠어요.”
칸은 젖은 머리를 한 번 쓸어내리고는 무거워진 두 눈을 손바닥으로 내리눌렀다.
기리와 나자크는 힘겨워하는 그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칸의 방에서 멀어졌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이 빠른 속도로 그레이 여관에서 멀어졌다. 무어라 먼저 말을 하려는 나자크의 움직임이 보일 때마다, 기리는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주며 여관에서 최대한 멀리 거리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쯤이면 안 들리겠지.”
“형, 정말 뭐야. 아예 칸을 인간으로 취급 안 하기로 한 거야?”
“인간이길 바라. 그게 더 행복할 테니까. 그렇다고 작은 확률에 우리의 정체를 노출시킬 생각도 없어. 너희들 목숨으로 도박을 할 순 없으니까.”
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이었고 조심스러웠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 목숨을 노릴지 모르는 뱀파이어들로부터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선 더욱 그래야만 했다.
“하루도 잊은 적 없어. 내 동생이 우리를 배신한 그 일도 말이야.”
어쩌면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말이 기리의 입에서 나오자 나자크는 당황해 몸을 움찔했다.
잊고 싶었던 과거가 그들을 동시에 옥죄어오고 있었다.
동생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던 그 녀석을 기리는 아주 오랫동안 사랑하고 또 지켜왔다. 뱀파이어 사냥꾼으로서 강한 전사였던 기리를 동생인 ‘보바’는 언제나 질투했고, 늘 열등감에 시달려 주위 사람들을 괴롭혔지만 그조차도 너그럽게 품었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동생이니까. 가족이니까.
그 짧은 하나의 문장만으로도 기리는 많은 것을 포기할 수 있었고, 또 참아낼 수 있었다. 보바가 뱀파이어들에게 자신의 가족과 종족들을 배신하고 모두 팔아넘기기 전까지만 해도.
그러니 칸이라고 다를까.
친동생에게도 배반당해 가족을 모두 잃은 자신이다. 이제 와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두 번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건 자신에게도 형제들에게도 치욕과 고통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형…….”
나자크는 기리의 마음을 다 알면서도 선뜻 위로의 말을 내어주진 못했다. 똑같은 상실을 경험한 자들의 유대란 그런 것이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위로하지 않아도, 함께 살아남아 존재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그들에겐 유일한 위로임을 알기에.
하지만 그러면서도 칸이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자크는 어쩌면 칸은 보바와는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쉽게 누군가를 믿는 것이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칸을 적으로 삼는 것은 꽤나 곤욕스러운 일임이 분명했다.
“차라리 그냥 실버팽에 대해 말해줬으면……?”
“우리 말을 칸이 믿어줄 거라고 생각해?”
“간절해 보였어.”
정확히 뭘 원하는지는 몰라도 분명 아까 칸의 얼굴은 괴로울 정도로 그랬었다.
“어쩌면 칸에게 확실한 대답을 들은 걸지도 모르고.”
“그것도 믿을 순 없지. 실버팽에 대해선 어디서 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그렇다고 지금처럼 이렇게 계속 지내? 한집에서 서로 의심하면서?”
칸이 어떤 다른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것보다 나자크는 한 공간에 함께 지내면서 어쩐지 형제들과 자꾸만 깊어져 가는 관계가 불편했다. 더 다가갈 수도, 그렇다고 멀어질 수도 없는 사이가 돼버리면 거리 조절에 실패할 것 같단 생각이었다.
기리는 타고나길 리더로 타고나 정이 많고 책임감이 강한 나자크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떤 감정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지도 말이다.
“네가 힘들단 거 알아, 나자크. 하지만…….”
한참 고민하며 꽤 긴 시간 말을 아끼던 기리가 어렵게 다시 입을 뗐다.
“보름밤, 칸에게선 크록의 피 냄새가 났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나자크는 온 신경이 단번에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칸이 크록을 해친 것일까. 그러지 않았을 거라 믿고 있지만, 그럼에도 싹 트는 의심을 누를 길이 없다.
“그걸 왜 이제 얘기해?”
“확실하지 않으니까. 그때도 지금도.”
기리는 다방면으로 어린 형제들에 비해 모든 것이 뛰어났다. 감지, 후각, 운동신경, 청력 등 마하바 초원에서의 뱀파이어 사냥꾼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전사였다. 아무리 어린 형제들의 실력이 날로 좋아지고 있다고는 하나, 그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기리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그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일까,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까. 나자크는 자꾸만 제 입술이 말라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레이빌도 마찬가지야. 기류 자체가 이상해. 뱀파이어 놈들이 숨어 있는 게 분명해. 그 냄새를 지우려고 해봐도 소용없겠지. 그보다 더 이상한 건…….”
“뭐가 또 있어?”
“늑대.”
“……뭐?”
나자크의 눈빛이 동요하듯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주 가끔. 그리고 최근엔 더 자주, 낯선 늑대 냄새가 나. 그것도 여러 마리.”
그것이 새로운 동료를 향한 반가움인지, 아니면 적으로도 돌아섰을지 모르는 또 다른 늑대인간들에 대한 경계인지는 구분하기 어려웠다.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은 밤은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