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두 번째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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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두 번째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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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두 번째 희생자
2023.07.20.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크록의 시체가 팔로하이드 저택 마당에 도착한 것은 새벽녘의 일이었다.
저택 고용인들이 새벽 청소를 하러 나와 발견한 크록은, 첫 번째 희생자와 마찬가지로 모든 피가 밖으로 빠져나간 채 핏기조차 없이 죽은 동물의 가죽처럼 말라 있었다고 했다.
경찰들은 기괴하게 죽어 있는 또 다른 희생자를 보며 공포에 질린 듯했고, 어쩌면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도시 괴담까지 암암리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항간에는 팔로하이드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고 미쳤다 했고, 혹자는 새로운 자식을 입양해 가문의 권력과 재산을 모두 물려줄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가 분노한 것은 자신의 아들이 죽어 돌아온 것보다, 감히 제집 앞에 서슴없이 시체를 가져다 놓은 자들의 건방진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의 힘이 추락하고 농락당했다고 느끼는 듯했다.
팔로하이드는 경찰서장에게 얼마가 들든 상관없으니 어떻게든 자신이 만든 가족이란 거대한 제국을 박살 낸 그 범인을 반드시 잡아들이라며 분노했다.
덕분에 리암은 하루가 멀다 하고 경찰차를 타고 그레이 여관을 밤낮으로 감시했고, 청량했던 해안 도시의 분위기는 칙칙하고 어두운 죽음의 도시로 변해가고 있었다.
“정신 나갔군. 집 앞에 떡하니 전시하듯이 시체를 가져다 놔?”
소식을 들은 엔지는 정말이지 미친놈들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뱀파이어가 인간성이라곤 손톱의 때만큼도 없는 자들이란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은둔하지 않고 인간들의 세계에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릴 위한 선물이었겠지.”
“……선물?”
기리의 대답에 나자크가 반문했다.
“알려주고 싶었을 거야. 자신들이 오고 있다고. 우릴 찾아낼 거라고.”
그것은 경고였다. 선물을 가장한 아주 잔인하고 괴랄스러운 경고.
“이제 뱀파이어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더는 부정할 수 없어.”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으나 완벽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참한 결과였다. 기리는 생각보다 모든 일이 빠르게 흘러가자 그답지 않게 초조해졌다. 턱밑까지 추격해 온 놈들을 그저 곱게만 돌려 보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부터 학교가 끝나면 무조건 여관으로 바로 들어와. 순찰을 계속하겠지만 흩어지는 건 금물이야.”
뱀파이어에 대항할 수 있는 늑대인간들의 능력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단체 행동과 협력을 통한 전술이었다.
“경찰들은 괜찮을까? 그놈들, 누구든 상관없이 필요하면 죽일 거야.”
기리는 어쩐지 어깨를 떠는 듯 가볍게 진동하는 타헬의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겁먹을 거 없어. 우리 영역을 직접 지키는 게 전사의 긍지란 걸 잊지 마.”
언제까지 도망만 다니다 뱀파이어의 먹잇감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년들은 어렸고, 여전히 미완성이었으나 적은 형제들의 성장을 친절히 기다려주지 않으니까.
“그럼 칸 형은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리가 늑대인간인 걸 모르는데, 그냥 모른 채로 같이 놈들을 찾을 거야? 그러다 위험해지기라도 하면?”
“타헬 말이 맞아. 아무리 칸이 인간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녀석은 확실히 ‘인간’이니까. 안 그래?”
타헬의 말에 엔지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서서 거들었다. 일부러 부추겨 기리의 의중을 살필 심산이었지만, 아직 아무것도 결정 난 건 없다는 듯 그는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엔지는 성과 없이 홀로 하는 논쟁이 지루했는지 뻣뻣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한발 뒤로 물러났다.
나자크는 두려움을 이겨내려 애쓰는 어린 타헬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식으로든 의지가 되는 형이 되고 싶었으나, 실체 없는 거대한 적의 압박감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부모님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잔인한 사냥을 목도할 수 없도록 어린 동생의 눈을 가려주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까.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는 그 길목에 엔지가 어쩐지 푹 가라앉은 나자크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무슨 고민 있냐.”
“아니.”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빠르게 튀어나오자 엔지는 나자크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태어나길 몽상가로 태어나지 못한 엔지는 감정 또한 철저히 탐색한 후 움직이는 편이었지만, 최근엔 스스로가 낯설다고 여겨질 정도로 누군가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다.
“딱 봐도 문제 있구만, 뭘. 뭔데. 칸 그놈이 또 네 속 뒤집디?”
엔지답지 않게 섬세한 걱정이었기에 나자크는 잠시 고민했다. 계산이 빠른 녀석이니 어쩌면 자신보다 더 나은 방법을 내놓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뭘 그러고 그윽하게 봐. 너 나 좋아하냐?”
“미치지 않고서야.”
나자크가 소년답지 않은 우아한 자태로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엔지가 관자놀이 언저리를 손끝으로 긁적였다.
인간이든 늑대든 마음이란 건 참으로 간사해서 한 번 어딘가에 신경을 쏟기 시작하면, 그 감각적 욕망에 삼켜지기 마련이었다. 엔지는 나자크가 꼭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긴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자크였지만 이번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엔지는 아예 나자크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평소와 달리 집요하게 굴고 있었다.
“그럼 뭔데. 그날 칸하고 순찰 나갔다 온 뒤로 계속 넋 나가 있잖아.”
“…….”
극도로 절제하려는 나자크의 감각이 고스란히 엔지에게도 느껴졌다.
“늑대 발자국을 발견한 거 말고 더 이상한 거라도 봤어?”
그래. 보았지. 보고 말았지.
그 발자국을 보고 하얗게 질려가는 칸의 그 얼굴을.
나자크가 아직은 뱉지 못할 그 말을 삼키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너머로 울창한 라일락 숲이 하나의 섬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 *
크록의 시체가 발견되자마자 나자크가 향한 곳은 미카가 머무는 곳이었다.
그녀는 얼마간의 사이를 두고 번갈아 등장하는 이들 중 하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요 며칠 참 묘령의 남자들이 계속 찾아오네. 기뻐해야 하는 건가?”
살이 빠진 건지, 그도 아니면 훨씬 더 성숙해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라온 상점에서 ‘그 일’이 있은 이후로 오랜만에 마주 보는 나자크의 얼굴은 콕 집어 설명할 순 없지만 분명 어딘가 변해 있었다.
“누가 또 왔다 갔구나.”
“칸, 그리고 엔지도. 이제 너까지 셋이네. 이럴 거면 한 번에 다 같이 오지 그랬어.”
“그건 좀 싫은데.”
나자크가 상상을 한 모양인지 제법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체로 온화하거나 표정을 감추는 경우가 더 많았던 탓인지 미카는 그런 그의 반응이 묘하게 귀엽다고 생각했다.
나자크는 미카의 짧은 보폭에 맞춰 제 걸음 속도를 늦췄다. 병원은 생각보다 한산했고, 그 뒤로 어설프게 만들어진 산책길은 제법 그 쓰임새를 다해내고 있었다.
미카의 얼굴, 어깨, 그리고 손까지 들키지 않을 정도로 비스듬히, 그리고 천천히 바라보던 나자크가 흉터 하나 없이 맑았던 손등에 생긴 상처를 발견했다.
“여기저기 잘도 다치고 다니네.”
지난번 양호실에서도 그렇고 미카는 약속이라도 한 듯 나자크에게 들키고 만다.
미카는 거스름이 뜯기고 건조해져 갈라진 제 손이 문득 부끄러워져 등 뒤로 손을 숨겼다.
“아, 요즘 손빨래를 자주 했더니.”
“빨래?”
“그냥. 할머니 속옷이나 양말 같은 건 환자용 샤워실에서 손빨래로 해결해. 그게 더 편하거든.”
“넌 꼭 다쳤을 때 내 눈에 띄는구나. 신경 쓰이게.”
언제부터였을까. 사소한 생각 속에 네가 버젓이 밀고 들어와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 그리고 더는 그 생각들을 떨쳐내려 애쓰고 싶지 않아졌다.
신경 쓰인다는 말이 어떤 의미로 해석될지 빤히 알면서도 나자크는 그 말에 대해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불편하든 어색하든 견뎌야 할 것들은 견뎌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나자크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아직까진 밝은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집엔 몇 시에 가?”
“할머니 저녁 식사 드시는 거 보고. 한 7시쯤.”
“너무 늦지 않아?”
“여름엔 해가 길어서 괜찮아.”
“그래도.”
그가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해가 길어도. 그래도.”
미카에겐 그저 타인에게 벌어진 사건일지 몰라도 나자크에겐 아니었다. 모두 다 똑같은 희생자가 될 수 있었지만, 그게 미카이길 바라지 않는다.
엔지와 별반 다르지 않은 나자크의 태도에 미카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이나 불안에 떨게 하는 것일까. 그리고 언제부터 이들에게 난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돼버린 거지? 미카는 그 시점이 명확하지 않아 제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역시 찾을 수가 없다.
“혹시 그 죽었다던…… 그 사람 때문에 그래?”
조심스러운 그녀의 물음에 나자크는 잠시 숨을 골랐다. 굳이 불안감을 높이기 위해 꺼낸 말은 아니었지만 괜히 미카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든 건 아닌지 짧은 후회가 스쳤다.
“실종자가 한둘이 아니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날 걱정하러 일부러 와준 거구나.”
나자크는 답이 없었다.
그는 결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무언가를 주절거리며 길게 변명하지도 않는다. 그저 침묵이 긍정이라는 듯 가만 미카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너무 이른 아침이나 새벽은 안 돼. 해가 지고 나선 더더욱 안 되고.”
밤이 되면 뱀파이어 놈들이 더 활개를 치고 다닐 것이다. 여름엔 미카의 말대로 해가 길어 유리한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분별하게 인간을 해치고 다니는 놈들이니.
“얼마 전에 엔지가 그러더라. 내가 이상하다고.”
“그 녀석답네.”
“내가 정말 이상해?”
“어떤 의미론.”
미카에게 향하고 있는 엔지의 감정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자크는 제 형제가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느끼는 솔직한 마음까지 애써 모른 척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자신은 어떤 식으로든 미카를 신경 쓰고 있고,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근데, 너희야말로 참 이상한 거 알아?”
“우리?”
“너희 형제들 말야. 사촌지간이라지만 이상할 정도로 가까워. 서로.”
“우린 각자의 방식으로 가족을 모두 잃었으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저마다 말 못 할 사정을 안고서 흩어진 사촌지간이 모여 사는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있긴 했지만, 모두가 각자의 가족을 잃었을 것이라곤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입이 무거운 나자크가 선뜻 가족사를 털어놓으니 미카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다가, 그림자에 가려진 그의 어두운 낯빛을 보곤 조심스레 말했다.
“무슨 일, 있는 거지?”
“크록의 시체가 발견됐어.”
몇 분 사이에 여러 가지 충격이 동시에 미카를 덮쳤다.
“……그렇구나.”
정의할 수 없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크록을 정말이지 증오하고 미워했지만, 죽음 앞에 그런 마음이 무슨 소용이냔 듯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확인된 피해자는 이제 두 명이고, 실종자는 그보다 더 많아. 사라진 사람들이 살아 있단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미카의 보폭을 맞추며 걷던 나자크가 우뚝 그 자리에 멈췄다.
앞서가던 미카가 돌아보기를 기다리다, 그제야 눈이 마주쳤을 때였다.
“그러니 미카, 난 널 더더욱 혼자 둘 생각이 없어.”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