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 단서 (33/40)


33. 단서
2023.07.13.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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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똑.

버려진 폐가의 천장이 오랫동안 머금은 물기를 토해냈다.

오물과 쓰레기가 뒤섞인 어두운 내부엔 습하고 역겨운 인간의 분비물 냄새가 동시에 풍겨왔다.

손발이 결박되어 있지 않아도 이미 모든 의지를 잃어버린 크록은 한쪽 구석에 거지 같은 몰골을 하고서 공포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내 잘못이야 아니야…… 분명 내가 봤어. 내가 봤다고. 내가 봤어.”

크록이 영혼이 빠져나간 허수아비의 가죽처럼 형체 없는 허공을 응시한 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육신은 이미 살아 있는 영혼을 잃고 현실 세계를 떠도는 중이었다.

“내가 봤어. 봤다고. 봤어.”

“대체 뭘 봤다는 거야!”

질리언이 결코 무뎌지지 않는 제 욕구를 누르지 못하고 서슬 시퍼런 송곳니를 드러냈다.

“내가 다, 다 봤는데.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나한테만, 왜…….”

“크록, 네가 날 이렇게 실망시켜? 응?! 더는 내가 필요 없는 거구나. 그렇지?”

크록의 귀를 곧장 물어뜯을 기세로 질리언이 그를 재촉했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볕이 들지 않는 곳에서 한심한 표정으로 질리언을 보고 있던 라라가 성큼 그녀의 뒤로 다가가 섰다. 그림자조차 지지 않고,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지만 질리언은 크록에게서 떨어뜨린 제 몸을 옆으로 치워냈다.

라라가 천천히 허리를 숙여 앉더니, 크록의 눈을 조용히 들여다봤다. 언뜻 붉은 눈동자가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그 망가진 영혼을 꿰뚫었다.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몸을 뒤로 물린 라라가 보기 좋게 미간을 찡그렸다.

“이성이 완전히 마비됐는데? 이제 써먹지도 못하겠어. 쯧.”

신경이 곤두선 목소리로 라라가 제 목을 만지며 벌서듯 서 있는 질리언을 향해 일갈했다.

언제고 대부분의 일에 무미건조한 태도를 유지하는 라라였으나, 그녀는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멍청함을 가장 혐오하는 자였다.

“대체 얼마나 세뇌를 써먹은 거야?”

뱀파이어의 힘을 직접적으로 계속해서 받는 인간의 경우엔, 강도가 심해질수록 뇌에 손상을 입거나 정신착란을 일으켜 결국 미쳐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니 상급 뱀파이어일수록 이 능력은 더욱 정교하고 완벽해졌다.

“하긴. 처음부터 너 따위에게 그런 정교함을 바라는 게 바보 같은 짓인가.”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여전히 그 역겨운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다.

확실히 짓밟아줬어야 했는데 자비가 넘쳤나?

“그치. 내가 너무 말만 지나쳤지.”

고저 없이 닥쳐오는 느린 혼잣말에, 질리언은 라라에게 붙잡힌 채 숨이 막혀가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일순 몸을 움찔했다. 힘으로 압도당하면 그 몸이 기억하는 법이다.

하지만 질리언이 또 주제넘게 공격태세를 갖추자 라라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뱉었다. 어리석은 자들이란 하나같이 다 이런 모양새다.

“네가 아직 덜 맞았구나.”

세라로부터 권능은 부여받았으나 애초에 저열하기 짝이 없는 질리언에게 그런 정교함이 있을 리가 있나. 라라는 잠시나마 기대 아닌 기대를 했던 제 자신이 멍청했다고 인정하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앉았던 몸을 일으켜 가볍게 오른팔을 뻗어 잡으란 듯 질리언을 향해 제 손을 내밀었다.

“와봐. 이번에야말로 네 머리통을 제대로 뽑아서 불 질러줄 테니.”

기묘한 긴장이 어둠을 집어삼키는 그때였다.

공기를 가르고 스산한 바람이 칼날처럼 들이닥쳤다.

벨벳 빨간 망토를 뒤집어쓴 채 그들 앞에 안개처럼 나타난 건 그녀들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세라 님.”

라라는 살기를 누르고 지체 없이 그대로 제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머리를 숙였다. 질리언 또한 당황함을 애써 감추며 곧바로 세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세라는 마치 구름 위를 걷듯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와 라라의 어깨에 손을 살짝 올렸다 떼며 선선한 음성으로 말했다.

“고생했어. 라라.”

“아닙니다. 모든 것은 태조 님과 우리 종족의 번영을 위한 길이니까요.”

라라가 감정이 배제된 어조로 차분하게 세라가 원하는 답을 내놓자, 세라는 라라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시선과 달리, 질리언에게로 향하는 눈엔 살의가 섰다.

“무능하니 그 능력도 있어 봤자 쓸모가 없구나, 질리언.”

그 빌어먹을 목숨까지 바치겠다 하여 친히 내린 능력이었건만.

“일부러 고르고 고른 인간이라 하지 않았니?”

“마, 맞습니다. 그레이빌에선 가장 부유하고 가장 힘 있는 인간의 아들이라 분명 쓸모 있을……!”

콰직!

세라의 핏기없이 작고 하얀 손이 질리언의 턱을 움켜쥔 채 그대로 벽으로 밀어붙이자, 외벽이 파괴되며 마치 박제된 나비처럼 질리언의 머리통이 납작하게 처박혔다.

고통이 느껴졌지만 몸을 불태우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로는 죽지 않음을 서로가 잘 알기에, 질리언은 세라가 자신에게 마지막 자비를 베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세라는 잔뜩 권태로운 눈으로 질리언을 내려다보았다.

“지겹구나. 그따위 변명을 듣는 것도.”

콱-

지그시 밟았을 뿐인데 질리언의 손목이 돌아가며 그대로 뼈가 으스러졌다.

“윽, 끄아악-!”

너덜해진 손목을 쥐고 질리언이 바닥을 뒹구는 동안 세라는 그 옆을 지나쳐 구석에 몰려 있는 크록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의 턱을 손끝으로 들어 좌우로 몰골을 확인하더니, 이내 한 손으로 크록의 머리통을 그대로 잡아 들어 올렸다.

“크억!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전 아무것도 못 봤어요, 아무것도! 으악! 내가 봤다고 했잖아, 내가!”

크록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자, 세라가 한낱 미물을 바라보듯 시선을 내리며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엾은 것.”

이어 툭 손에 힘을 풀어 크록을 놓아준 세라가 권능을 발휘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더한 힘이 가해지자 강력한 세뇌에서 일시적으로 풀린 크록의 눈동자가 이완되었다.

“자, 아가. 이제 말해보렴. 무얼 보았지?”

“짐승…….”

“짐승? 그것참 흥미롭구나. 한 마리였니?”

“여러 명. 강했어…… 아주 많이. 조심해. 그들은 약하지 않아. 괴물, 괴물들이야. 너희들 전부 다 괴물…….”

세라는 쉼 없이 중얼거리며 움직이는 크록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훑어 내렸다.

“착하기도 해라. 이제 쉬게 해주마. 숨을 거둔 뒤 피를 마시는 자비를 베풀어줄게.”

쉴 수 있다니. 해방될 수 있다니.

크록의 두 눈동자에 감격의 눈물이 차올랐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콰드득.

세라의 손안에서 그대로 크록의 목이 꺾여 시든 백장미처럼 앞으로 고꾸라졌다.

한 인간의 생명은 누군가의 손에서 너무나 쉽게 사라졌다. 고귀한 인간으로서의 탄생과 죽음은 철저히 포식자로부터 짓밟혔다.

“우리에겐 어린 늑대인간들이 더 필요하단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돼.”

세라는 햇빛이 쏟아지는 창문 너머의 밖을 보며 그 냉혹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씁쓸한 눈을 했다.

“태양을 향해 나갈 수만 있다면 모든 게 완벽하지. 우린 낮과 밤을 모두 지배하는 거야.”

반드시 그런 날을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그녀가 중얼거리더니, 턱 끝으로 까닥 라라를 제 발밑에 불러 세웠다. 곧이어 허리를 반쯤 숙인 세라가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아이들을 불러야겠다. 준비는 됐니?”

“네. 세라 님. 모든 것은 당신 뜻대로 될 겁니다.”

다시없을 흡족한 충심이었다.

* *

나자크는 순찰을 도는 일에 몹시 진지했다.

그는 자신이 앞으로 한동안 지켜야 될지도 모르는 이 도시의 안전에 관심이 지대했다. 그는 늑대인간들의 전통대로 강한 전사였던 할아버지로부터 나자크란 후계자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기리는 언제나 나자크의 이름이 그 자신과 형제들의 자랑이라고 말해왔다. 나자크는 아주 어릴 적부터 진지하게 늑대인간의 전통에 대해 생각하는 흔치 않은 늑대소년이었다.

칸은 그런 나자크의 등을 보며 길을 따라가는 중이었다.

“너흰 정말 뭘 찾는 거냐.”

뜬금없는 칸의 질문에 주변을 면밀히 관찰하던 나자크의 시선이 그에게로 우뚝 멈췄다.

“무슨 질문이 그래.”

“너희가 찾는 거, 정말 단순히 ‘범인’이 맞아?”

어떤 의도가 있는 질문인지 나자크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칸은 지금 그 ‘범인’이란 존재가 어쩌면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을 가진 게 분명했다.

“기리 형이 그러더라. 이 도시를 지키고, 범인을 찾아서 누군가를 구해내는 거, 그게 너희들의 일이라고.”

“맞아. 그게 우리 일이야. 살아내야 할 몫이지.”

나자크는 부정 없이 순순히 끄덕였다. 하지만 칸에겐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답이었다. 왜 그것이 그들의 일인지 전제가 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않고서는 영원히 이해 못 할 이야기이기도 했다.

서로 닿지 못하는 이유를 알면서도 칸은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궁금해? 우리가 뭘 찾고 있는지.”

나자크가 선뜻 답을 알려줄 것처럼 질문했지만 칸은 좀처럼 대답하질 못했다. 분명 그 답을 들었을 때 자신이 책임져야 할 모든 상황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나자크는 돌아오지 않는 칸의 말을 기다리며 고요히 낮은 숨을 내뱉었다.

“넌 처음부터 그랬어. 무엇도 선택하질 않아. 우린 너와 이 일을 함께하기로 결정했지만 넌 작은 비밀조차도 말하려 하지 않지.”

칸은 변명할 수 없었다. 설명조차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가진 비밀이 무엇이든 간에 스스로조차 아직 납득하지 못한 이야기를 무슨 수로 나자크에게 하겠는가.

“비난할 생각은 없어. 그저 함께하기로 한 이상 네 몫을 해내, 칸.”

언제나 그렇듯 나자크는 작은 감정의 여파로 큰 사건을 그르치지 않는 성숙한 소년이었다. 칸이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말을 내어주고 난 뒤로는 그는 묵묵히 제 길을 다시 걸어갔다.

라일락 숲 앞, 형제들이 늑대인간으로 변해 훈련했던 그 폐공장 앞에 다다라서야 나자크는 칸을 향해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게 뭐야…….”

폐공장 근처에서 발견된 커다란 늑대의 발자국.

한눈에 보아도 형제들보다 훨씬 더 큰 개체다.

변종인가? 아니면 기리처럼 성인이 된 늑대인간일까.

이 도시 근방에서 분명 자신들과 같은 루가루의 냄새는 맡아본 적이 없었다. 순찰을 돌 때도 그렇고.

마지막으로 의심할 수 있는 건 보름밤에 엔지가 맡았던 자신들과 비슷한, 다른 종족일 수 있으나 늑대인간임은 분명했던 그 냄새였다.

루가루는 흔히 고소하면서 따듯한 냄새를 풍겼지만, 그날 맡았던 그 향기는 마하바 초원의 젖은 풀처럼 시원하고 녹음이 짙은 냄새였다.

대체 뭘까.

“기리 형에게 연락해야겠어.”

그렇게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나자크가 주변을 다시 훑으며 핸드폰을 꺼내 드는 그때였다.

고요한 정적에 돌아본 나자크의 시선 끝엔, 커다란 늑대의 발자국 앞에 굳은 채로 서서 하얗게 질려가는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칸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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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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