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31/40)


31.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2023.06.29.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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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너도 이런 나한테 적응해, 미카.’

세탁기에 넣어두었던 빨래엔 곰팡이가 피었다. 습하고 염분이 많은 그레이빌의 여름엔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쉽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미카는 밀린 빨래를 하고, 집 안 청소를 하고, 할머니의 옷가지를 챙기는 내내 제 머릿속에 반복 재생되는 저 문장을 떨쳐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당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다 말고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몸을 뒤로 홱 돌렸다.

“자꾸 그렇게 따라다닐 거야?”

병원에서부터 집까지, 그리고 자신이 분주하게 집 안에서 동분서주하는 동안 다섯 보 이상의 거리를 벌리지 않고 따라붙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엔지였다.

“위험하다고 했잖아.”

“대체 뭐가 위험하단 거야?”

미카는 지나친 존재감으로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엔지가 어쩐지 커다란 강아지 같단 생각을 하면서도, 그 생각을 들키지 않으려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짐짓 까칠하게 반문했다.

“지금 도시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알고도 묻는 거냐.”

“병원에서 여기까지 버스로 20분이야. 정거장이 코앞이고. 심지어 지금은 대낮이고.”

“낮이고 밤이고 중요해? 미친놈들은 그런 거 상관 안 해.”

무엇하나 정제되지 않은 문장이었으나 엔지는 아랑곳없이 단호했다. 미카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환하고 밝은 하늘을 손가락으로 쿡 올려 찍었다.

“과보호야.”

“내 말 뭐로 들었어. 적응하라고 했잖아.”

또다. 또 저렇게 말문을 막아 버린다.

도저히 같은 동급생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커다란 덩치에, 까칠하게 올라붙은 눈꼬리, 고운 단어 같은 거라곤 결코 내뱉을 것 같지 않은 일자로 앙다문 붉은 입매까지.

엔지. 그는 참으로 서툰 소년이었다.

명확하게 그어놓은 선을 스스로도 넘지 못하면서, 그 언저리를 계속해서 맴돌고 또 맴도는 모습이 어쩐지 애처롭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조금은 식은 열풍이 불어와 미카의 긴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바쁘게 움직여서인지 살짝 땀에 젖은 머리칼이 이마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

작은 미성으로 속삭이듯 떨어진 미카의 탄성에 엔지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뜨겁게 닿은 손끝이 잠시 미카의 볼을 간질이듯 스치고 지나갔다.

평소에 내뱉는 신경질적인 말씨와 달리 부드럽게 미카의 귀 뒤로 머리칼을 넘겨주는 손은 지나칠 정도로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다. 꼭 조금이라도 힘을 쓰면 으스러져 버릴 무언가를 만지는 것처럼 엔지는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고마워.”

반쯤은 어색한 미소가 섞인 미카의 말이 떨어지자, 나른한 미소가 엔지의 입술 끝에 걸렸다.

뭐야. 왜 저렇게 웃는 거야.

미카는 엔지의 해석할 수 없는 미소를 두고 혼란에 빠졌다. 안 하던 짓을 계속하는 까칠한 문제아는 모범생인 미카가 감당하기엔 난해하기만 했다.

엔지는 맑은 광채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미카의 두 눈을 가만 바라보며 잠시 감상했다. 그 어떤 적대감도, 누군가에 대한 노여움도 읽히지 않는 그저 선하고 순수한 눈망울이었다.

한때는 자신도 저런 눈을 가진 적이 있었을까. 적어도 죽어가던 제 누나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의) 모습이 그렇게 기억된다면 엔지는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왜 그래?”

“넌 참…… 이상해.”

말끝을 흐리던 엔지가 말 그대로 이상한 단어로 문장을 마무리하자, 역시 이해하지 못한 미카가 한쪽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이상하다고? 내가?”

“닮았어. 내가 아는 누구랑.”

엔지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뱉고 말았다.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는 늘 그랬듯 괄괄하고, 다정했으며, 어떤 순간에도 긍정을 잃지 않는 밝은 이였다.

기다려도 답이 돌아오지 않자 미카가 살짝 고개를 옆으로 젖혀 엔지와 눈을 맞추더니 궁금한 모양인지 대답을 재촉했다.

“그게 누군데?”

“있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

가지 말라고 눈물로 애원하는 어린 동생을 살리기 위해, 그 작은 손을 뿌리치고서라도 뱀파이어에게 제 몸을 제물로 바친 그런 바보 같은 가족.

피가 빨려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고통의 신음 한 번 흘리지 않던 독한 소녀.

빗물을 받아 마시며 피신하면서도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던 나의 누이.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엔지는 입을 닫길 선택했다.

가끔 그 장면이 떠오를 때면 언제나 그렇듯 몸이 잔잔하게 떨려온다. 처음엔 분명한 공포였다. 압도적 힘에 눌려버린 두려움이었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약한 자신에 대한 원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것은 어쩌지 못하고 제 안에서 커버린 분노, 복수라는 달콤한 먹이를 조금씩 먹여가며 키우고 있는 거대한 살의였다.

“엔지.”

톡. 놀라지 않게 엔지의 팔 언저리를 살짝 잡아당긴 건 청소를 하느라 차가운 물에 식어버린 미카의 젖은 손이었다.

미카의 손이 닿기 무섭게 엔지의 떨림은 거짓말처럼 멎었다. 자신보다 훨씬 커다란 소년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미카는 더 이상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괜찮냐는 뻔한 걱정도 하지 않은 채 그녀는 그저 멈췄던 마당 치우기를 계속했다.

태연하게 쌓인 흙먼지를 물로 씻어내는 미카의 뒷모습을 보며 엔지는 저도 모르게 허, 하고 웃음을 짓고 말았다. 정말이지 눈치가 빠른 건지 없는 건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도와줘?”

아예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미카의 뒷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엔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제 와서? 얄밉긴.”

작은 웃음기가 섞인 대꾸에 엔지의 초록빛 눈이 반쯤 휘어졌다.

“근데 너 안 가?”

“가긴 어딜 가.”

“그럼 여기 계속 있겠다고?”

제 집인 양 편안하게 들어앉아 어깨만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엔지는, 그저 제 허벅다리에 팔꿈치를 괴고 허리를 앞으로 숙여 앉았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그의 옅은 미소를 보지 못한 미카는, 그저 투덜거리는 유치한 대화를 하면서도 제 할 일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집 작은 마당엔 제법 작물이 자란 한 평 정도의 텃밭이 있었고, 그 주변엔 할머니가 정성을 들여 키우는 화분들이 잠깐의 소홀함에 시들시들 말라가고 있었다. 미카는 집으로 돌아올 할머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것들을 살려내야 했다.

호스 길이가 짧아 화분에 닿질 않자, 끙끙거리며 화분을 하나씩 옮기던 미카가 그제야 한동안 엔지가 말이 없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왜 대답이 없……!”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척도 없이 제 등 뒤로 다가와 선 엔지 때문에 미카가 그대로 손에 들고 있던 화분을 허공에 툭 떨어뜨렸다.

그녀의 입에서 헉, 하고 감탄사가 나오는 그 순간, 엔지가 능숙하게 화분을 한 손바닥으로 받아들며 미카의 등 뒤에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쯧. 조심 좀 하지?”

누가 누구더러 조심하라는 건지.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그저 앞만 보고 겹쳐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몹시 낯설었으나, 엔지는 그런 것 따위 신경조차 쓰질 않는 듯 건조한 목소리였다.

게다가 너무 가깝잖아.

“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놀랐잖아!”

“아. 미안. 기척 내는 게 익숙하질 않아서.”

때때로 엔지를 포함해 그레이 여관의 형제들은 도무지 미카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종종 뇌까리곤 했다. 어떤 순간엔 이유를 알 수 없이 그들이 신비롭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엔지는 곧 정말 실수했다는 듯 어색하게 제 목덜미를 살짝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부러 느리게 발을 움직여 미카를 한쪽 어깨로 슥 밀어냈다.

“비켜. 내가 옮길게.”

“나도 할 수 있어.”

“몰라서 비키라는 거 아냐. 내가 하는 쪽이 덜 불안해.”

분명 건조하다고 생각했는데 또 거짓말처럼 금방 다정해지고 마는 조곤한 음성이었다.

엔지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화분을 옮기곤 호스를 연결해 물을 주는 것까지 깔끔하고 빠르게 모든 일을 완수했다. 덕분에 두 손을 놓고 앉아서 쉬던 미카가 엔지의 등을 지그시 바라봤다.

이 자리, 이 시선, 누군가의 등을 바라본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엔지가 마루 끝에 앉아 뭘 보고 있나 했었다.

너의 시선 끝에 닿아 있는 건 나였구나.

미카가 순순히 그런 생각을 정돈하고 인정하는 때였다. 엔지의 핸드폰이 울리자, 그가 대충 손에 묻은 물기를 털곤 이름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귀에 전화를 갖다 댔다.

-어디야?

인사말 하나 없이 다짜고짜 들려오는 기리의 짤막한 물음에 엔지는 시선 끝으로, 또 가만 기다리지 못하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미카를 확인했다.

어쩐지 눈앞에서 멀어지면 불안한 것이, 반쯤 받아들이긴 했어도 여전히 힘들고 어렵기만 한 감정들의 연속이었다.

-늦지 않게 들어와. 오늘 근방 순찰할 거니까. 실종자들이 남긴 단서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경찰은 뭐하고 우리가 하냐.”

엔지가 비뚤어진 자세로 외벽에 등을 기댔다.

-약하디약한 인간이야. 안타깝지만 그들에겐 한계가 있어. 어차피 놈들을 잡을 수 있는 건 우리밖에 없다는 걸 알잖아.

기리는 언제나 그렇듯 차분하게 엔지를 설득했다. 매번 반복되는 줄다리기였으나 단 한 번도 기리는 그에게 강압적으로 선택을 강요한 적 없었다. 무지막지한 힘을 가진 전사라 불리는 기리의 과거치곤 당황스러울 정도의 온화함이기도 했다.

엔지는 자신이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걸 깨닫고 조용히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어서 가 봐.”

미카가 먼저 산뜻한 얼굴로 열린 대문을 향해 눈짓했다.

“가만 보면 넌 날 못 쫓아내서 안달이다?”

어딘지 뚱한 말씨로 어린 소년처럼 말하자 미카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적응하라더니 참 새로운 모습 많이 보여주네. 무슨 일 있음 언제든 연락할게. 됐지?”

어르고 달래듯 미카가 그를 다독이고 나서야 엔지는 순순히 돌아섰다.

빠른 속도로 그레이 여관을 향하는 엔지의 발은 평범한 인간들의 눈으로는 판독하기 어려운 걸음이었다. 잠시 정신을 차리면 몇 미터씩 앞서나가는 엔지의 움직임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다행히 없는 듯했다.

그레이 여관 앞에 당도한 엔지는 모여 있는 형제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건 또 무슨 그림일까?”

까칠한 엔지의 음성이 향한 곳엔 칸이 서 있다.

“말했잖아. 순찰이라고.”

기리가 대신 대답했지만, 그렇다고 엔지의 공격적인 언사를 멈추게 할 순 없었다.

“누가 몰라 물어? 지금 당장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받는 데다가, 뭐 그렇게 대단한 비밀이라고 입만 꾹 다물고만 있는 저 고집불통을 왜 달고 다녀야 하냐고 묻는 거잖아, 지금.”

엔지는 한마디 한마디에 완벽한 사실 적시와 온갖 신경질을 농축해 담았으나, 칸은 동요조차 하지 않는 강처럼 잔잔한 눈동자로 엔지와 시선을 마주했다.

한 걸음 성큼 다가선 칸은 엔지의 앞에 멈춰 섰다.

“함께 갈 거야. 너희와.”

먼저 결정을 끝낸 건 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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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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