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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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적응
2023.06.23.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뱀파이어인 악시안과 질리언은 태생적으로 맞지 않았다.

질리언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으나 차갑고 잔인한 성품을 가졌고, 악시안은 전투력이 높은 데다 쉽게 흥분하며 절제력이 약했으니, 이런 두 사람이 만나면 당연히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인간의 피를 먹어? 미친년이 따로 없네.”

질리언이 조롱하듯 악시안을 향해 비난을 쏟아붓자, 악시안은 죄책감이나 반성 따위라곤 없는 표정으로 외려 시퍼런 송곳니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인간 하나 제대로 포섭 못 해서 빌빌거리던 너보단 낫지. 매혹이니 뭐니 정신지배 한다고 떠들고 다닐 땐 언제고 아직도 깜깜무소식이니?”

“감히 세라 님을 모욕해? 그 능력은 세라 님에게 부여받은 권능임을 몰라?”

“물타기 하지 마. 네가 무능력한 거니까. 세라 님은 내가 인간의 피를 탐하고 다니는 것보다 무능력한 걸 더 혐오할걸?”

“뭐?!”

질리언의 눈빛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고, 소금처럼 창백하게 흰 피부 안이 마치 괴생명체가 사는 것처럼 꿈틀이며 요동치고 있었다.

“오호, 한번 해보자 이거지?”

인간의 피를 마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악시안은 힘이 넘치는지 오히려 환대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못 할 거 없지. 이번에야말로 네 머리통을 뽑아서 내 의자로 써줄게.”

“좋아. 난 네 팔다릴 뽑아서 책상으로 써줄게.”

끝나지 않는 언쟁에 한쪽에 얌전히 앉아 상황을 지켜보던 라라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라라는 위로는 세라가 이끄는 빨간 망토단의 행동대장 격인 역할을 맡고 있었고, 아래로는 악시언과 한 조이면서 악시안과 질리언을 관리, 감독했다.

“시끄러워. 그만들 해.”

크록도, 도시에서 발견된 피가 빨린 피해자도, 모든 것이 하나의 화살이 되어 자신들의 집단을 가리키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이 꼬이는 게 번거롭다 여겨지는 찰나인데 저런 철부지 같은 싸움질이라니. 일을 하는 건지, 육아를 하는 건지 도통 구분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식욕도 못 참는 게걸스런 계집애!”

“늑대는 원래 양을 먹어. 그게 진리잖아?”

조곤조곤 떨어지는 라라의 말에도 악시안과 질리언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바람처럼 둘 사이를 파고들어 와 양팔을 뻗어 악시안과 질리언의 목을 그대로 틀어쥔 라라가 아주 느리고 차분하게 그 손에 힘을 실었다. 그건 먹잇감을 서서히 조여 죽인 뒤 식사를 시작하는 아나콘다만큼이나 압도적인 악력이었다.

라라는 겉으론 수평적으로 대하는 듯해도, 굳이 서열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귀찮을 뿐이었다. 강한 것은 단순하다. 그러니 굳이 평소에 계급을 정해두지 않아도 때가 되면 알게 되는 것이 힘이었다.

“그만.”

짧고 강력한 명령이었다.

라라의 손등 위로 실핏줄이 투둑 살갗 위로 드러나며, 둘의 얼굴이 점점 질려갈 때쯤이 돼서야 그녀가 양쪽 팔에 힘을 풀며 바깥으로 툭 밀어냈다.

“큭!”

“커억! 켁!”

동시에 각자의 목을 잡고 기침을 하면서도 질리언과 악시안은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눈으로 붉은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적당히들 해, 적당히들. 미친 개새끼들처럼 달려들지 말고.”

라라가 손을 허공에 툭 털며 잔뜩 귀찮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철부지들을 데리고 어떻게 늑대인간들을 잡으란 건지.

“악시안. 이번 건은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야.”

라라는 차분하고 지능적인 데다 사리 분별이 빨랐기에 늘 안전 지향적인 방식으로 일 처리를 해왔다. 그런 그녀에게 같은 조인 악시안의 존재란, 결벽증을 가진 자의 앞에 떡 하니 버려진 쓰레기더미나 다름없었다.

“설명할 게 뭐가 있어. 어차피 실종자 중 한 명이잖아.”

“발견이 됐으니 실종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됐지.”

“걱정 마. 신원 확인 안 되는 먹잇감이니까.”

자신들의 수장인 세라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라라는 죽을 때까지 악시안이나 질리언을 상대하며 이런 멍청한 대화를 듣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한때는 악시안의 머리에 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세라에게 보고를 한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은 다 한 것이다.

차라리 없애는 게 나을까. 둘 다 사고사라든가. 방금처럼 죽기 직전까지 싸우게 만들어서 편안하게 처리한다든가.

순간 머릿속에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라라는 그조차도 피곤해 생각하기를 멈췄다.

“질리언, 크록을 데려와.”

이미 판은 시작됐고, 주도권은 이쪽이 쥐고 있으니, 또 다른 선물을 하나 더 배달해줄 차례였다.

* *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미카의 손바닥에 올려진 건 오렌지 맛 사탕 몇 개였다.

“뭐야?”

어울리지 않는 엔지의 행동에 미카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아냈다.

엔지는 저조차 지금 모습이 감당이 되지 않는지, 멋쩍은 표정으로 창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를 만나고서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에 미카는 좀 더 녀석을 놀리고 싶어졌다.

“무슨 소릴 하려고 그렇게 쳐다봐.”

“그냥.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다 싶어서.”

미카가 사탕 하나를 뜯어 입에 넣으며 장난스럽게 말하자, 엔지가 입술 끝을 살짝 깨물곤 차분하게 가라앉은 제 녹갈색 머리칼을 지저분하게 헝클였다. 안경에 얼룩 하나 남기는 법 없이 늘 완벽을 추구하는 그가 제법 당황했다는 증거였다.

“여자애들은 이런 거 먹으면 기분 좋아진다며.”

“여자애들이 아니라 대부분은 그래. 쓴 것보단 단 게 맛있으니까.”

“따지지 마, 범생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물어보지 못했지만, 엔지는 내내 미카의 기분이 신경 쓰였다.

잠은 잘 잤는지, 밥은 잘 먹었는지, 네가 준 오렌지에선 왜 그렇게 달콤한 맛이 났는지. 그 모든 답들을 미카의 입을 통해 듣고 싶다면 미친 걸까.

왜 이렇게 돼버린 거지? 설마 인간을 상대로 풋사랑이라도 하는 거야?

엔지는 스스로에게 자조 섞인 질문을 던져놓고도 여전히 미카에게서 시선을 떼는 법이 없었다. 그래,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인간인 네가 너무나도 거슬리고, 신경 쓰이고, 궁금해서 미치겠다고.

“그래서. 이거 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럴 리가 있나.

고작 이런 유치한 짓을 하겠다고 찾아온 것이 아니다. 하지만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으니 엔지는 저조차도 그런 자신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미카는 입안에서 사탕을 이리저리 굴리며 조급한 기색 없이 엔지가 말을 꺼낼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렸다.

“그날은…….”

엔지는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말을 빙빙 돌렸다.

“너흰 전부 말 못 하는 병이라도 걸렸니?”

잘 참나 했더니 결국 견디지 못한 미카가 숨을 길게 내쉬며 답답하단 듯 채근했다. 칸이나 엔지나 왜 이렇게들 제 할 말을 못 하는 건지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굳이 말을 고르지 않아도 자신은 언제나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란 걸 아직도 몰라주는 걸까.

“야, 병은 무슨. 아니,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그러니까…….”

또다시 침묵만 길어지는데, 정말이지 이번에야말로 참지 못한 미카가 두 팔짱을 끼고선 벽에 등을 기대고 삐딱하게 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엔지는 자신이 불량배에게 붙잡혀 골목으로 끌려온 신세 같다고 생각했다. 미카의 눈빛이 꼭 그러했으니까.

“그래. 그냥 여기서 밤새우지, 뭐.”

“그럴까. 그럼 나야 좋고.”

숙맥처럼 제대로 설명도 못 할 땐 언제고, 불쑥 엔지가 미카를 따라 덩달아 벽에 등을 기대고 서며 그녀를 고즈넉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왜 따듯하지?

항상 냉소적이기만 하던 엔지의 눈빛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그, 그렇게 쳐다보면 뭐!”

“내가 뭘 어떻게 쳐다봤는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뭐지. 이 똑같은 상황은.

주도권을 완벽히 틀어쥔 엔지는 아예 입꼬리를 올린 채 노골적으로 미카를 놀려먹고 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엔지를 구석으로 몰았던 건 자신이 아니었던가.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돼버린 건지 미카는 정확한 시점을 더듬는 중이었다.

“그래. 이렇게 밤새우는 게 좋겠어. 그치?”

생각하는 걸 멈추게라도 하려는 듯, 엔지는 미카의 머리 위로 느릿하게 제 한쪽 팔을 짚고 어깨 안에 그녀를 가뒀다. 갑작스런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으로 제 앞을 막아선 엔지 덕분에 미카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중이었다. 두 손을 어쩔 줄 모르며 미카가 엔지의 빈 옆구리 쪽으로 빠져나가려는 때였다.

“그날은 미안했어. 우리가 결국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거란 것도, 굳이 강압적이게 굴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게 데려가서 가둬두듯 혼자 두고 나온 것도. 아무튼 전부 다.”

다정하고 차분한 음색이었다.

평소처럼 비꼬지도, 냉소적이지도 않은, 그저 문장 그대로의 담백함을 지닌 진심 섞인 사과였다. 그 마음이 너무도 온전히 전해져서 미카는 쉽게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잖아. 괜찮아. 나야말로 미안해. 냉정하게 따지면 그건 내 일이었잖아. 나 때문에 너희까지 힘들게 한 것 같아서 내내 마음 불편했었어.”

느릿느릿 자신처럼 진심을 꾹꾹 담아 말을 뱉어내는 미카의 얼굴을 엔지는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

“내가 이번엔 또 어떻게 보는데?”

“그냥…… 아까보다 더 따듯하게.”

마주 보고 있던 시선을 천천히 거두며 엔지는 느리게 제 두 눈을 감았다 떴다.

이내 급하지 않게 미카에게서 몸을 뒤로 물리며 거리를 조절했다. 엔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맞아.”

“……뭐?”

“네가 느끼는 게 맞다고. 난 아마도 널 그렇게 보고 있는 것 같거든.”

그렇게 보고 있다고도 아니고, 보고 있는 것 같다니.

엔지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떤 눈으로 미카를 보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돌을 얹어놓은 듯 마음이 무겁고, 쥐어짜듯 한쪽 흉곽이 조여오는 감각을 경험하는 중이었다. 그 모든 것은 그에게 처음 벌어지는 일이었다.

“미카.”

“응.”

그녀의 짧은 대답에 미세한 떨림이 섞인 것을 엔지는 쉽게 알아차렸다.

“난 뭐든지 괜찮은 네가 걸려.”

“괜찮으니까 괜찮다고 할 뿐이야.”

“네 마음 잘 들여다봐. 정말로 괜찮은지. 괜찮아져야만 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건지.”

오로지 미카만을 위한 충고였다. 섣불리 아는 척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위선적으로 걱정하는 척 내뱉는 인간다운 말도 아니었다. 엔지의 마음이 그렇다는 걸 미카는 그의 목소리로, 눈빛으로, 행동으로 모든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말이지…….

“그거 알아? 너 정말 적응 안 돼.”

“알아. 나도 나한테 적응 안 되니까.”

엔지가 순순히 인정하며 선연한 미소를 띠며 답했다.

“근데 해보려고.”

언제까지 미뤄둘 순 없는 일이었다. 들어가서 두드려 맞든, 아파서 도망치든, 미련하게 버티고 서든 그중 무엇이라도 해야 엔지는 타들어 갈 것 같은 이 감정을 해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너도 이런 나한테 적응해, 미카.”

모든 것이 처음인 이 순간에 너도 동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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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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