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용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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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용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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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용의자
2023.06.15.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크록이라고?”
새로운 피해자에게서 크록이라니. 기리는 나자크에게 얼른 설명하라는 눈을 했다.
“전에 말했던 거 기억해? 크록에게서 뱀파이어의 향기가 난다고.”
그랬었다. 언젠가부터 그 녀석에게서 희미하게 뱀파이어의 냄새가 났다. 그가 실종되기 전 라온 상점에서 그 난리가 벌어질 땐 노골적일 만큼 그 냄새를 풍기며 나타나지 않았던가.
“설마, 같은 놈이냐.”
기리가 나자크의 답을 기다렸다. 곧이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나자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
다시 한번 끄덕.
두 번의 확인을 거치고 나서야 기리가 바닥에 대고 있던 제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격하게 반갑네, 진짜.”
기리는 진심이었다. 보이지 않고, 정체를 알 수 없었을 때나 당했지 지금은 아니었다. 애초에 힘이 나약해서 당한 것이 아니었다.
뱀파이어 집단은 영악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제 종족들에게 접근했다. 정체를 드러내는 방식은 결코 쓰지 않았기에, 기리는 잔 머리털 한 가닥이라도 보인다면 집요하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쫓아갈 심산이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잡을 생각이지.”
“잡아서?”
“알아내야지. 우리 모두의 가족들을 그렇게 만든 게 그놈들이 맞는지. 맞다면 왜 그랬는지. 아니면 그 뒤에 다른 누군가가 더 있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다 잘라내서라도.”
기리는 좀처럼 동생들 앞에서 잔인한 말이나 진득한 복수심 따위를 쉽사리 내보이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늘 정의롭고 형제들에게 따듯한 존재였으나, 그들을 위협하는 실체가 점점 보이면 보일수록 날것 그대로의 본성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기리는 한때 마하바 초원의 파수꾼이었고, 형제들이 인정하는 최고의 전사였으며, 그 누구보다 종족의 번영과 평화를 갈망하는 이였다. 그렇기에 모두가 그를 사랑했고, 모두가 그를 의지했었다.
그토록이나 따듯하고 다정한 기리의 가슴에 달궈진 분노와 소리 죽인 복수심을 품게 만든 것이 바로 뱀파이어였다.
기리가 먼지조차 묻지 않은 옷을 털어내며 돌아섰다.
“우리도 준비해볼까. 얼굴 정돈 보고 인사하는 게 예의니까.”
장마가 지나간 자리엔 뜨거운 햇볕이 들어앉았다.
나자크는 손으로 그 빛을 가리며 피해자의 죽음에 짧은 묵념을 했다.
* *
도시에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미성년자인 데다 결정적 증거가 없어 바로 문제가 되진 않았지만, 칸이 용의 선상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레이빌 사람들은 전염병에 걸린 환자를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칸과 가족들을 피하고 외면했다.
칸은 다른 건 다 괜찮았지만 시몬과 요한나가 고통스러워하는 건 도무지 참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날 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순순히 털어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느 쪽이 더 내 가족을 지키는 데 용이할까. 칸의 머릿속에 든 것은 오로지 그 선택지에 관한 갈등뿐이었다.
모자를 푹 눌러쓴 칸이 사람들의 시선을 이겨내며 도착한 곳은 도시 외곽의 작은 병원이었다.
입원실이 그리 많지 않은 데다 시설이 낙후된 소형 병원이었지만, 무릇 나이 많은 이들이 그렇듯 오랜 시간 인연을 쌓아온 곳을 쉽사리 바꾸지 못하는 듯했다.
미카 할머니의 고집대로라면 그녀는 지금 이곳에 입원해 있을 것이 분명했다.
“미카.”
작고 낮은 부름에 할머니의 침대 머리맡에 허리를 구부정하게 낮춘 채 선잠이 들어 있던 미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칸……!”
헛것이라도 본 표정으로 미카가 쭈뼛거리며 병실 앞에 선 칸을 향해 황급히 달려나갔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건 저뿐만이 아닌 듯 오랜만에 본 칸의 얼굴은 많이 상해 있었다.
그날 ‘그 일’이 일어난 후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칸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그 일을 설명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한 듯,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면서도 내내 입안의 말들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 마음을 꼭 알기라도 하듯 미카가 그를 향해 먼저 따듯하게 웃어 보였다.
“걱정돼서 일부러 여기까지 와준 거야? 병원은 어떻게 알았어?”
“너도 할머니도 쭉 한 곳만 다니는 게 습관이니까.”
예상외의 답변인지 미카가 인정하듯 슬며시 웃음을 흘렸다.
“맞아. 할머니가 정신없는 와중에도 꼭 이 병원으로 와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니까? 정말 대단하지 않니? 기절하는 그 순간에도 병원을 지정해주다니. 정말 여러모로 못 말려, 우리 할머니.”
힘든 상황을 농담으로 가볍게 넘기는 미카를 보자 칸은 어쩐지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짧은 시간 안에 너무도 많은 일이 벌어졌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칸은 문 앞 복도에 서 있는 것이 불편했는지, 안쪽으로 한 걸음 들어서며 모자를 한 번 더 내리눌렀다.
“저기, 미카.”
“얘기 들었어.”
그 모든 것을 함축한 말이었지만 칸은 미카의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굳이 어렵게 설명해야 하는 불편함을 덜어주기라도 하듯 미카는 의연한 표정으로 가만 칸을 바라보더니, 이내 그의 모자를 덥석 잡아 그대로 벗겨냈다.
“미카……!”
“역시. 넌 모자가 안 어울려.”
“뭐?”
“잘생긴 얼굴 가려 어디다 쓰게? 넌 하다못해 그거라도 있어야 해.”
“내가…… 잘생겼어?”
어딘지 이야기의 방향이 아주 이상하게 흘러간다.
자신이 말을 뱉어놓고도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미카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오히려 뻔뻔하게 나가는 전략을 선택했다.
“몰랐어? 네 모든 면 중에 제일 봐줄 만한 게 그 얼굴이라고.”
“몰랐어.”
칸이 순수한 얼굴로 순순히 답하자 미카는 금단의 죄라도 지은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가리고 다니지 마.”
“혹시 네가 불편할까 봐.”
“내가 왜?”
미카는 정말이지 모르겠단 얼굴로 칸을 향해 반문했다.
“다 알고 있잖아.”
“응. 그래서?”
“혹시 전부 다는 모르는 거야?”
“네가 말하는 ‘전부’라는 게, 크록은 실종됐고, 네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받고 있고, 그런 와중에 도시에 살인사건이 발생한 그 모든 일을 말하는 거라면. 난 다 알고 있어.”
미카는 칸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그대로였다.
무언가 변한 모습을 바란 건 결코 아니었지만, 며칠간 사람들의 외면과 수군거림을 감당해온 칸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적어도 자신을 불편해하는 기색 정도는 내보일 줄 예상했던 탓이다.
“그래도 괜찮아?”
“뭐가?”
“내가 이렇게 너랑 할머닐 찾아오는 거 말이야. 불편하면 언제든 말해주면…….”
쿵. 모자를 벗은 칸의 이마를 툭 내리친 건 미카의 작은 주먹이었다.
“아.”
아프지 않았으나 꼭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칸이 입에서 소리를 냈다.
“엄살 피우지 마. 넌 그런 멍청한 소릴 말이라고 입에 달고 다니니?”
“……뭐?”
“네가 아니란 것쯤은 너한테 안 들어도 알아. 그러니까 그런 바보 같은 소리 내 앞에서 하지 마. 알았어?”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칸. 난 널 알고, 널 믿어.”
어쩌면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굳이 여기까지 꾸역꾸역 찾아와 미카를 만나려 했던 건, 정말 어쩌면 아무 조건 없이, 부담도 기대도 없이 자신을 믿어줄 누군가가 필요해서.
언제고 자신의 양부모님은 제 편이 되어줄 것이 분명했지만 그 마음의 무게는 늘 칸을 짓눌러왔다. 그들의 사랑에 어떤 식으로든 보답해야 한다는 그 마음은 자신을 견디게도 했지만, 지금처럼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자, 이제 대답 됐지?”
미카는 선한 눈을 휘게 지어 보이며 입술 선을 곡선으로 끌어올렸다. 늘 그랬던 것처럼 매 순간 칸에게 보여주었던 표정 그대로였다.
분명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미카는 칸에게만은 언제나 그렇듯 환하게 웃어주었다. 바로 지금처럼.
“뭘 잘했다고 웃어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는 다른 목소리에 미카의 어깨가 움찔했다.
별안간 칸의 등 뒤로 나타난 건 엔지였다.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미소를 짓고 있는 미카의 얼굴을 아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어디로 샜나 했더니. 여기서 뭐하냐, 너.”
여전히 시선은 미카에게 향한 채였지만 애꿎은 화살은 칸을 향해 날아갔다.
“보시다시피 병문안.”
“지금 이렇게 나돌아다닐 때야?”
“못 다닐 이윤 없잖아.”
“너 지금 밖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나……!”
엔지는 버럭 화를 내다가 별안간 숨을 멈췄다.
아니, 내가 왜 이 자식을 걱정하고 있는 거야?
엔지는 요즘 들어 무엇 하나 제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 삶이 무척이나 피곤하고 귀찮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사람 마음을 다 읽어가며 살아야 한다는 건 이런 고충이 늘 따랐다.
예전 같았으면 어떤 식으로든 수단으로 이용할 생각부터 했을 텐데, 엔지는 언젠가부터 자신이 많이 달라졌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곧 마주 선 칸과 미카의 사이를 굳이 파고들며 둘 사이를 떨어트려 놓고는 어정쩡한 위치에 선 채 칸을 향해 말했다.
“됐고. 넌 할 말 다 했으면 좀 가지?”
“벌써? 아니야, 칸. 더 있다가 가.”
칸이 대답하기도 전에 미카가 불쑥 튀어나와 칸을 붙잡자 엔지는 곧바로 심기가 뒤틀렸다.
“네가 아니라 칸한테 한 말이거든?”
“나한테 온 병문안이야. 왜 네가 결정해?”
또 시작이다. 엔지는 분명 이성적이고 냉정할 때가 많아 보였는데 이상하게 미카와 있을 때면 지나칠 정도로 유치해지곤 했다. 칸은 그 점이 엔지의 가장 이상한 부분이라 생각했다.
“미카, 오늘은 이만 갈게. 할머니도 주무시니까.”
“아쉬워. 방금 식사하고 잠드셨어. 투약받은 약이 졸립게 한다더라고.”
“다음에 또 올게.”
“칸.”
미카가 돌아서는 칸을 불러세우자, 그가 말없이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조심해.”
잠시 그 눈을 보며 멈칫한 미카가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너도.”
멀어지는 칸이 벽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미카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엔지는 그런 미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애틋해서 못 봐주겠네.”
반쯤은 신경질이 담긴 그의 말에 미카가 그제야 엔지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여긴 어쩐 일이야?”
“나도 병문안이다. 왜, 불만 있어?”
“불만은 네가 있어 보이는데.”
미카가 칸을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온도로 퉁명스럽게 굴며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엔지가 그 뒤를 곧바로 따라 들어갔다.
미카는 해가 들어오는 창에 커튼을 치고 잠든 할머니의 이부자리를 다시 정돈했다. 그 일련의 행동들을 엔지는 말없이 조용히 지켜봤다.
“할 말 있으면 해.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병문안이라니까.”
무덤덤한 엔지의 답에 그제야 미카가 그의 앞에 마주 섰다. 며칠 만에 보는 미카의 얼굴은 할머니를 돌보느라 고생해서인지 조금 핼쑥해져 있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진한 그 향기조차 조금은 죽어 있었다.
문득 엔지는 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더니, 이내 미카의 손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