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그레이빌의 보름달 (2)
(27/40)
27. 그레이빌의 보름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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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그레이빌의 보름달 (2)
2023.06.01.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기리의 달리기는 빛보다 빨랐다.
단단한 콘크리트 벽을 뚫고, 공장 벽을 타고 이곳저곳 뛰어오르는 모습은 마치 거친 털을 가진 럭비공 같았고, 강인하게 선 곧은 등과 다리는 한 번 닿은 것들을 모조리 파괴하는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기리가 움직일 때마다 매캐한 공장의 공기는 바람을 몰고 와 거센 흙먼지를 일으켰다.
그렇다. 그는 지금 그저 몸을 풀고 있을 뿐이다.
-자, 그럼 지금부터 대열을 맞춰보자.
기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먹잇감을 찾아 라일락 숲에서 빠져나온 너구리 한 마리가 들어왔다. 동시에 나자크는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엄청난 속도로 재빠르게 너구리를 낚아채 발톱으로 찢고 이빨로 물어뜯었다.
새벽 호수처럼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던 나자크의 회색 눈동자가 불에 타들어 가듯 일렁였다.
-살살해, 살살. 사냥 나온 것도 아닌데.
엔지가 혀를 차며 나자크를 향해 말했다.
나자크는 살짝만 움직여도 그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완력과 파괴력으로 공장 내부가 들썩일 정도였다. 엔지는 정말이지 무식할 정도의 능력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나자크 형. 움직일 때마다 나까지 움찔한다니까. 어떻게 하면 형처럼 빨라질 수 있어?
타헬이 코끝을 킁킁거리며 나자크의 옆에 찰싹 달라붙으며 애교를 피웠다.
지금으로선 큰 먹잇감을 잡는 것보다, 힘이나 속도를 통제해야 하는 작은 짐승을 잡는 게 더 어려운 타헬이었다.
-완력 조절이 좀 더 능숙해지면 작든 크든 똑같이 사냥할 수 있을 거야.
나자크는 언제나 그렇듯 타헬을 부드럽게 격려했다.
-그나저나 우리끼리 이렇게 나와 있어도 되는 거야? 칸 형을 혼자 둬도 되는 건지…….
타헬이 문득 칸의 얼굴을 떠올렸다. 얼마 전 라온 상점 앞에서 벌어진 일은 그에게도 적잖이 충격인 듯했다.
-못 나올 건 또 뭐야. 어차피 지금은 우리가 무슨 소릴 해도 그 녀석 귀엔 안 들려.
엔지가 차갑게 말했다.
그날 형제들이 받았던 의문과 충격만큼이나, 제 힘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한 칸은 꼭 칩거라도 하듯 제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형 생각은 어때?
엔지의 물음에 기리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험하게 썼던 제 몸의 먼지를 단번에 털어내곤 형제들 앞으로 사뿐히 걸어와 멈췄다.
-글쎄. 칸이 분명 다른 인간들과 다르단 건 알겠지만…….
-여전히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적어도 뱀파이어는 아니야.
기리는 그 부분에 대해서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는 듯 명확하게 답을 내렸다.
-애초에 뱀파이어였으면 가까이 가지도 못했을 거야. 그 역겨운 냄새를 어떻게 한집에서 계속 맡고 살겠어.
엔지가 기리에 이어 뒷말을 보탰다.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은 서로에게서 풍기는 냄새가 이질적이고 불쾌할 정도로 다르기 때문에, 칸이 피를 탐하는 야만의 존재였다면 그들은 진작 알아차리고 애초에 갈가리 찢어놓았을 것이다.
잠시 그런 잔인한 상상에 사로잡히는 때였다.
순식간에 도약해 몸을 띄운 기리가 허공을 가르고 엔지의 등 위로 잡아먹을 듯 달려들더니, 이내 그 갈비뼈 언저리에 송곳니를 반쯤 밀어 넣었다.
크르릉-!
동시에 엔지가 두 앞발을 들어 올려 기리의 얼굴을 쳐내자, 그 움직임을 유연하게 피해낸 기리가 이번엔 꼬리 쪽을 향해 빠르게 접근하더니 발톱을 세워 엔지의 몸을 겹쳐 안고 공장 구석으로 내리굴렀다.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 부서진 썩은 나무 틈새로 엔지가 정신이 번쩍 든 표정으로 기리를 향해 으르렁댔다.
-윽! 뭐야, 갑자기!
-겨우 이런 일에 놀라서야 되겠어, 엔지?
-형!
-이 정도 움직임은 예상했어야지. 친절하게도 목을 물어뜯진 않았잖아?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기리의 공격에 엔지는 혼이 쏙 빠진 듯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금 제 힘의 절반도 쏟아내지 않은 실력으로 엔지를 가볍게 제압하고 있었다.
-나자크. 그렇게 멍하게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이번엔 기리가 나자크를 향해 가속을 붙여 달려나갔다. 거대한 늑대가 뛰어놀기엔 좁은 공간에서 순식간에 스피드를 올리는 건 기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넋 놓고 상황을 관망하다가 덩달아 준비도 없이 기리를 상대하게 생긴 나자크는, 기리에 비할 만큼의 큰 몸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단번에 뒤집히며 한쪽 구석으로 세 바퀴를 내리굴렀다.
저만큼이나 처참히 처박힌 모습을 보며 엔지가 웃음을 터뜨리자 나자크가 갈기의 먼지를 털어내며 답지 않게 까칠한 투로 말했다.
-재밌냐?
-세상에서 제일.
엔지는 진심이었다. 정말이지 무뚝뚝한 나자크가 기리의 앞발에 얻어맞아 구르는 걸 보는 것만큼 재밌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자크는 몸을 바로 세우고 기리에게 공격 태세를 취하려는데, 그 옆으로 함께 준비하듯 타헬이 나란히 서자 기리가 동물적 본능만 살아남은 날카로운 제 송곳니를 혀로 핥았다.
-뭐야. 치사하게 2대 1이야?
-말없이 공격한 형이 더 치사해!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던 게 억울했는지 타헬이 울컥해 대답했다.
-이런. 외롭다, 외로워. 업어 키워놨더니 다 소용없구만.
어쩐지 타헬 앞에만 서면 마음이 약해지고 마는 기리가, 앞으로 튀어나온 칼날 같은 제 발톱을 살갗 안으로 조용히 숨겨 넣었다.
-좋아. 몸은 이만하면 다 풀었고. 대열은 우리 루가루의 전통대로 몸집에 따라 나눠야겠지.
루가루는 대대로 몸집이 작은 동료를 뒤로 물려놓는 규칙을 지녔다. 협동과 신뢰를 가장 큰 원칙으로 삼는 그들에게선 늘 그렇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언제나 무리 생활을 했고, 전략을 짜서 움직이는 건 늑대들의 습성이자 관습이기도 했다.
-그래. 전통대로.
나자크가 동조하자, 높은 창틀에 매달려 있던 엔지가 그대로 허공에서 뚝 떨어져 나타났다.
-참 전통 좋아해, 다들?
-뭐가 또 불만이야, 엔지.
-뱀파이어 놈들이 그걸 모를 것 같아? 수천 년을 이어온 우리 방식을? 타헬이 우리의 약점이라고 대놓고 광고하는 멍청한 방법일 뿐이야.
엔지의 말에 타헬의 몸이 움찔했다.
어쩌면 자신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일지 모른다는 생각. 어린 저 아이가 무슨 장면을 떠올리고 있을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나자크가, 곧바로 거대한 몸을 움직여 타헬의 앞을 막아섰다.
-엔지. 말조심해.
나자크가 으르렁거림을 삼켜내며 낮게 중얼거렸다.
-감싸고 도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야, 나자크. 그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엔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자크는 더 화가 난 걸지도 몰랐다. 지키겠노라 맹세했으면서 정작 자신이 타헬을 위험에 빠뜨리는 선택을 계속해 온 것이라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엇도 선택하지 못한 채 침묵이 이어지자, 먼저 소리 내 짖은 건 타헬이었다.
-나도 할 수 있어! 형들이 지켜주지 않아도, 나 혼자서 날 지킬 수 있다고!
-타헬, 지금 그 문제가 아니라…….
다급히 나자크가 몸을 돌려 타헬을 마주 보려는 순간, 그가 뒷발을 슬금 뒤로 물려 그에게서 몇 걸음 멀어졌다. 거리가 멀어진 만큼 마음 또한 멀어진 듯했다.
-난 형들이 지켜줘야 하는 약자가 아니라고!
-타헬, 넌 잠재력이 뛰어난 늑대인간이야. 다만, 아직 성장기라 여러모로 네 능력치를 완벽하게 끌어올리는 게 현재로선 어려워. 지금 몸짓도 나자크의 절반 정도니까.
기리는 제 동생이 더 어긋나지 않게 최대한 이성과 논리로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감정은 더 소용돌이가 되어 형제들에게로 거침없이 휘몰아쳤다.
-그럼 언제까지 난 뒤에 숨어 있어야 해? 마냥 몸이 자라기만을 기다릴 순 없잖아. 또 이렇게 가만히 보호만 받다가 또 형제들을 잃으라고? 예전에 내가 가족들을 잃었던 것처럼……?
-타헬!
나자크가 더는 참지 못하고 타헬을 멈춰 세웠다.
-이렇게 날 감싸고 도는 건 나한테 아무 도움도 안 돼. 그게 형들이라고 해도.
타헬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꼭 가출이라도 할 것처럼 공장 출구 쪽으로 빠르게 뛰어나가는 그를 막은 건 다름 아닌 먼저 문제를 제기했던 엔지였다.
-비켜!
-어쭈. 이게 어디서 어쭙잖게 반항이야.
엔지가 몸통으로 타헬의 허리께를 툭 쳐서 중심을 무너뜨리며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엔지는 타헬이 다치지 않을 정도로 제 힘으로 조금씩 밀어냈고, 그럴수록 겨우 버티고 섰던 타헬의 날카로운 발톱이 공장 바닥에 갈리며 속절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럼 어째. 지금이라도 한 판 붙어 봐? 네가 진짜 네 몸을 지킬 만큼 강한지?
-엔지, 너까지 왜 이래.
말리지는 못할망정 더 부추기기만 하는 엔지를 보며 나자크가 답답한지 대화에 끼어들었다.
-말 안 듣는 꼬맹이는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지. 언제든 상관없어. 맘대로 덤벼, 타헬. 너 정도면 앞발 하나로도 식은 죽 먹기니까.
타헬은 부들거리는 송곳니를 감추며 뒷발에 힘을 실었다.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아직 누군가를 지킬 힘도, 스스로를 보호할 힘도 없다는 것을. 그걸 알기에 답이 나온 도발에 바보처럼 쉽게 달려들지 않는 것이었다. 타헬은 그 정도의 상황을 분간할 만한 지혜는 가진 녀석이었다.
타헬이 흥분하지 않고 최대한 감정을 누른 채 견뎌내자 엔지가 어딘지 기특하단 눈빛을 잠시 내비쳤지만, 이내 능숙하게 그 눈을 숨겨냈다. 그것은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으므로.
-좋아. 일단은 머리가 돌아가긴 하네.
엔지가 웃으며 타헬을 향해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
(#기울임)-형은 정말이지 재수가 없어.
(#기울임)-그런 말 자주 들어. 알다시피.
잠깐의 기 싸움을 그렇게 웃음으로 넘겨버리는 그때였다.
순간 극도로 오감이 예민해진 엔지가, 자신의 가장 주특기인 후각에 무언가 낯선 냄새가 스치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르릉.
엔지가 본능적으로 이빨을 드러내며 문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곧바로 알아챈 기리가 다가와 그의 곤두선 목덜미에 제 코를 비비적거렸다.
-무슨 일이야, 엔지.
엔지는 대답하지 않고 뾰족하게 귀를 세우고 형형한 눈을 번뜩였다.
바스락-
폐공장 밖. 어둠에 가려진 수풀 속에서 거대한 몸체가 더 진한 그림자가 되어 간헐적으로 일렁였다.
그것은 분명 사람이 아닌 짐승의 형태였고, 암흑 속에서 반짝이는 눈동자는 흥분과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한동안 그림처럼 멈춰 있던 엔지가 아주 빠른 속도로 그 냄새를 쫓아 밖으로 돌진했다.
동시에 형제들이 그의 뒤를 쫓아 암흑밖에 없는 허허벌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스산하게 부는 바람 틈으로 흔들리는 것은 라일락 숲 초입에 무성히 핀 잡초들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엔지만큼이나 곤두선 나자크가 여전히 몸을 낮추고 주변을 경계하며 그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냄새…….
-뭐?
낮게 중얼대는 엔지의 말을 나자크가 다시 확인했다.
엔지는 무언가 혼란한 듯 제 후각에 집중했다.
-섞였어. 인간 하나, 그리고…….
엔지가 잠시 말을 망설였다.
-늑대인간 냄새이긴 한데, 뭔가가 달랐어.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