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 그레이빌의 보름달 (1) (26/40)


26. 그레이빌의 보름달 (1)
2023.05.25.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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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록 실종 일주일 전

보름달이 뜨는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둠에 느리게 삼켜지는 구름의 모서리는 엇나간 목조 창틀에 절묘하게 가려지고 있었다.

기리는 자신의 혈류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음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고요하게 박동하던 심장이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기리는 언제나 그렇듯 매달 찾아오는 이 시간을 의연하게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 보름에는 동생 녀석들에게 합동 전투를 가르칠 생각이었다.

힘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타헬이 아직 걱정스럽긴 했지만, 최근 도시의 여러 가지 변동이나 수상한 움직임들만 보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적어도 형제들은 뱀파이어로부터 스스로의 목숨을 지킬 수 있어야 했고, 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기리가 모자를 눌러쓰고 그레이 여관을 나서며 어제 나눴던 요한나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전에도 말했듯이 우린 그 아이가 어릴 때부터 길러왔어요. 처음 만났을 땐…….”

요한나는 목이 막힌 듯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처음 칸을 만났을 때의 그 처절함과 잔혹함이란, 수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요한나의 머릿속에 아물지 않은 상흔처럼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칸의 과거 속에서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처음 만났을 때라면…….”

“칸은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에요. 아주 작고, 위험한, 외딴 동네에서 우리가 구해낸 아이였죠.”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칸이 지나치게 부모님 일에 반응하거나, 부부의 체격과 생김새를 봤을 때 작은 부분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레이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괴상한 소문을 퍼뜨리거나, 그들 가족을 일부러 소외시키는 것이 분명했다.

“그 아인 모든 게 엉망이었어요. 몸도, 마음도, 어느 한 군데도 성한 데가 없었죠. 그래요, 어쩌면 우린 서로 첫인상이 꽤 좋지 않았을 거예요. 칸, 내 아들에겐 여러모로 더 괴로운 기억이었을 테니까.”

칸의 존재에 처음으로 의문을 품은 건 그에게서 순간적으로 자신들과 비슷하지만, 어딘가 더 향기로운 듯한 냄새를 맡았을 때였다. 그것이 기우임을 알았을 땐 안도했으나, 또 다른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언제고 기리를 곤두서게 만들었다.

“칸에게서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까. 그러니까…… 뭔가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제 동생들과도 가까운 사이고, 요즘은 이런저런 힘든 일이 많았으니까요. 걱정이 돼서요.”

기리는 말을 고르고 골랐다.

가뜩이나 칸의 일에 관해서 과도하게 신경이 쏠린 터라 요한나는 하루가 다르게 얼굴이 핼쑥해지고 있었다. 자신이 무언가 의심하고 있다는 낌새만 보여도 그녀의 신경은 더욱 곤두설 것이다.

허허실실 웃는 듯해도 칸에 관해서라면 말을 아끼는 시몬과 달리, 요한나는 강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기에 기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한마디라도 시종일관 신중함을 유지했다.

“특이한 건 없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그 아일 길러왔고, 누구보다 잘 알아요. 그냥 남들보다 빨리 크고 머리 색이 다를 뿐이죠. 칸 그 아인, 나쁜 짓을 할 애가 아니에요. 절대로.”

“알아요, 저도. 칸은 절대 그럴 애가 아니죠.”

기리는 진심으로 납득했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음은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나쁘고 악한 사람이라 정의 내릴 수 있는 일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요한나는 기리의 동조에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에 간절함을 담았다. 자신의 아들이 결코 ‘문제’를 가지지 않았음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기세였다.

“혹시…….”

“…….”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분명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보름달이 뜨던 밤에 칸이 사라지진 않았나요? 지난달에, 제가 칸이 밖으로 나가는 인기척을 들은 것 같아서요.”

기리가 망설이면서도 조심스럽게 덫을 놓았다.

요한나는 기리의 말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것 같았으나, 질문 그 자체의 답에 집중하는 듯 생각을 떠올리는 듯했다.

“아니요. 한 번도요.”

요한나의 대답엔 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모르는 일 따위 칸에게 벌어지지 않을 것이란 듯.

기리는 짧은 회상을 갈무리하며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서둘러야 하는 밤이다.

* *

크록은 먹었던 음식을 모두 게워냈다. 질리언을 만나고 돌아온 후부터 계속된 증상이었다.

“질리언…… 질리언이 필요해.”

크록은 토해낸 위액이 자신의 혓바닥을 녹이는 줄도 모른 채 공허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질리언을 만난 후부터 어딘가 중간 과정이 생략되어 파편적으로 흩어진 기억들이 있음이 분명했지만 크록은 도무지 생각나질 않았다.

무질서한 머릿속을 정리할 방법 같은 건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고, 그저 갈증이 생기듯 목이 타고, 이유도 정체도 알 수 없는 갈망이 그를 덮쳐오고 있었다.

기포가 생긴 것처럼 온몸이 가려워지자 크록은 제 살에 피가 나도록 손톱을 세워 몸을 긁기 시작했다. 하루빨리 모든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이 모든 고통이 끝날 것이다. 크록은 전혀 호응 되지 않는 인과관계를 머릿속에 끊임없이 주입했다.

“도련님, 접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크록은 비스듬히 욕실 문을 열고 그 틈 사이로 제 부하의 얼굴을 확인했다. 외부인을 보듯 잔뜩 경계를 세웠지만 눈빛은 여전히 흐릿했다.

“그래. 내가 시킨 건 알아봤어?”

크록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건 비단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예, 도련님. 말씀대로 라일락 숲 근처에 오래된 폐공장이 하나 있습니다. 거길 자주 드나든다고 합니다.”

그레이빌로 이사 온 ‘그’ 형제들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건 오래전부터 깨닫고 있었지만, 그 정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한 나날들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숨기고 있는 비밀이 지금의 제 상황을 타개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크록의 눈은 마지막 희망으로 번뜩였다.

“그렇단 말이지…… 분명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거야.”

“계속 따라붙을까요.”

“아니. 내가 직접 해.”

크록이 까득 제 손톱을 물어뜯어 삼켰다. 손톱 아래에 낀 채 굳어버린 피에선 어쩐지 평소와는 다르게 달콤한 맛이 났다.

“그 녀석들 지금 어딨어?”

* *

검은 하늘 위로 하얀 보름달의 표면이 점차 선명해졌다.

만월이 하늘을 삼킬 즈음이면 어린 형제들은 자신의 변화를 컨트롤하는 게 아주 어려워졌다. 그것이 오늘 기리가 먼저 핑계를 대고 형제들을 먼저 여관 밖으로 내보낸 이유다.

아우-

아우-

멀지 않은 곳에서 희미한 하울링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리는 자신의 근육이 뒤틀리기 시작함을 느꼈다.

깨질 듯한 하얀 보름달이 기어코 밤의 한가운데에 섰다.

폐공장 주변으로 산발적으로 흩어졌던 소리들이 돌림노래처럼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곧이어 하나로 합쳐진 소리가 점차 더 선명해졌다.

하울링 소리가 커질수록 기리는 제 몸에 빠르게 돋아나기 시작하는 늑대의 털을 확인했다.

“이런. 서둘러야겠군.”

형제들보다 좀 더 여유 있게 늑대로 변할 수 있을 정도로 기리는 제어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집단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보름달이 뜨는 밤의 하울링은 결코 늑대인간으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순리였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고대신 바르그의 축복을 받아 탄생한 늑대인간 종족인 ‘라이칸스로프’는 보름달에 쉽게 조종당하는 일반적인 ‘루가루’와 달리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형제들 중 그 피와 살을 계승 받은 자는 없었다.

게다가 라이칸스로프는 극소수의 종족으로 지금은 거의 잊힌 혈통이 되어버렸고, 그 시조를 계승 받은 자를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았기에 기리는 그저 사라져버린 자들이라 여길 뿐이었다.

타닥-!

기리의 걸음이 점차 빨라지더니, 이내 주변 바윗돌을 도움닫기 삼아 밟고 그대로 허공에 날아올랐다. 그 찰나에 기리의 몸이 늑대로 변하더니, 길고 깊은 발톱이 흙을 파내며 그 자리에 착지했다.

형형한 눈빛을 하고 폐공장 안으로 들어간 기리는 형제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기리 형!

꼭 거대한 시베리안 허스키를 닮은 타헬은 웜톤의 군청색을 띠는 어린 늑대의 모습을 한 채 기리의 앞에 폴짝 뛰어 다가섰다. 반가움의 표시로 기리는 입을 크게 벌려 타헬의 얼굴 한쪽을 장난스럽게 깨물었다. 그건 늑대 특유의 친근감을 표하는 방식이었다.

-다들 불편한 곳은 없어?

기리가 인간일 때와는 사뭇 다른 형형한 검은 눈동자로 형제들의 모습을 살피며 말했다.

각자의 안구는 저마다 다른 색을 띠며 빛나고 있었고, 출렁이는 털이 자라나며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살을 꿰뚫고 나와 있었다.

-오랜만에 힘이 솟는 기분이야.

엔지가 천장 철골로 단번에 도약하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에메랄드 녹색 눈동자를 가진 엔지는 그 색만큼이나 우아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을 가진 늑대였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성격은 정반대였지만 말이다.

-나자크, 넌?

기리가 앞발을 틀어 얌전히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나자크를 향해 물었다.

단연 형제들 중 가장 큰 몸집을 가진 나자크는 어깨 높이가 70cm 가량은 돼 보였다. 딱딱하지만 진솔한 성품만큼이나 따듯한 베이지색의 털에, 오묘한 회색빛을 띤 눈동자는 그 자체로 믿음직스럽고 단단해 보였다.

-나도 마찬가지야. 이런 해방감은 여기 와서 처음이니까.

-해방감을 느끼는 것 치곤 너무 얌전한데?

기리가 웃으며 나자크를 놀렸다.

-늑대일 때나 인간일 때나 샌님인 거지.

엔지가 뒷말을 보태며 장난을 치자, 나자크가 앞발로 흙먼지를 일으켜 엔지에게로 날렸다.

-켁! 속 좁게 굴긴.

-내가 할 말이야, 엔지.

-그럼 우리 이제 뭐 해? 나 막 뛰어다녀도 돼?

나자크와 엔지가 신경전을 벌이는 틈새로 타헬이 불쑥 끼어들었다. 둘이야 어떻든 말든 타헬은 오랜만의 자유에 잔뜩 기대가 찬 표정이었다.

-오늘은 좀 색다른 걸 해볼까 해.

-색다른 거? 뭐?

기리의 대답에 타헬이 신이 난 목소리로 곧바로 되물었다.

-합동 전투 연습.

예상 못 한 발언에 형제들이 일순 침묵했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저 철근이나 구기고, 숲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힘을 마구 쓰게 할 줄 알았더니 별안간 전투라니.

-갑자기?

나자크가 기리의 결정에 의문을 표했다.

처음부터 이 도시엔 얌전히 숨어들 작정으로 정착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에 와서야 인간들의 눈을 속여가며 전투를 연습하겠다니.

-역시. 뱀파이어들 때문이지?

역시나 엔지는 모른 척 지나치는 법이 없다.

-그래. 우린 살아남아서 서로를 지켜야 하니까.

기리는 굳이 부정하지 않고 한쪽 벽을 타고 올라가 자리를 잡고 앉으며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언제고 대비해야 할 일이었고, 지금도 한참은 늦었을지 모른다. 어떻게든 동생들을 제 등 뒤에 숨겨둔 채 보호해주고 싶었지만, 심상치 않게 흘러가는 모든 상황에 일일이 대응하기 위해선 개개인의 능력치 향상이 반드시 중요했다.

어떻게든 살려야 했고, 살아남아야 했다.

-이제부턴 우리도 싸울 거야.

기리의 말에 형제들이 깨진 창가 너머로 커다랗게 떠 있는 보름달을 주시했다.

밤이 긴 것을 선호하는 뱀파이어들에게, 이 밤이 결코 너희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달콤한 시간이 아님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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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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