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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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폭주
2023.05.11.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요한나는 칸을 기다리며 그가 어릴 적부터 꽤 좋아했던 과자를 구웠다. 어떤 것은 산딸기를 올리고, 어떤 것엔 블루베리를 올려 꿀을 덧발랐다.
“흐음. 달콤한 냄새가 나는데, 여보?”
시몬은 2층 서재에서 내려오며 요한나의 늘어가는 베이킹 솜씨를 칭찬했다.
“오늘 저녁엔 칸이 좋아하는 걸로 차려볼까 봐요.”
“이런. 역시 난 또 밀려나는구만 그래. 하하.”
“당신도 참. 요즘 칸이 입맛이 없는지 도통 먹질 못하잖아요.”
요한나는 최근 들어 음식량이 극도로 줄어든 칸을 걱정하는 중이었다.
185cm의 키에 그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려면 하루에 몇 끼니를 먹어도 모자란데 칸은 반대로 식사가 뜸해지고 있었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지만, 몰래 남는 음식들을 버리는 칸을 보며 요한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우리한텐 좀처럼 속마음을 털어놓질 않잖아요. 혼자 고민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요한나는 늘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칸은 언제나 자신들을 위해 아주 작은 어려움조차 꺼내지 않는 속 깊은 아들이었고, 누구보다 이 가족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선하고 착한 자식이었다.
어떤 순간에는 못나고, 모자라고, 생떼도 썼다가, 짜증도 냈다가, 여느 아이들처럼 그렇게 평범하게 크길 바랐건만 애초에 그들의 만남 자체가 평범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자신들을 따라오기로 한 것이 칸의 결정이라고 늘 생각하면서도, 그 아이의 마음에 섣부른 부담을 떠안긴 건 아닌지 항상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우리 아들을 믿읍시다. 우리가 안 믿으면 누가 믿겠어요.”
시몬이 요한나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따듯하게 위로했다.
요한나는 어쩐지 뜨끈해지는 제 마음을 제쳐두고 구운 과자를 꺼내 식힘 망에 올렸다. 진한 버터 향기가 여관 안을 꽉 채울 무렵 인기척이 들려왔다.
“다녀왔습니다.”
한 손엔 잔뜩 먹을 음식들을 가득 든 채 기리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자신의 상태와 상관없이 누구의 앞에서든 씩씩하고 의연했다.
“왔어요? 뭘 또 이렇게 많이 사 들고 왔어.”
요한나가 식탁 위에 올려둔 음식들을 열어보며 놀란 듯 기리를 향해 말했다.
형제들이 맛을 잘 모르고 그저 주는 대로 먹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요한나는, 늘 필요 이상의 음식들을 정성껏 해내곤 했고 그런 모습이 기리에겐 못내 미안함으로 남아 있었다.
“여기 입이 몇 갠데요. 한창 클 때라 애들도 많이 먹잖아요. 여관비로는 터무니없죠.”
“아이구, 참. 미안하게 또 그런다.”
“미안해 마시라니까요. 덕분에 녀석들도 건강하죠, 뭐.”
기리가 넉살 좋게 웃어 보이자 그제야 요한나도 마음 편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자네, 이제 내 자리까지 뺏으려고?”
“하하. 제가 눈치가 좀 없었죠?”
불쑥 시몬이 튀어나와 부엌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막자 기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봐도 사랑이 참 많은 인간 부부였다. 그들 밑에서 자란 아들이 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저…… 칸, 말입니다.”
“칸이 왜?”
시몬이 요한나의 옆에서 분주하게 야채를 다듬으며 가볍게 되물었다.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야 기리는 진짜 하려던 말을 삼켜냈다.
“아, 아니에요. 요즘 제 동생들하고 잘 지내고 있나 해서요.”
기리는 그 모든 의문과 질문으로부터 아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 *
거리에 흩어진 라온 상점의 물건들이 말라비틀어진 해초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떤 것은 깨지고, 어떤 것은 형체를 잃고 나뒹굴었다.
그 물건 하나하나 모두 할머니가 매일 쓸고 닦았던 것이었다. 어떤 것은 팔리지 않아도, 사람들의 눈을 끌지 않아도 그녀에겐 하나같이 다 소중한 물건들이었다.
“남의 집에서 빌어먹는 쥐새끼 같은 것들. 나는 너희들처럼 버러지 같은 것들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그러면서 있는 자들한테 온갖 원망이란 원망은 다 쏟아내지. 자기들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
크록의 말에 엔지가 더러운 걸 들었다는 듯 제 귀를 툭 쳐냈다.
“저 새끼가 뚫린 입이라도 말 같지도 않은 걸 말이라고 뱉네.”
안 그래도 겨우 벽을 짚고 서 있는 미카가 신경 쓰여 미치겠는데, 별안간 저놈까지 미쳐 날뛰고 있으니 엔지마저도 자신의 기분을 정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미카, 좋겠는걸? 널 구하려고 백마 탄 왕자들이 등장했잖아. 이걸 부러워해야 해, 말아야 해? 응?”
벽을 기대고 힘겹게 서 있던 미카가 꾹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바람 빠진 소리로 웃음을 훅 내뱉었다. 극도로 유지되었던 긴장이 단번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러게. 이게 무슨 복인가 싶네, 나도?”
“미카 누나……?”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것 타헬뿐만이 아니었다. 순순한 긍정과 독기가 빠진 말투는 평소에 알던 미카의 것이 아니었다.
미카는 꿋꿋이 허리를 세우고 칸이 막아서고 있는 크록에게로 가까이 걸어갔다.
그녀가 크록에게 가까워질수록 형제들은 모두 긴장했으나 누구도 그녀가 가는 길을 억지로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칸은 만약을 대비해 어느 정도 거리가 닿지 않게끔 두 사람 사이에 제 발을 밀어 넣었다.
“그런데 그거 알아? 백마 탄 왕자가 공주 구하러 올 땐 수많은 엑스트라의 목이 날아가지. 고작 공주 한 명 구하겠다고 말이야. 미안해, 크록. 너도 결국 그저 그런 엑스트라 중의 하나일 뿐이거든.”
자신의 쓸모와 필요를 가장 중요하고 예민하게 생각하는 크록에게는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다. 순간 흥분한 크록이 다른 한 손을 뻗어 미카의 멱살을 움켜쥐려는 때였다.
“윽, 크헉!”
한 손으로 가볍게 크록을 목을 틀어쥔 칸이 그를 잡아 올려 벽에 그대로 처박았다. 그것은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빨랐으며, 그 움직임 때문에 찰나에 태풍처럼 강한 바람이 일었다.
정말이지 눈을 깜빡했을 뿐인데 크록은 벽에 걸린 유화 그림처럼 보기 좋게 걸린 채, 두 발을 허공에서 파닥이며 숨이 막혀 버둥거리고 있었다.
“지, 지금 저거 뭐야. 칸 형이야?”
타헬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미카는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할 말을 잃은 듯 뻣뻣하게 굳은 채로 처음 보는 칸의 모습을 마주하고 있었다.
자신이 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아니, 무엇을 보긴 한 건가? 어떤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어 미카는 그저 가만 서 있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인간이라면 결코 낼 수 없는 스피드와 힘이었다. 인간의 눈으로라면 착각이라도(@고) 믿고 넘겨버릴 정도로 찰나였으나, 늑대인간인 형제들의 눈엔 아니었다.
칸이 반쯤 정신을 잃고 크록의 목을 잡은 제 손에 힘을 더 가하려는 그때였다.
“칸! 정신 차려! 뻔한 도발에 넘어갈 생각이야?”
나자크가 칸의 손을 잡아 그대로 바깥으로 당겼다. 자신의 완력으로도 벅찰 정도의 엄청난 힘이었다. 그것은 도무지 인간의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의 힘이었다.
앞서 온갖 모욕적인 말들이 오갔으나 나자크는 이성을 유지했다. 지금 당장은 칸을 진정시키는 게 훨씬 더 중요했다.
“누군 뭐 이딴 새끼 하나 처리 못 해서 가만 참고 있는 줄 알아?”
입술을 짓이기며 나자크가 차갑게 칸에게 일갈했다.
속은 타들어 가고, 인간 하나의 목쯤이야 부러뜨리는 건 들꽃의 목을 꺾는 것만큼이나 간단했으나 지난번 그 밤처럼 무리하면 안 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쓸데없는 잡음이 너무나 많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섣불리 나서서 정체를 들킨다면 그것만큼이나 골치 아픈 일도 없었다. 언제까지 이 도시에 머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기리에게 책임의 무게를 떠안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쿨럭! 컥……! 하하, 하. 아쉽네, 아쉬워. 그냥 내버려 두지 그랬어.”
나자크 덕에 칸의 손에서 풀려난 크록이 바닥에 고인 침을 뱉어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에겐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크록은 마치 자신을 미끼로 힘을 실험하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이 방법은 흔히 뱀파이어들이 인간을 이용해 늑대인간들을 포섭하거나 그 정체를 들키게 할 때 쓰는 아주 전형적인 방식 중에 하나였다.
-역겨운 뱀파이어 새끼들. 인간을 상대로 이런 더러운 수 쓰는 건 여전하네.
엔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열이 받는지 낮게 으르렁거렸다.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진 놈인진 모르겠지만, 뱀파이어가 크록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이것 이상으로 힘을 내보이는 건 이쪽에서 불리한 일이었다.
게다가 칸은 자신들의 정체를 모르고 있으니 더더욱 이 게임에선 불리하다. 여차하면 뱀파이어들로부터 공격 대상으로 특정 지어질 위험이 있었다. 이곳엔 주민들 외에도 미카가 있고, 잔뜩 흥분한 칸이 있고, 힘을 조절하지 못하는 타헬이 있다.
머리를 써야 한다, 머리를.
엔지는 최대한 자신의 머리를 차갑게 식히는 중이었다.
“네 양부모 말이야. 나이가 좀 지긋했지, 아마? 매일 병원 들락거린다던데 오늘 내일 하나?”
요한나와 시몬은 오갈 데 없는 칸을 거둬 키워주고, 그 모든 모욕과 괴롭힘 속에서도 유일하게 자신을 믿어준 양부모였다.
어쩔 수 없이 오랫동안 살던 동네들 떠나 지난 세월 떠돌이처럼 이주해 다닌 것은 모두 칸을 위해서였다. 그레이빌에 정착해 동네 유력 사업가인 크록의 아버지, 팔로하이드의 돈을 빌려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로 자신의 양부모가 모욕을 받아야 한다면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어 또다시 자신이 버림받아 혼자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칸은 양부모님의 명예를 지켜내고 싶었다.
“하긴 칸, 뭐가 걱정이야. 어차피 네 친부모도 아닌데 상관없잖아? 죽든 말든.”
악마가 속삭인다.
폭주해. 폭주해버려, 칸. 그동안 억누르고 산 게 아깝지 않아? 너의 강한 힘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그 힘을 써.
그렇게 찰나에 고민했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냥 생각만.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칸!”
엔지가 소리쳤다.
그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칸은 자신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는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순식간에 터진 거대하고 강력한 힘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난 폭주였다.
더는 참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사람처럼 칸은 누구의 말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저 제게로 달려는 이들을 때리고, 부수고,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쏟아 크록의 주변을 망가뜨렸다.
무언가 엄청나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 나자크는 본능적으로 그 위험을 감지했다.
눈은 많았고, 더는 칸이 날뛰게 둘 수 없었다.
곧이어 나자크가 엔지와 타헬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기회는 한 번이야. 한 번에 누른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