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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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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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덫
2023.05.04.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칸에게 가로막힌 나자크가 상체를 곧게 세우더니 잠시 한 발을 뒤로 물렸다. 유보적인 행동과 달리 나자크의 매서운 눈은 여전히 칸의 손가락 움직임 하나까지 빠르게 좇고 있었다.
“난 괜찮으니까 앞으론 너희끼리 다녀도 좋아.”
칸은 담담한 어조로 나자크에게 말했다.
그 말씨 속에 서운함이라던가 배신감 따위의 감정은 섞여 있지 않았다. 어떤 부분에서 칸은 뒷말 없이 깔끔하고 단정한 사람이었다.
“그게 쉬웠으면 진작 그렇게 다녔어.”
나자크답지 않게 말에 감정이 실리자 엔지의 몸이 덩달아 긴장했다.
-왜 멍청한 짓거리야, 나자크.
엔지가 무언의 눈빛과 함께 나자크를 압박했다.
정말이지 때아닌 멍청한 짓이었다. 그냥 거짓으로라도 간단히 둘러대면 될 걸 나자크는 답지 않게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입에 풀이라도 붙였어? 어떤 식으로든 둘러대.
엔지의 계속된 채근에도 나자크는 쉽게 입을 떼지 않는다. 그러니 그 틈을 칸이 놓칠 리가 없었다.
“이러는 이유가 뭐야.”
칸은 기본적으로 날이 서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큰 키와 외모 때문에 눈에 띄기는 했으나, 최대한 몸을 숙이고 눈빛을 죽이고 그렇게 조용히 살아가려 애쓰는 사람에 가까웠다. 그런 성정을 가진 녀석의 목소리에선 칼날이 숨었다.
“묻잖아. 대답해. 날 감시라도 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형!”
순간적으로 억울해진 타헬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자, 엔지가 팔을 뻗어 타헬의 상체를 뒤로 밀어냈다.
“워워. 가만 안 있냐, 꼬맹이?”
스스로를 다스리기엔 육체도 힘도 마음도 타헬은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엔지는 그가 실수라도 할까 싶어 그를 뒤로 물리고는 복슬거리는 머리칼을 달래듯 몇 번 매만졌다.
타헬을 향해 있던 칸의 갈색 눈동자가 다시 나자크를 향했다.
“대답하기 싫어? 그럼 따라오지 마.”
처음부터 이상했음을 느꼈지만 그리 마음에 불편하게 담아두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 순순히 자신을 보내줬다면 이런 더러운 기분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민감한 태도, 어떤 식으로든 함께 움직이려는 부자연스러운 규칙. 그건 자꾸만 누르고 있던 칸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들었다.
“칸.”
“계속 따라올 거냐. 날 감시하는 게 맞다고 생각할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그건 네 사정이야, 나자크.”
칸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대체 무엇이 간단하지 않고 무엇이 복잡한 것일까.
일면식도 없는 가족이 별안간 여관으로 들이닥쳐 그저 사는 곳만 공유하면 그뿐일 거라 생각했었다. 이렇게나 가까워질 생각도 없었지만, 그 이후의 상황들은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나치게 자신을 의식했고, 이유 없이 존재를 의심했고, 지금처럼 제 곁을 서성였다.
“먼저 갈게. 간단해지면 언제든 말해.”
칸이 미련 없이 돌아섰다. 대답해주지 않는다면 그뿐이었다.
“저렇게 그냥 보내면 어떡해?”
칸이 시야에서 안 보이기 무섭게 엔지가 나자크를 몰아세웠다.
실종자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고, 오늘까지도 전화로 말했던 기리의 당부가 지금도 귓가에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뱀파이어한테 네 목이 물어 뜯길지 몰라서 같이 다닌다고 말해?”
나자크가 저도 답답했는지 까칠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답지 않게 계속 멍청하게 굴 거냐.”
나자크를 처음 만난 이후로 요즘만큼이나 얼빠진 모습을 보는 건 거의 최초나 다름없었다.
기본적으로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그는 어떤 식으로든 형제들에게 해를 끼치거나, 조금이라도 불편할 만한 일들을 아예 만들지 않는 쪽이었다. 그런데 이런 바보 같은 실수라니.
“형, 이제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우리가 괜히 늑대인간이냐.”
엔지가 피식 웃으며 잔뜩 걱정하는 타헬을 안심시켰다. 평소라면 그 또한 예민하게 대응했을 테지만, 나자크가 정신 못 차리는 이 시점에 자신까지 타헬을 불안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엔지는 점차 자신만큼이나 형제들의 안위가 중요해졌다.
“싫대도 따라가면 지가 어쩔 건데.”
엔지가 어깨를 으쓱하며 뻔뻔하게 말하자 나자크가 어쩌지 못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다 들키면?”
타헬이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들키면 들키는 거고. 속아줄 거야, 그 녀석.”
화가 난 건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은 칸이다.
자신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나자크는 굳이 말을 보태지 않았다.
* *
쾅-
쨍그랑-!
라온 상점 안의 물건들이 길바닥으로 모조리 쏟아졌다.
검은 모자를 눌러쓴 사내 몇이 별안간 나타나 상점의 물건들을 다 부수고 길바닥으로 내던진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저리 안 가! 안 가, 이놈들아!”
“이 노친네가 귀찮게 구네, 진짜.”
미카의 할머니는 다친 허리를 붙잡고 사내들에게 힘껏 달려들어 보지만, 툭 밀치는 수준에도 추풍낙엽처럼 바닥으로 주저앉아버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 그녀가 허망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며 땅을 마구 내리쳤다.
“할머니!”
미카가 쓰러진 제 할머니를 부축하며 소리쳤다.
“미카야. 아니, 이게 무슨 일이라니. 가게를 빼라니! 이게 대체 무슨……!”
할머니는 충격받은 듯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흐릿해지는 시야에 머리를 겨우 부여잡았다.
“미카 할머니!”
“사장님!”
같은 상점 건물을 쓰고 있는 직원들이 겁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 할머니가 뒤로 반쯤 기절하듯 넘어가고 나서야 우르르 그녀에게로 달려왔다.
“병원! 어서 병원으로……!”
그중 하나가 할머니를 등에 업자, 뒤이어 사람들이 그녀의 등 위에 담요를 덮어주고 난리통에 벗겨진 신발을 챙겨 들었다.
미카는 눈물이 번진 얼굴로 그저 지켜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여름에 몸이 얼음처럼 굳어버렸고, 흉측하게 변해버린 온 세상을 그저 멍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미카, 미카야!”
“어…… 어쩌죠. 어떡하면 좋죠, 전.”
잔뜩 젖은 미카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가게 안의 물건이 반쯤은 부서지고, 반쯤은 밖으로 버려지고 나서야 주변은 고요해졌다. 사람들은 누구 하나 쉽게 미카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이 광경을 차 안에서 느긋하게 지켜보던 크록이 그제야 뒷좌석에서 내려 천천히 미카에게로 가까이 걸어왔다. 그는 걸을 때마다 발밑에 치이는 깨진 전구, 손톱만 한 나사못, 얇은 철사를 번거롭단 표정으로 구둣발로 툭툭 치워냈다.
“뭐. 이제 대충 정리됐나?”
잔뜩 헝클어진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던 미카가 크록을 올려다봤다.
“거봐. 할 수 있나 없나, 내가 지켜보랬지?”
살짝 허리를 숙인 크록이 과거의 미카가 말했던 결심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대답 없이 잠시 바닥에 앉아 있는가 싶더니 이내 무릎을 짚고 꾸역꾸역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난 네 더러운 수에 놀아나지 않을 거야, 크록.”
미카가 입술을 꽉 깨물고 쓰러지지 않기 위해 두 다리에 힘을 꽉 줬다.
쯧. 크록이 들으란 듯 크게 혀를 찼다.
“이쯤 했으면 서로 할 만큼 한 거 아닌가? 미카, 네가 이기적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 수준인 줄은 몰랐어. 앞으로 길바닥에 나앉을 네 할머니는 걱정되지 않는 거야? 방금 저렇게 기절까지 하셨는데?”
“할머니도 이해하실 거야. 내게 항상 당당하게 살라고 하셨으니까. 근데 네 말을 들으면 난 그렇게 살 수가 없거든.”
빨갛게 충혈된 미카의 눈은 외려 더 반듯하게 섰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했다. 그저 크록에겐 파리 목숨이나 다를 바 없는 자신의 가족을 이렇게 망가뜨려서까지 그가 얻고 싶은 건 도대체 무엇일까.
“대체 칸이 뭐길래 이래. 칸이 대체 너한테 뭘 잘못했길래. 도대체 그 아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다고 이렇게까지……!”
“아아. 역시. 난 네가 필요해.”
“……뭐?”
미카는 크록의 시선이 자신의 뒤를 향해 있음을 알아차렸다. 곧이어 그의 입술이 미카의 귓가 가까이에 닿았다.
“거봐. 이렇게 또 나타났잖아.”
이어 크록의 손이 미카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순간이었다. 미카의 뒤에서 곧장 나타난 칸이 크록의 팔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그것은 힘이 들어갔다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는데, 크록은 이상하게도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칸.”
미카의 입에서 힘없이 그 이름이 떨어졌다.
한마디라도 더 했다간 참았던 눈물이 봇물처럼 터질 것 같아, 미카는 아릿해지는 목울대에 힘을 주고 또 주었다.
“그러니까 말하라고 했잖아, 미카.”
칸의 눈은 여전히 크록에게로 매섭게 고정되어 있었으나, 그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온화하고 부드럽기만 했다.
“미안…… 미안해, 칸.”
꼭 다 저 때문인 것만 같아 미카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질 않았다.
금방이라도 크록의 잡은 손목을 비틀 듯 칸은 사냥이 준비된 맹수처럼 굴고 있었으나, 지쳐 있는 미카를 향한 시선은 그저 다정하기만 했다.
크록은 굳이 반항도 없이 여전히 칸에게 잡힌 채로 더욱 여유를 부렸다.
“이참에 잘됐어. 한 번에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 쓰러져가는 여관 말이야…… 그거 없음 네 가족도 어떻게 되나?”
순간 칸의 손이 꿈틀하자, 크록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약간의 힘을 가했을 뿐인데 금방이라도 손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윽……! 우리 아빠가 넣은 투자금만 빼면 너도 거지 신세 아니야? 그 여관에 빌붙어 사는 쟤들처럼 말야.”
크록이 이어 턱 끝으로 칸의 뒤에 방패처럼 버티고 선 형제들을 가리켰다.
칸은 돌아보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들이 자신을 뒤따르고 있다는 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쫓아내고 쫓아내질 녀석들이 아님은 알고 있었던 터다.
지금 중요한 것은 형제들이 아니라 자신의 눈앞에 있는 크록이었다. 나의 사냥감은 너이지 뒤에 선 저들이 아니다. 칸은 그렇게 마음으로 결정하기라도 한 듯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크록을 주시했다.
어떻게 하면 이 악연을 끊어낼 수 있을까.
눈앞에서 내가 죽어 없어지면 네가 시원해하며 이 모든 것을 끝내줄까. 나만 사라지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걸까.
그렇다면 차라리 쉬워.
“죽기라도 작정한 모양이네? 나야 나쁘지 않지.”
나자크와 엔지의 눈은 동시에 흐트러진 미카를 향했다가 다시 칸에게로 모였다.
무언가 이상했다.
“근데 어쩌나. 난 저것들도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은 없는데. 원수한테 받은 건 배로 돌려주라고 배웠거든.”
크록은 필요 이상으로 칸과 형제들을 도발하고 있었다. 마치 시험이라도 해보듯이 말이다.
왜일까. 어떤 더러운 복심으로 또 저런 짓을 벌이는 건가.
정말로 크록의 뒤엔 누군가가 있는 것일까.
-이 역겨운 냄새 나만 나는 거 아니지?
엔지가 어금니를 바득 갈며 금방이라도 크록을 찢어 죽일 듯 노려봤다.
-이젠 아예 대놓고 뱀파이어 냄새가 진동해.
크록에게서 미세하게 나던 그 지독한 향기는 이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나자크는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상대가 원하는 게 뭘까.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인간에게 영역표시를 해둔 걸까.
나자크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엔지가 뒷목을 느릿하게 쓸었다.
-이렇게 대놓고 덫을 치시겠다? 아주 우릴 물로 보는 거지.
피가 끓는 듯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