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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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보호
2023.04.27.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실종자들이 사라진 곳은 각기 다른 곳이었다.
경찰관인 리암의 말에 따르자면 증거도 목격자도 없고 땅으로 솟는지 꺼지는지 알 수 없이 사람들은 그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린다고 했다. 그야말로 그건 증발이었다.
하지만 명백한 공통점은 하나.
기리는 교묘하게 철근과 외벽으로 빛이 가려진 골목길에 침묵으로 섰다. 마지막 실종자가 사라진 길목은 그림자로 드리워진 어둠뿐이었다.
기리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하늘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좁디좁은 공간. 밤처럼 까만 기리의 눈동자에 언뜻 날이 섰다.
실종자들은 도마 위의 생선이나 다름없는 신세였을 것이다.
막다른 벽, 빛이 통하지 않는 하늘. 모든 것이 포식자를 위한 만찬이었다.
“어디에 숨어 있는 거야.”
기리가 낮게 중얼거렸다.
기회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회라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기리의 기회였다.
아내를 죽인 놈들. 가족을 몰살하고, 마하바 초원의 늑대인간 종족을 거의 말살시켜버린 무도하고 잔혹한 뱀파이어 놈들의 목을 부러뜨릴 절호의 기회.
기리는 천천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평소에 온화하고 정의롭던 그에게서 결코 느낄 수 없는 거대한 살의가 공기를 집어삼켰다.
어디에 있는 걸까. 어디에서 나의 형제들을 또 물어뜯으려는 걸까.
기리가 고요히 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냉정해져야 한다. 피가 차가워져야 한다. 그래야만 이길 수 있다. 이겨내서 내 가족을, 동생들을 지켜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기리는 그렇게 자신을 다듬고 또 다듬어냈다.
지이잉-
안쪽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는 나자크였다. 숨을 내쉬고 얼마간의 신호를 기다리고 나서야 기리가 전화를 받았다.
-형, 어디야.
“잠시 나왔어. 산책도 할 겸. 학교는 마쳤어?”
기리가 부러 목소리 톤을 조금 높였다. 다행히 나자크는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한 듯했다. 외려 요즘 들어 변화되는 상황들이 피곤한 듯 목소리에 꽤 노곤함이 서려 있었다.
-4인 1조로 다니는 거 정말 안 맞아.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해? 뭣보다 칸한테서 우리 정체를 들키지 않게 조심하는 게 번거로워.
다른 무엇보다 그냥 인간인 칸을 곁에 둔 채로 낮이고 밤이고 인간 행세를 해야 하는 형제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편한 일이었다.
늘 어른스럽기만 했던 나자크는 이상하게도 기리 앞에서는 영락없는 그 나이 때의 소년이 되었다. 기리는 그 사실이 싫지 않았다. 그건 자신을 의지할 만큼 믿어준다는 뜻이었고, 언제나 자신이 그 역할을 해낼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랐다.
-타헬이 몸이 근질거리는 모양이야. 우리보단 더 힘을 제어하는 게 힘들 거야. 칸 말로는 폐공장에 수상한 사람이 드나든다던데…… 소문일 뿐이긴 하지만 여러모로 불편하고 찝찝해. 엔지도 예민해지고.
“조금만 참아. 아직은 안 돼, 나자크.”
기리의 음성에 단호함이 실렸다.
한순간 잘못 디딘 걸음이 순식간에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차마 동생에게 그런 잔인한 말을 늘어놓을 수가 없어 기리는 애써 위험한 경고를 삼켜냈다.
* *
나자크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핸드폰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너머에 있는 기리에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에게 의지가 되는 동생이 되고 싶었는데, 끝끝내 그 이유를 말하지 않고 끊어버린 전화를 떠올리며 나자크는 문득 씁쓸해졌다.
그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동생으로 있길 바란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어딘지 달라진 기리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다면 나자크는 얼마든지 제 형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었다.
정문에 기대서서 형제들을 기다리는 나자크의 발이 불규칙적으로 까닥이며 움직였다. 푸념처럼 기리에게 늘어놓긴 했지만,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몰려다니며 형제들을 건사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얼마나 더 기다렸을까. 멀지 않은 곳에서 칸의 인기척과 함께 별안간 미카의 향기가 날아들었다.
그날부터였나. 그 아이의 무릎을 치료해줬던 날.
무엇에 매료되었는지, 또 어떤 것에 이끌렸는지 알 수 없지만 미카에게서 나는 그녀만의 향기는 본능적으로 나자크를 반응하게 했다.
나자크는 아는 척 없이 그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두 사람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걷다 말고 무언가 불편했는지 미카가 제 발을 내려다봤다.
“넘어지잖아. 조심해야지.”
미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칸이 먼저 허리를 숙이며 동시에 말했다.
망설임 없이 운동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은 칸이 미카의 풀어진 운동화 끈을 잡아 단단히 돌려 묶었다. 이런 행동을 이렇게나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미카는 참아보려 해봐도 나오는 이 긴 한숨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칸.”
“응.”
미운 녀석. 대답은 또 잘도 하지.
“넌 정말이지 유죄야.”
미카의 뚱한 반응에 칸이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수그렸던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칸에게 자신은 그저 절친한 친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미카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순간에 마음이 쓸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순간 미카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칸의 잿빛 머리칼을 쓰다듬을 뻔했다.
미쳤다. 칸의 머릴 쓰다듬다니.
지금보다 좀 더 어릴 땐 장난처럼 칸의 머릴 쥐어박거나, 곧잘 어깨동무도 하며 어울렸던 것 같은데 어떤 순간부터 미카는 칸과의 접촉이 어려울 정도로 불편해져 버렸다.
“요즘은 어때?”
불쑥 다시 일어난 칸이 큰 키로 미카의 머리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어, 어떠냐니. 뭐가?”
당황한 미카가 잠시 시선을 떨구며 한 발자국 슬쩍 뒤로 물러났다. 미카의 행동에 칸은 잠시 의아함을 느끼긴 했지만, 특별히 중요하다고 여기진 않았는지 평소처럼 다시 다정히 말을 이어갔다.
“그동안 좀 힘들어했었잖아. 내가 도울 일 없어?”
“없어. 난 괜찮아, 칸.”
“할머니 병원은? 내가 같이 가줄까.”
“괜찮대도.”
“네가 걱정돼.”
순수하게 친구를 향한 걱정으로 무장한 잔인한 말이었다. 미카는 어쩐지 심장에 화살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의 배려가 이토록이나 아플 수가 있을까. 게다가 좀처럼 누군가의 마음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 칸이 이상스러울 정도로 미카에겐 끈질기게 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내 가족을, 할머니의 상점을 지키기 위해 널 배신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미카는 움직이지 않는 입을 달싹이며 심적인 고통에 괴로워했다.
미카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칸은 집요했다. 걱정을 말하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그의 단단한 태도에,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미카는 발끝만 움찔할 뿐이었다.
“왜 이렇게 늦어.”
그런 미카의 앞을 가로막고 선 건 나자크였다.
나자크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미카에게로 향했던 칸의 시선을 제게로 고정시켰다.
“나자크.”
칸이 불쑥 나타난 나자크를 보며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미카는 마치 거대한 나무에 가려진 것처럼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칼만 간간이 내보일 뿐이었다.
“4인 1조. 잊었냐.”
“안 잊었어.”
“늦었어. 다들 기다려.”
“아직 애들 안 왔는데?”
너무도 맞는 칸의 말에 살짝 멈칫한 건 나자크 쪽이었다. 아직 타헬과 엔지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말이라고 생겨 먹은 걸 생각도 없이 내뱉었으니 이 꼴이다.
나자크는 잠시 제 입술을 살짝 깨물곤 제 이마를 짚었다.
미카는 널찍한 나자크의 등을 바라보며 발끝을 들었다 내려놓길 반복했다. 곤란하다는 걸 알고 끼어든 건가. 아니면 정말 칸에게 볼일이 있어서? 어느 쪽이든 미카에겐 고마운 일이었다.
“저기…….”
이어지는 긴 침묵에 뭐라도 도와줄까 싶어 미카가 나자크의 어깨를 톡 치려는 참이었다.
“뭐냐. 분위기 왜 이래.”
반대편에서 유유히 나타난 엔지가 입안에서 막대사탕을 굴리며 세 사람 앞에 다가와 섰다. 그 뒤로 핸드폰 게임에 푹 빠진 타헬이 눈으로 다급히 미카를 향해 인사했다.
“이것만 깨면 마왕이야, 마왕!”
타헬이 손을 부들부들 떨며 잔뜩 흥분했다. 엔지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요즘 힘을 어떻게 쓰지 못해 안달이더니, 이쪽으로 노선을 억지로 변경한 모양이었다.
“너희들 싸우냐?”
엔지가 나자크의 등 뒤에 선 미카에 잠시 시선을 주고는 다시 한번 말했다.
“아니! 싸우긴 왜 싸워.”
발끈한 미카가 대신 대답하자 등만 보이고 섰던 나자크가 그제야 몸을 비스듬히 돌려 미카의 얼굴을 마주했다.
“왜 네가 발끈하는데.”
엔지가 녹아가는 사탕을 와득 깨물며 까칠하게 말했다. 아무리 봐도 아주 맘에 안 드는 요상한 그림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너희 나오는 거 기다렸어.”
칸이 먼저 한걸음 떼며 별것 아닌 투로 말했다. 정말이지 별것 아니었다. 다만 나자크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을 뿐이다. 꼭 제게서 미카를 지키기라도 하듯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 이유는 뭐였을까.
불쾌한 감각이라기보단, 자신이 무언가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더 불편했다. 자신과 관련 있는 일이 분명함은 미카의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다만, 부러 밀어붙여 그녀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최대한 부드럽게 한다고 했는데. 칸의 눈이 잠시 미카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 눈조차 차단하듯 나자크가 칸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사선으로 앞서 걸어가더니, 이내 고개를 까닥하며 멈춰 서 있는 형제들을 향해 말했다.
“안 가고 뭐 하는데.”
“가.”
칸이 단조로이 대답했다.
그레이 여관으로 가는 길을 내내 조용했다.
잠깐씩 타헬이 하는 게임 배경음악이 흐르긴 했지만 그조차도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계속되는 침묵이었다.
엔지는 안주머니에 있던 사탕을 또다시 꺼내 들어 입에 물었다.
“오렌지 맛? 형 이런 거 안 좋아하잖아.”
타헬이 게임을 하다말고 엔지의 행동을 보며 침묵을 깼다.
“어. 안 좋아해.”
“안 좋아하는데 먹어?”
“그럴 일이 좀 있다. 신경 끄고 게임이나 해.”
확인해야 했다. 자신의 혀가 미친 건지, 아님 자신이 미친 건지.
역시. 몇 개를 먹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맛이다.
분명 미카의 오렌지는 이런 맛이 아니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아니, 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가장 맨 앞에 걸어가던 칸이 울리는 핸드폰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칸, 올 때 사과랑 전구 좀 사다주겠니?]
메시지를 본 칸이 잠시 걸음을 멈추자 형제들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먼저 여관으로 가. 난 잠시 상점에 들를게.”
“상점? 거긴 왜?”
타헬이 말했다.
“사과랑 전구가 필요하시대. 바로 가까이에 있으니까 걱정 말고 먼저 가.”
나자크가 보이지 않게 미간을 찌푸렸다. 칸이야 자신들이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니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를 보호 아닌 보호 해야 하는 형제들에겐 꽤 난처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엔지와 타헬의 눈이 습관처럼 나자크를 향했다.
“같이 가.”
결정과 동시에 나자크가 발끝을 움직여 방향을 바꾸자, 칸이 그 앞을 느리게 막고 섰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