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먹이 (21/40)


21. 먹이
2023.04.20.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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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사람이 드나든다는 소문이 있어.’

칸은 허튼 말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생각이나 마음을 빠르게 알아차리는 엔지의 눈에 칸은 분명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알고 있는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좀처럼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 않는 칸은 엔지에겐 까다로운 상대다.

신경 쓰지 않는 듯 의연한 태도를 취하긴 해도 엔지는 형제들 중에선 가장 신중하고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속이는 것이 쉬웠듯 속는 것 또한 쉽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알아봐야 하나. 아니, 뭔가 정말 있긴 한 건가?

톡, 톡.

엔지의 손가락 끝이 일정한 속도로 책상을 두드렸다.

“엔지. 나와서 이 문제 풀어보렴.”

시선이 다른 곳에 향해 있음을 알고 수학 교사가 엔지의 이름을 불렀다.

엔지는 잠시 창밖에 시선을 뒀다. 너울거리는 바람에 푸른 초목이 엉성한 모양새로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이파리들이 서로의 몸을 부딪치는 소리, 칠판 위로 긁히는 마찰 소리, 사각거리는 볼펜 소리, 저마다 다르게 내뱉는 온갖 종류의 숨소리. 한 곳에 집중하지 않으려 해도 모든 소리가 제멋대로 섞여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들려왔다.

드르륵. 엔지가 일부러 의자를 뒤로 끌어 그 소리들을 상쇄시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이어 칠판에 적힌 함수를 가만 들여다보다 귀찮은 기색을 뒤로 숨겨놓고 느릿하게 판서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상하구나. 그 식은 여기에 적용되지 않을 텐데.”

교사가 엔지의 수식을 고쳐 옆에 대신 적으며 그의 풀이 과정을 지적했다.

“이번에 수석을 차지하기에 기대했는데. 요행으로 만점 받은 건 아니잖니?”

“요행일지도요.”

엔지가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무겁게 가라앉았던 반 분위가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미카는 엔지가 평소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대체로 기분파이긴 했지만 오늘처럼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또 처음 겪는 일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어딘지 멍하게 아래를 향한 엔지의 시선을 잡아끈 건 미카가 먼저였다.

“너 왜 못하는 척해?”

불쑥 제 얼굴 아래로 튀어나온 미카에 엔지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놀란 건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만의 향기를 풍기고 다녔고, 그걸 감지하는 건 엔지에겐 쉬운 일이었음으로.

“전교 1등 한 번 했던 애가, 그렇게 수학을 못 풀면 사람들이 믿을 것 같아? 네가 자꾸 왔다 갔다 하니까 애들이 자꾸 뒤에서 수군거리잖아.”

“합리적 의심이긴 하네.”

엔지는 무성의한 표정으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미카에게로 집중되는 제 시선을 일부러 멀리 떨어트렸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에 무관심해 보였고, 꼭 타인을 얘기하듯 관조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혹시, 일부러 틀리는 거야?”

“글쎄. 어떨까.”

“도대체 왜?”

미카는 정말이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이다.

“그쪽이 더 인간적이니까. 전교 1등은 비인간적이잖아?”

그 말뜻을 알 리 없는 미카는 어쩐지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입었다.

“비인간적이라면서 왜 했어?”

“몰라서 묻냐.”

잔잔히 떨어지는 엔지의 반문에 미카는 말문이 막혔다.

귀찮은 일이 벌어질 걸 알면서도 굳이 미카에게 성적으로 치욕을 안겨줬다. 눈에 띄는 일은 하지 않겠다 이성적으로 생각했다가도 거짓말처럼 무너져버린 마음을 확인했었다.

그런데 왜 했냐고? 그렇게 묻는 거야, 미카?

엔지의 눈은 마치 그렇게 묻고 있었다.

“……난 정말 널 이해할 수가 없어, 엔지.”

미카가 정말이지 난제 중의 난제를 만난 얼굴로 반쯤은 울상이 된 표정을 짓자 엔지는 덜컥 웃음이 먼저 나와버렸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엔지의 기분이 저 밑까지 가라앉았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어차피 우린 영원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차라리 똑같다면 나았을까. 내가 인간이었다면 기어코, 억지로라도 널 이해시켰을까.

엔지의 낮게 긁힌 목소리엔 결코 미카가 알 수 없는 슬픔이 묻어났다.

때때로 그랬다. 세상 온갖 것들에 염세적이고,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꼭 무너져가는 자신을 잡아주길 바라는 상처받은 얼굴. 그래서였을까. 미카는 처음부터 엔지를 그저 홀로 둘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미카는 잠시 등을 돌려 자신의 가방을 꺼내 들었다.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곧 손바닥만 한 그릇을 가져와 엔지 앞에 뚜껑을 열어 보였다.

“오렌지잖아.”

엔지의 입에서 허무한 단어가 뚝 떨어졌다.

뭐 대단한 걸 찾나 했더니, 고작 오렌지 두 쪽이라니.

“먹어봐. 달아.”

막상 내민 사람의 얼굴을 천진난만하기만 하다.

인간들의 음식에 그다지 맛을 느끼지 못하는 엔지에겐 무의미한 제안이라는 걸 미카가 알 리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 이유를 딱히 설명할 길이 없어 그가 잠시 망설였다.

“매일 아침 할머니가 싸주거든. 계절마다 다른 간식으로. 내가 아침 안 먹으면 죽는 줄 아셔.”

미카가 따듯한 웃음기를 내보이며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 저런 표정은 반칙이다. 그러니 더 거절 못 하겠잖아.

엔지는 어쩔 수 없이 오렌지 한쪽을 입에 넣고 베어 물었다. 동시에 미카가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의 반응을 눈으로 좇았다.

“달지? 단 거 먹으면 기분 좋아져.”

그래. 달다.

맛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엔지는 이상하게도 그것이 달다고 느껴졌다.

제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느꼈던 걸까. 예전 같았더라면 보지도 듣지도 않은 채 무시했을 말들을,고작 평범한 성의조차 못 본 척할 수 없어 꾸역꾸역 이걸 먹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미카는 엔지의 시선을 따라갔다. 창밖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눈으로 땅을 끌고 있었다. 아래를 향한 그의 눈을 꼭 끌어올리기라도 하듯 미카가 창틀 근처에 팔꿈치를 걸고 비스듬히 섰다.

“올겨울엔 꼭 눈이 내렸으면 좋겠어.”

미카가 열린 창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대감으로 말하자 엔지가 그제야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칸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

“칸?”

잘 가다가 칸이 웬 말이란 말인가. 안 그래도 그 녀석 때문에 또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처음 만났을 때 그랬거든. 눈이 보고 싶다고.”

미카는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리듯 그때에 멈춰 있는 순간을 기억해냈다.

‘눈이 보고 싶어.’

‘……눈?’

미카의 반문에 칸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의 진지한 말투에 소녀는 덩달아 심각해졌다.

눈이라니. 이 해안 도시 그레이빌에서 ‘눈’이란 단어만큼 이질적인 것은 없었다.

‘어쩌지. 이 지역은 좀처럼 눈이 내리질 않거든.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게 일곱 살 때였나. 그것도 잠깐 내리다 말았지. 너 정말 눈 본 적 없어?’

칸이 다시 짧게 끄덕였다.

인생의 절반을 창고에 갇혀 보내고, 또 남은 절반을 떠돌며 살았다.

정말 눈을 보지 못한 것인지, 눈이 내렸음에도 볼 수 없었던 것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었지만 칸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그것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여전하니까.

‘눈을 밟아보고 싶어. 발자국을 찍으면서 걸어보는 거, 그거 하고 싶어.’

별조차 없는 까만 밤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일렁이는 눈동자. 그토록 무언가를 바라는 눈을 본 적이 있었던가. 소녀는 그런 눈을 본 적이 없었다. 소년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때 미카는 결정했다. 이 아이와 눈길을 함께 밟겠노라고.

엔지는 잠시 비어 있는 칸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저 옛날 이야기일 뿐인데 그는 마음이 불편했다.

아니. 애초에 그 마음이란 게 뭐지?

해소되지 못하는 불편함이란 꼭 얹힌 것처럼 날숨을 가뒀다.

엔지는 펴지 않은 돛처럼 접힌 색이 바랜 커튼을 바라보았다. 그는 곧 그것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제 마음의 모양새와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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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질리언은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시간이 줄어들수록 자신이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고, 지금까지 늑대인간으로 의심되었던 자들은 모조리 인간이었다. 남은 것은 이 도시에 새로 유입되었다던 ‘기리’라는 사내를 필두로 한 가족이었다.

그들이 인간이어도 이제는 상관없다. 가짜 늑대인간을 잡아들여서라도 질리언은 제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다. 하지만 명분이 필요했다. 그들이 늑대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단서 따위여도 좋으니. 세라의 앞에 그들의 목을 가져갈 수 있는 명분 말이다.

그 뒤는 아무래도 좋았다. 질리언은 그저 자신을 대신할 희생양이 필요했을 뿐이다.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버텼는데.

질리언이 거칠게 제 손톱 거스름을 뜯자 살갗이 뜯겨나가며 피가 철철 흘렀다. 하지만 그도 잠시,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살이 아물었다.

제 발밑에서 무력하게 주저앉은 크록은 질리언의 한쪽 발을 애절하게 잡았다.

“질리언, 아직도 화가 난 거야?”

혼몽한 정신으로 흐릿한 눈을 한 크록의 얼굴을 질리언이 잡아 올렸다.

“크록, 말해봐. 뭐가 필요해? 그 녀석들에게 복수해줘야지. 널 그런 꼴로 만들었는데 참고만 있을 거야, 응?”

“하지만…… 그놈들 이상해. 상상 이상으로 세단 말이야. 정말이야, 정말.”

“세다니?”

그래 봐야 고작 인간 아니던가. 인간들끼리의 알력 싸움이야 제 눈에는 그저 흙 놀이를 하는 하찮은 어린애의 놀음일 뿐이었다. 질리언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크록의 반응은 명확히 평소와는 달랐다.

“이상해, 모든 게.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야. 주먹깨나 쓴다는 놈들을 열은 족히 고용했는데 힘 한번 못써보고 다 끝나버렸어. 그놈들은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한데, 이쪽은 죄다 팔이며 다리며 다 부러졌다고.”

크록의 말에 별것 아니라 치부했던 질리언의 표정이 일순 굳어지더니, 이내 해사하게 밝아졌다.

이런, 이런. 이게 웬 달콤한 소리란 말인가.

그저 한 가족이 떠나고 또 다른 가족이 이사 오듯 평범한 인간 집단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질리언은 구원이라도 받은 표정으로 제 밑에 꿇어앉은 크록에게로 허리를 숙여 몸을 낮춰 앉았다.

“크록, 이리 와봐.”

무릎을 댄 질리언이 크록의 뒷목을 끌어당겨 깊이 안았다.

차가운 얼음을 끌어안는 것처럼 질리언의 피부에는 냉기가 흘렀지만 크록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누구라도 필요했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든 좋았다.

“질리언, 내가 잘할게. 내가 이번엔 꼭 그놈들을…….”

쓰임새가 없으면 버려진다. 그것은 제 아비인 팔로하이드의 가르침이었고, 크록은 늘 그 기대를 채우기 위해 광활한 저택에 갇힌 채 고통받았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낳고, 그 피해자는 또다시 가해자가 되고 말았지만 크록은 그런 쉬운 사실조차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망가져 가고 있었다.

나약해진 인간의 마음을 파고드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질리언은 크록의 어깨 언저리를 살짝 물었다. 인간의 피를 소량만 마시는 건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자신의 생명과는 맞바꿀 수 없는 작은 노력일 뿐이다.

그녀는 크록에게 뱀파이어들만이 풍기는 자신의 강렬한 향기를 심었다.

무엇이든 좋다. 어떤 식으로든 누구든 꼬이게 하면 그뿐.

인간이라면 그저 먹이가 되고, 늑대라면 좀 더 나은 먹이가 되는 것. 그것이 그들의 효용 가치요, 존재의 이유다.

크록의 목덜미에 제 입술을 깊게 묻은 채 질리언이 미소를 흘렸다.

자, 물고기들아. 이리 온.

어서 와서 이 미끼를 물어다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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