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늑대의 피 (20/40)


20. 늑대의 피
2023.04.13.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크로헬름 제약 건물은 잿빛이었다.

압도적으로 사악한 기운이 점차 어둠 속의 안개를 걷어냈다.

외부에서 봤을 땐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고, 어두우며, 또 소름 끼칠 만큼 고요했다. 그곳은 사람의 흔적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정갈하고 깔끔했다.

뿌연 시야를 서늘한 바람으로 가르며 나타난 사뿐거리는 발이 골목 한 곳에 잠시 멈춰 섰다.

작은 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보통의 어느 ‘것’과는 명백히 다른 거대한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벨벳의 빨간 망토를 몸과 머리에 두르고, 깊게 눌러앉은 그림자는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리고 있었으나, 그 틈에서도 피처럼 붉은 눈동자는 달빛에 번뜩이고 있었다.

“질리언.”

소리도 없이 나타나 고요하게 이름만 내뱉는 그 형체에, 질리언은 곧바로 한쪽 무릎을 젖은 바닥에 대고 이마를 땅에 닿을 듯 아래로 처박았다.

“세라 님.”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으나, 그 이름의 주인은 갓 긁어낸 소금처럼 하얀 얼굴을 하고 있었고 기운을 내뿜을 때마다 볼 한쪽을 가로지르는 푸른 핏줄이 발딱 섰다.

“고작 인간 하나를 두고 시간을 오래 잡아먹는구나.”

“……죄송합니다.”

질리언은 압도적인 힘에 짓눌리며 제 혀를 잘근 씹었다. 비린 피 맛이 입안에 감돌고 나서야 그녀는 반쯤 안정을 되찾았다.

“그래서, 크록이란 그 인간은 쓸만하니?”

약간의 자비를 담은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질리언은 다급히 입을 움직였다.

“그놈 아비가 그레이빌의 실소유주나 다름없으니 어떤 쪽으로든 이용하기는 좋을 겁니다. 마하바 초원에서 도망친 그것들이 작은 도시로 숨어들었다 했으니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아직까진 제 능력으로도 충분히 잡아둘 수 있습니다……!”

거짓이었다. 오랜 시간 한 인간에게 매혹을 지속한 탓에 종종 크록은 제정신을 찾고 질리언에게 우리가 언제 만났냐며 질문을 해오기도 했으니까.

크록은 제 뜻대로 움직이기엔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나약했다.

무엇보다 그레이빌로 이사 왔다는 의심스러운 형제들을 감시하기는커녕 복수와 괴롭힘에 눈멀어 있는 듯했다. 빌어먹을 자식. 감히 날 거슬러? 질리언은 잇속으로 중얼거리며 망가져 가던 크록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네가 잡아 온 것들은 전부 다 인간이었지. 모두 헛발질이었어. 아주 시간 낭비였단다.”

늑대인간인 줄 알았으나 보통 인간이었던 자들은 그저 먹이가 되었다.

그레이빌의 실종자는 하루가 다르게 조금씩 늘어가고 있었고, 질리언은 되도록 빨리 작은 단서라도 찾아야 했다. 크록이 말했던 그 전학 온 형제들을 포함해서.

조금이라도 쓸모가 없어진다면 이들은 가차 없이 자신을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아주 잔혹한 방법으로.

세라는 꼭 질리언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듯 느긋하게 다가와 비싯 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해는 해. 인간이란 마음을 꺾으면 모든 게 다 끝나지. 한없이 나약해. 네 장난감도 그래서 골치 아플 거야. 그렇지?”

세라는 고개 숙인 질리언의 턱을 제 손끝으로 가볍게 들어 올렸다. 칼처럼 날 선 손톱이 그녀의 볼에서부터 턱까지 쓸어내리자 빗금처럼 패인 상처에서 피가 묻어나왔다.

“보자…….”

놀이처럼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세라의 가냘픈 손가락 끝이 질리언의 등허리를 쭉 훑어내렸다.

아슬아슬 닿을 듯 닿지 않는 피부에 질리언은 공포감으로 얼굴이 샛노래졌다.

“자, 여기가 다섯 번째 척추야. 여길 뽑아버리면 어떻게 될까?”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세요, 세라 님!”

질리언은 몇 번이고 맨바닥에 제 이마를 처박으며 피가 날 때까지 잘못을 빌고 또 빌었다.

그 모습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세라는 제 발바닥이라도 핥을 준비가 되어 있는 질리언을 더욱 몰아세웠다.

“이런. 설마 잊은 거니, 질리언? 네까짓 게 감히 느긋하게 피나 삼키며 유유자적할 수 있는 게 다 누구 덕분이라 생각하는 거야?”

“모, 모두 다 위대하신 태조 님 덕분입니다. 제가 직접 태조 님을 찾아뵙고 설명을……!”

콰직!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라의 발이 질리언의 뒷목을 밟아 눌렀다.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속도로 흙바닥에 처박힌 그녀의 얼굴이 잔혹할 정도로 아프게 일그러졌다.

“건방져. 감히 하급 따위가.”

질리언은 굳이 따지자면 두 명 이상의 인간을 매혹으로 조종할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진 뱀파이어였으나, 세라의 시선에선 여전히 천박하고 약해빠진 하급에 불과했다.

“죄, 죄송합…….”

겨우 입술을 움직이면서도 질리언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담뱃불을 끄듯 발끝으로 질리언의 뒤통수를 실컷 짓이기고 나서야 세라의 발이 느릿하게 물러났다.

“우린 시간이 없다. 그러니 널 기다려줄 시간도 없지. 어린 늑대인간들을 찾아내. 그게 네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마.”

“명심, 명심하겠습니다. 세라 님.”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누르며 질리언이 복종을 약속했다.

“날 더는 기다리게 하지 마, 질리언.”

늑대인간의 피를 마시고 더 높이, 더 멀리 올라갈 것이다.

그 수많은 실험에서 무엇 하나 완벽하게 증명된 것은 없었으나, 그들은 알고 있었다.

분명 늑대인간의 피가, 뱀파이어의 힘을 더 강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 *

제 얼굴보다도 높은 노트와 유인물을 탑처럼 쌓아 복도를 가로지르는 미카는 가는 내내 위험하게 비틀거리는 중이었다.

반쯤 노트가 사라지고, 가벼워진 무게와 함께 시야가 트이고 나서야 미카는 그 주인공을 향해 환히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지나치게 작위적인 말투로 말했다.

“칸, 역시 넌 참 따듯하고 다정해.”

“이럴 때만?”

칸이 살짝 웃으며 미카의 칭찬에 화답 아닌 화답을 했다. 곧이어 앞서 먼저 걸어가는 미카의 뒤를 천천히 따라 걸으며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요즘 무슨 걱정 있어?”

“……아니.”

“미카, 부탁할 일이 있으면 그냥 해. 그게 뭐든 도와줄 테니까.”

처음엔 장학금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레이빌 세컨더리에선 전교 석차 1~3등에게 똑같은 금액의 장학금을 지급하기에 그조차는 문제가 못되었다.

칸이 무슨 마음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미카는 더욱 마음이 불편해졌다. 크록의 말대로라면 이제 곧 재계약이 시작될 시점이었다.

“할머닌 요즘 어떠셔?”

“늘 그렇지 뭐. 요즘은 기침이 심해지셨어. 이렇게 더워지는데도.”

미카는 무심한 날씨를 원망하듯 창밖에 내리쬐는 태양을 보며 말했다.

그 뜨거움이 창을 타고 복도까지 들어오자, 미카는 부러 그것들을 밟아 없애듯 보란 듯이 복도 한복판을 지나가고 있었다.

칸은 바로 저런 모습이 미카답다고 생각했다.

“그거 알아, 미카? 넌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제일 강해.”

외면하지 않고 바로 볼 줄 아는 것. 회피하지 않고 맞서는 것. 그건 그 자체로 찬란한 재능이었다.

미카는 칸이 왜 그런 말로 자신을 위로했는지 알기에 부러 웃으며 장난을 쳤다.

“그거 욕은 아니지?”

“설마. 그럴 리가.”

칸은 언제나 그렇듯 진심이었다.

“무슨 선택을 하든 괜찮을 거야. 언제나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겁먹지 마, 미카.”

그래. 칸, 너는 이런 사람이었다.

늘 나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

“엔지 그 새끼 분명 커닝했다니까? 아니면 돈으로 누군갈 매수했거나. 안 그럼 맨날 수업 빼먹는 놈이 무슨 수로 1등을 해? 아주 구린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야.”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미카와 칸의 시선이 동시에 한곳을 향했다.

복도 끝 모퉁이를 돌아 벽에 기대 모인 학생들 몇이 엔지를 안줏거리 삼아 떠들고 있는 현장이었다.

“전엔 수학이 나와서 문제 풀라고 했더니, 냅다 식은 안 적고 답만 홀랑 적더라니까? 칠판에 커다랗게 ‘-1’ 이렇게. 미친놈 아니냐?”

“그래서 그게 정답이야?”

“답이긴 했는데. 수학이 다 그렇지. 0, 1, -1 그 셋 중에 하나지.”

“하여간 전학생 새끼들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어. 그놈들 때문에 내 등수만 뒤로 밀렸잖아. 짜증 나게.”

들으면 들을수록 참 가관이라고 미카는 생각하는 중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오가는 복도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같은 반 친구 험담이나 해대다니. 앞에서도 못 할 말을 왜 뒤에서 저렇게 한단 말인가.

미카가 노트와 유인물을 내려놓고 손목을 걷어 올리자 칸이 곧바로 그녀를 막아섰다.

“잠깐만. 가려고?”

“응. 내가 제일 강하다며?”

미카가 배시시 웃으며 환히 말하자 칸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긴. 누군가가 결코 하지 않으려는 일을 기꺼이 해내는 그녀의 곧은 성격은 칸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걔 그런 애 아니거든?”

별안간 뒤에서 미카가 튀어나오자 아이들이 놀랐는지 동그랗게 몰려 있다 말고 순식간에 뒤로 흩어졌다.

“아오, 깜짝이야. 반장! 소리 좀 내고 다녀!”

“냈잖아, 방금. 엔지 걔, 그런 애 아니라고.”

“넌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야?”

“뒤에서 욕먹는 애 편.”

“뭐?”

미카의 말에 아이들이 당황하자, 뒤이어 편을 들어주는 건지 같이 욕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문장들이 계속 이어졌다.

“비록 인격은 최악이지만 얼굴도 그 정도면 꽤 잘생겼잖아? 게다가 오자마자 전교 수석까지 할 정도로 수재지. 뒤에서 너희한테 욕먹을 이유 없을 것 같은데.”

별것 아닌 얘기라 생각했는데 학생들이 생각 이상으로 조용하자, 미카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 머리 뒤로 그림자가 지고 나서야 자신의 뒤에 누군가가 서 있음을 발견했다.

“아아. 고마워라.”

삐딱한 시선, 삐딱한 말투.

“비록 인격은 최악이지만 잘생긴 수재인 날 감싸주다니. 고마워서 눈물이 나려고 그러네, 반장.”

“……아, 저. 그, 그게. 난 그런 뜻으로…….”

“그래. 그 뜻 잘 알아들었어.”

엔지가 미련 없이 지나쳐 걸어가기 시작하자, 그 뒤를 발 빠르게 쫓으며 미카가 다급하게 물었다.

“아니! 잠깐, 뭘 알아들어?”

“아주 잘 알아들었다니까?”

엔지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그걸 알 리 없는 미카가 발을 동동거리더니 뭐라 설명하기 위해 팔을 휘적이며 다급하게 몸을 움직여 엔지의 앞길을 떡하니 막아섰다.

“아니, 아니, 너 지금 잘 못 알아들었거든? 완전히!”

“흐음. 그래?”

“어! 그래!”

당당한 미카의 태도에 잠시 넘어가는 듯했으나, 그렇게 쉽게 우위를 내어줄 엔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치자.”

“야!”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칸은 어쩐지 저렇게 나란히 가는 모양새가 퍽 낯설다고 생각했다.

* *


 
폐공장에서 아주 오랜만에 힘을 개방한 이후 형제들은 종종 그날을 떠올렸다.

보름달이 뜨는 밤엔 좋건 싫건 강제로 늑대의 모습으로 변할 수밖에 없지만, 평소엔 인간들 틈에서 힘을 누르며 지내야 하기에 그들이 자유를 누리는 것은 좀처럼 얻기 힘든 기회였다.

그러니 아무도 없이 오롯이 그들만 있을 수 있는 장소가 퍽 반가울 수밖에.

“우리 오늘 폐공장 가면 안 돼?”

학교에서 돌아와 여관에서 시간을 보내던 타헬이 역시 나자크를 제일 먼저 공략했다.

한 명이 움직이면 다 같이 움직여야 한다는 기리의 규칙 때문에 누구 하나라도 동의해주지 않으면 타헬은 그 어디도 홀로 갈 수 없는 처지였다.

“힘을 못 쓰니까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아, 형.”

“나만 하겠냐. 난 어제 실수로 계단 난간대도 망가뜨렸어.”

“그거 엔지, 너였냐?”

아침부터 별안간 납작하게 휘어진 난간대 때문에 경비실에서 떠들썩하더니, 바로 그 주범이 나자크의 눈앞에 있었다.

그 사실이 어이없는지 나자크가 어울리지 않게 헛숨을 흘렸다.

힘을 개방시키는 건 쾌감에 중독되는 것과 같았다. 해가 아직 남아 있던 어두운 오후, 달빛조차 없었고, 고작 절반도 안 되는 힘을 썼을 뿐인데도 형제들은 주체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그것은 피를 탐하려는 뱀파이어의 욕망과는 다른 것이었다.

“웬만하면 가지 마.”

어디선가 튀어나온 칸이 겉옷을 챙겨 들며 무심히 형제들을 향해 말했다.

그 말에 그들의 시선이 칸에게로 집중됐다.

뭐야. 혹시 다 들은 거야?

시선이 오롯이 제게로 모이자 칸은 잠시 갈등하는가 싶더니,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며 다시 말했다.

“거기 위험한 사람이 드나든다는 소문이 있어.”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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