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바깥은 여름
(19/40)
19. 바깥은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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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바깥은 여름
2023.04.06.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보건실은 고요했다.
공기 중에 흩어지는 미세한 숨소리까지 느껴질 정도로 솜털이 예민하게 날 섰다. 정도가 다를 뿐 둘 사이엔 무언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그 기류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미카는 가지런한 제 치마를 잡아 구겼다.
나자크는 보건 선생님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능숙하게 소독솜과 반창고를 챙겨와 미카의 맞은편에 앉았다. 알싸한 알콜 향이 흩어지자 미카는 괜히 기침이 쏟아졌다.
미카는 정말이지 숨 막힐 듯 조여오는 긴장으로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괜찮으니까 내가 할…….”
소독 집게를 나자크의 손에서 뺏어오기도 전에 그의 손이 뒤로 물러났다.
“아무것도 안 물어.”
안심시키듯 돌아오는 말에 미카의 손이 허공에 뚝 멈췄다.
그녀는 자신이 뭘 두려워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알고 있기에 불안했지만, 그렇기에 나자크의 덤덤한 약속이 위안이 되기도 했다.
“안 물을 테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
미카는 작게 끄덕이곤 의자에 양손을 올렸다. 그녀의 반응에 나자크는 방금 전 그녀에게 쏟아부었던 무신경한 말들을 떠올렸다. 이렇게까지 경직되게 만들 줄 알았다면, 자신이 크록과의 대화를 들었다는 걸 아예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을 것이다.
소독솜이 닿을 때마다 쓰라린 통증이 여지없이 몰려왔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는데 잇새로 빠져나온 미카의 작은 신음이 나자크에겐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아파?”
“쓰라려.”
“미안.”
나자크의 사과에 미카가 고개를 살짝 젖혔다. 제 무릎 앞에 고개를 숙이고 앉은 그의 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네가 왜 미안해?”
“더 살살 하고 싶은데. 이게 한계야.”
꼭 자신이 다친 얼굴을 하고선 진지하게 말하는 나자크를 보고 있자니 미카는 웃음이 먼저 나왔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없는 나자크는 그저 그녀의 웃음이 멈추길 얌전히 기다렸다.
“다 웃었어?”
“응.”
“그럼 이제 움직이지 마.”
말은 이성적이고 고요하기 그지없는데 하는 행동은 지나치게 다정했다. 그런 모습은 꼭 진짜 형제처럼 칸과 닮아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왜 내게 친절한 걸까. 돌아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나자크는 반창고를 꺼내 까진 상처 위에 조심스럽게 붙였다. 반창고가 떨어지지 않도록 마무리까지 꼼꼼하게 하고 나서야 순순히 미카에게서 물러났다.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켜내는 건 나자크에겐 그리 어려운 일처럼 보이지 않았다. 무엇이든 우직하게 지켜내는 이들은 가볍든 무겁든 결단코 그것을 지켜냈다. 그런 면을 엔지는 융통성 없다 말하곤 했지만 나자크는 오래도록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다.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자 미카의 긴 머리칼이 턱을 쓸며 공중에서 잠시 살랑였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먼저 입을 뗀 건 미카 쪽이었다.
무릎이 욱신거렸다.
어렵게 뱉은 말이란 걸 알기에 나자크는 섣불리 답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내려앉은 조용한 말씨엔 두려움이 있었지만, 또 돌파하겠단 의지도 있었다. 오랜 시간 홀로 버텨낸 삶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 모진 시간조차 미카는 스스로 견뎌왔다.
“할머니한테 라온상점은 인생이고 전부야. 이 도시에서 태어나 여기서 죽는 게 할머니의 마지막 바람이고. 근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칸에게서 너흴 떨어트려 놓는 거라니. 정말 우습지 않아?”
한 번 터진 말문은 스스로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로 길고 빨라졌으나, 앞에 조용히 마주 앉은 나자크는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단지 가만히, 공기처럼, 정적처럼 그렇게 미카의 말을 모두 다 받아냈다.
“내 자신이 원망스러워. 크록을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한다는 게 억울해. 걘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거든.”
“…… 그러게. 본보기론 부족했나.”
긴말들 끝에 처음으로 받아친 나자크의 대답은 혼잣말 같기도 하고, 꼭 경고 같기도 해서 미카는 쉽게 해석하기 어려웠다.
이전에 크록과의 대화에서도 느꼈지만 이들 사이엔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가까이에서 본 나자크의 눈동자는 회갈색이었다. 그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지만, 붉게 그려진 입술 선은 꼭 당연한 걸 보았다는 듯 관조로 올라가고 있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는 나자크의 목소리에선 체념이 묻어났다.
“인간은 참 안 변해. 그렇지?”
* *
미카는 며칠째 공부에 매달렸다.
곧 중간고사인 건 사실이지만 이토록이나 미친 듯이 공부에 몰두한 적은 없었다.
무엇을 잊기 위함인지 얻기 위함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잠도 자질 않고 제대로 먹지도 않으며 강행군을 계속 이어갔다.
학교 식당은커녕 엉덩이에 접착제라도 발랐는지, 선생님의 호출이 아니고서는 교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채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했다.
그런 그녀를 불안하게 보는 건 비단 칸뿐만이 아니었다.
“야. 어떻게 좀 해봐.”
다짜고짜 칸의 팔을 툭 치며 신경질을 내는 엔지에,
“미카 누나 저러다 과로로 기절이라도 하는 거 아냐? 1등 못 하면 큰일 나는 거야? 그래?”
불안해서 발만 동동 뛰는 타헬에,
“과로보단 영양실조가 먼저 올 것 같은데.”
평소엔 하지도 않는 남의 영양 걱정까지 해대는 나자크까지.
결국 녀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칸이 미카가 즐겨 마시던 달콤한 우유 하나를 챙겨 들곤 그녀의 책상 앞으로 가서 섰다.
사람이 오가는데도 전혀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미카는 반복된 문제 풀이에 여념이 없었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초조하게 만드는지 칸은 알 수 없었다.
툭. 우유를 책상에 소리 나게 내려놓고 나서야 미카가 잠시 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조차도 찰나였지만.
“미카, 쉬엄쉬엄해. 그러다 쓰러져.”
“괜찮아. 겨우 이런 걸로 안 죽어. 너무 걱정 마.”
미카는 칸의 눈을 보지 않는다.
그 사실을 칸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더 캐묻는 게 미카를 더 다치게 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건 순전히 칸의 본능이었고 직감이었다.
무엇을 숨기는지, 무엇이 널 이렇게 괴롭게 하는지 물을 수 없었다. 때가 되면 미카는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혼자 피를 철철 흘리다 꾸역꾸역 터진 상처를 간신히 봉합한 채 그렇게 나타날 것이다.
얻은 수확 하나 없이 자리로 다시 돌아온 칸을 향해 엔지가 말했다.
“쟤 원래 시험 기간에 저렇게 독해?”
미카는 한 번도 이렇게까지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칸은 외려 당황스러웠다. 엔지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해 헤맸다.
“모르겠어.”
“너희들 친구 맞냐.”
미카에 대해 무언가 알기는 아는 걸까. 문득 칸은 자신이 진짜 그녀의 모습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흐음, 뒤통수나 한번 쳐줄까.”
엔지가 턱을 괸 채로, 머리 숙여 열중하고 있는 미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칸이 뜨끔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눈빛이 제게 향해 있는 걸 알면서도 엔지는 아랑곳 않고 여전히 미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내가 전문이거든. 그런 나쁜 짓.”
엔지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옅은 미소를 흘렸다.
그녀는 몰두해야 할 무언가가 반드시 필요한 사람처럼 거의 반 미친 듯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렇다. 미카는 지나칠 만큼 ‘몰두’할 것을 찾아 좇고 또 좇았다.
하지만 그건 환상처럼 무의미한 일.
만질 수 없는 안개처럼 허무맹랑한 일.
시험이 끝나고 결과가 발표된 날, 교내 게시판을 보며 미카는 지난날 자신이 몰두했던 모든 시간이 무용했음을 깨닫는 중이었다.
게시판 앞에 선 미카는 꽤 긴 시간 동안 멍하게 정면을 주시했다.
그레이빌 세컨더리에 입학해 난생처음 보는 석차였다.
2등.
2등이라니.
단 한 번도 1등의 자리를 놓쳐본 적 없는 자신이 2등이라니.
1등을 지키기 위해 요 며칠 미친 사람처럼 공부에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1등은 당연히 미카의 것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눈앞의 결과로 촉발된 자신의 감정이 허탈함인지 무력감인지, 그것도 아니면 분노인지 미카는 정의 내리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제 이름 위에 있는 게 어째서 저 녀석이란 말인가.
“이제 정신 좀 차렸어?”
마실이라도 나온 양 하품까지 하며 느긋하게 미카의 옆으로 나란히 선 건 엔지였다.
입에 덜렁 사탕 하나를 문 채 석차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그의 눈은, 미카의 시선이 한곳에 향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나서야 정면을 향했다.
재미없는 기사라도 읽듯 게시판의 순위를 대충 확인하는 그의 눈빛은 너무도 당연하단 태도였다.
“너…… 네가 어떻게.”
미카는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이 녀석이 1등이란 말인가!
저 태평한 얼굴로 틈만 나면 게으름을 피우고, 잠만 자던 녀석이 말이다.
미카는 자신의 감정의 정체를 드디어 깨달았다. 이건 명백히 배신감이었다.
게다가 뭐? 정신을 차렸냐고?
미카의 속도 모르면서 엔지는 그저 가만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씨익 웃어 보였다.
“왜. 내가 다르게 보여?”
“어. 아주 재수 없어 보여!”
미카가 엔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까칠하게 반응했다.
한량처럼 유유자적하게 제 잠자릴 찾으러 다닐 땐 언제고 저런 비인간적인 성적이라니.
그것도 2등인 자신과는 점수 차가 크게 났다. 게다가 그가 만점을 받은 수리 영역은 어렵게 나왔다고 모두 한입 모아 말하지 않았던가.
“화났어?”
저렇게 뻔뻔스럽게 묻는 녀석에게 의욕이 없다느니, 기특하다느니, 말도 안 되는 잔소리며 충고를 늘어놓았으니 얼마나 제 꼴이 우스운지 엔지를 모를 것이다.
“오오. 뭐야? 성적 나왔네?”
분위기를 감지 못하고 복도 끝에서 달려온 타헬이 게시판 앞에 천진하게 섰다.
“음. 엔지 형이 1등이구나?”
“1등이구나? 뭐야, 그 당연한 대답은?”
지나치게 평범하고 평온하기까지 한 타헬의 반응에 미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쯤 따지듯 묻자, 타헬이 당황했는지 어색하게 얼굴을 뒤로 물리며 헤벌쭉 웃어 보였다.
“그야 당연하니까?”
타헬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단 얼굴로 미카를 바라보았다.
“엔지 형 천재야, 누나. 물론 시험 보다가 문제 안 풀고 잘 땐 꼴등도 자주 해.”
뭔 저런 비현실적인 소릴 진지하게 한단 말인가.
타헬의 말마따나 눈앞에 천재를 맞이한 미카는 여전히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왜. 다음번엔 꼴등 해줘?”
“됐거든?”
밉살스럽게 사탕을 굴리며 엔지가 도발하자 곧바로 미카가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거절을 표시했다.
신기하고 놀란 건 그렇다 쳐도 어쩐지 미카는 홀가분하단 생각이 들었다.
비록 1등 자리를 놓치긴 했지만, 그렇게 미친 듯이 집중력을 끌어 올리고 몸을 축내고 노력을 쏟아부은 덕분에 잠시나마 자책과 괴로움을 잊어버릴 수 있었으니까.
“내가 왜 귀찮게 문제를 다 푼 줄 알아?”
미카의 발끝에 엔지의 발이 살짝 부딪혔다.
곧 소리 없이 제 앞을 막고서 키를 맞춰 살짝 허리를 숙인 엔지가 나지막이 입술을 뗐다.
“네가 며칠 밤을 새우든,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안 일어나고 공부만 하든, 코피를 쏟든, 어떻게 해도 소용없다는 거 알려주려고. 넌 나 못 이겨. 평생.”
이건 뭐 자신감인지 오만함인지 정체를 알 수도 없었지만, 엔지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둘 중 그 무엇도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정말이지 사실만을 이야기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너 내 속 뒤집으려고 전학 왔지?”
“그러니까 밥 먹어.”
별안간 툭 떨어진 엔지의 말에 미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도 자고, 나가서 좀 걷고, 웃고 떠들어. 인간답게.”
그래. 일부러 그런 거다.
일부러.
안 풀던 문제를 풀고, 제게 패배감을 안겨주고, 이 말도 안 되는 홀가분함을 느끼게 해주려고.
미카는 따라오라는 듯 느리게 움직이는 엔지의 녹갈색 눈동자를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여름이야. 모든 게 푸르고 싱싱하게 살아 있는.”
툭. 엔지의 커다란 손이 미카의 등을 살짝 밀었다.
한 번의 닿음으로 세상 밖으로 떠밀려 나간 미카의 발이 따사로운 햇볕에 가 닿았다.
그의 말대로 바깥은 이미 완연한 여름이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