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따로 또 같이
(18/40)
18. 따로 또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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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따로 또 같이
2023.03.30.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아니, 잠깐. 왜 3인 1조가 아니고 4인 1조야?’
쉽게 넘어가는 법 없는 엔지가 수긍을 하다 말고 역시나 인원수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레이빌 세컨더리에 기리가 덩달아 같이 갈 것도 아닌데 왜 4인 1조란 말인가.
‘그럼 칸은 버리고 다닐래? 인정머리 없는 놈.’
기리가 엔지에게 가차 없이 일갈했다. 하지만 칸의 이름에 더 어이가 없는지 엔지가 어깨를 들썩했다.
‘아니, 그러니까, 여기서 칸 그놈 얘기가 왜 나오냐고. 지금 나만 이상해?’
엔지가 나자크와 타헬에게로 고개를 돌려 동의를 구했으나 둘은 조용히 대답을 기다리는 듯 기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우리가 이 여관에 있다는 걸 들킨다면 누가 가장 위험해질 것 같아?’
그렇다. 이 그레이 여관의 부부와 그들의 아들 칸.
어쩌면 자신들의 존재로 인해 가장 먼저 위험에 빠지게 되는 건 칸일지도 모른다.
단 한 번의 반문에 논란은 가볍게 종결됐다.
칸은 지금 무언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밖에 외출을 할 때도, 학교에 갈 때도, 심지어 밥을 먹을 때조차 형제들은 한 몸처럼 딱 붙어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것도 자신과 함께.
여관에서도 웬만하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이들이었기에, 그들의 행동은 퍽이나 이상해 보였지만, 반대로 녀석들을 배척하기로 마음먹었던 많은 학생의 시선은 며칠 전과는 명백히 다른 느낌이었다.
사실 배척이라고 해봤자, 나자크의 말대로 이쪽에서 저쪽을 거부하는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형제들은 전혀 타격조차 받지 않은 무심한 얼굴들이었다. 그런 시간이 반복될 만큼 반복되고 나서야 조금씩 아이들이 그들을 다른 시선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저렇게 세트로 다니니까 그림이 따로 없네.”
“칸이 저렇게 키가 컸었나. 무슨 모델 같지 않니?”
“나자크 봐. 쟨 운동할 때가 진짜 멋있어.”
“난 타헬이 귀여워서 더 좋던데.”
“야야. 쉿. 크록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래. 빨리 가자, 가!”
훤칠한 세 명의 전학생은 따로 있을 때도 각각 빛이 났지만, 한 몸처럼 붙어 다니자 더욱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특히 미묘하게 변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학교생활을 해나가는 칸의 무심한 듯 당당한 태도는 묘하게 호감을 이끌어냈다.
손바닥 뒤집듯 쉽게 뒤집어지는 인간들의 마음이란.
형제들은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그리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엔지는 별맛이 느껴지지도 않는 샌드위치 조각을 한입 베어 물곤 버리듯 내팽개쳤다. 그러고는 제법 인간처럼 오렌지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늑대인간들의 언어로 말했다.
-하. 인간처럼 살기 더럽게 어렵네.
-엔지 형, 그냥 도시락 싸다닐까? 그게 더 인간답잖아.
-학교 식당은 장식이냐?
엔지의 일갈에 타헬이 금방 시무룩해지자, 나자크는 나무라듯 엔지를 한번 노려봐주고는 타헬의 어깨를 두드렸다. 언제나 그렇지만 나자크는 타헬에겐 지나치게 후하다. 그 부분을 지적하려다 엔지가 그만하길 선택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상승했다 하강하는 엔지의 성미를 맞추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닌데, 그런 와중에 기리의 지시가 떨어졌으니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죽을 맛일 게다.
“형, 형은 맛있어?”‘
이런 상황 속에서도 타헬이 군말 없이 음식을 먹는 칸을 보며 물었다. 외려 그 질문에 당황한 쪽은 칸이었다.
그는 꽤 오랜 시간 전부터 맛을 잃어가고 있었고, 그 사실을 들킬까 늘 조심해왔다. 도심에 있는 병원에도 가봤지만 아무 이상 없단 대답만이 전부였다.
“그냥 먹을 만해. 배고파서 먹는 거지, 뭐.”
대략적으로 뭉뚱그려 대답하자, 그 말에 의심을 품는 이는 없어 보였다.
“먹을 만하다고? 엄청 짠데.”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미카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물을 벌컥벌컥 마시자, 칸은 제 손에 쥔 샌드위치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미카의 말에 형제들의 시선이 다시금 칸에게로 쏠렸다.
형제들이야 애초에 인간들의 음식에 특별히 맛을 느끼지 못하니 그렇다 쳐도, 칸은 어째서 아무렇지 않은 걸까. 단순한 호기심이 위험하게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칸은 조용히 물을 한 모금 삼키고는 어색함을 지워냈다.
“난 짠 것도 잘 먹어, 원래.”
“하긴. 넌 어렸을 때부터 음식은 안 가렸으니까.”
미카가 동의한다는 듯 가볍게 끄덕이며 답했다.
예전부터 칸은 무엇을 줘도 잘 먹는 아이였다. 비교적 자주 함께 밥을 먹곤 했는데, 그가 요한나에게 밥이나 반찬 투정하는 건 들어본 적도 없는 미카였다.
미카는 남은 쓰레기들을 주워 담아 잠시 퇴식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려는 찰나,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누군가의 손이 미카의 손에 작게 접은 쪽지를 전달했다.
점심시간이라 잔뜩 모인 학생들 틈에서 그 얼굴이 누구인지 확인조차 하지 못한 채, 미카는 의아한 얼굴로 쪽지를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지금 바로 체육관으로 와]
그리고 그 짧은 문장 끝에 써 있는 이름은 크록이었다.
언제까지 이런 유치한 짓을 하려는 걸까.
질식할 것만 같아.
미카는 떠오르는 말을 지워내며 저 멀리 자신을 향해 오라고 손짓하는 칸에게 미소로 답했다.
열어둔 창가에서 뜨거운 바람이 몰려왔다. 미카는 땀에 젖은 머리를 틀어 올렸다.
* *
“꽤 친해 보이던데. 끼리끼리 뭐 그런 건가.”
다짜고짜 떨어지는 조롱도 확신도 아닌 말에 미카는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넓은 체육관 한복판에 농구공을 튀기며 크록은 며칠 전 라일락 숲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 오명, 치욕, 본보기로 삼아진 비굴한 제 처지.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에 박혀 있었다.
크록이 팔을 뻗어 공을 던지자, 농구공이 힘없이 링을 맞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아, 역시 어렵네. 나자크는 쉽게 하던데. 걔가 싸움만큼이나 운동을 잘하더라고?”
“무슨 소리야.”
미카의 물음이 어떤 답을 원하고 있는지 알았지만 크록은 그걸 확인시켜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혼자서 기억에만 담아둬도 미치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짓밟힌 와중에도 이 모든 걸 목격한 테오를 학교에 남겨둘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뭐, 자세히 알 건 없고. 아무튼 미카 네가 칸 그놈 감싸고 도는 거야 하루 이틀 일 아니니 그렇다 쳐도, 그 여관에서 빌어먹는 놈들 말이야. 걔들도 꽤 널 특별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지?”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해. 너랑 이렇게 마주 보고 서 있는 것도 곤욕이거든.”
차갑게 떨어지는 미카의 말에 크록이 입술을 삐죽이더니 알았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꽤 천진한 얼굴로 불쑥 다가와 미카의 양어깨를 잡아 내리눌렀다.
“칸과 그놈들을 떨어트려 놔.”
“……뭐?”
“들었잖아.”
미카는 신경질적으로 제 어깨를 잡은 크록의 팔을 떨쳐냈다.
“알아보니까 곧 라온상점이 있는 건물 재계약 시즌이더라고?”
“역시 넌 비열해, 크록.”
미카의 일갈에 크록이 어깨를 으쓱하며 시원히 웃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건 돈과 권력을 가진 자가 흔들 수 있는 특권이고 여유였다.
“아야야, 아파라. 네 입에서 그런 못된 말이 나오면 내가 속상하지.”
“할머니가 평생을 일한 곳이야. 그렇게 아무 이유 없이 맘대로 내쫓을 순 없어.”
“그거야 보면 알겠지. 내쫓을 수 있는지 없는지.”
크록은 미카의 폐부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도시, 모든 사람의 약점 또한.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는 심정은 어떨까? 난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어서……. 할머니 몸이 안 좋다면서. 설마 나쁜 손녀가 될 생각이야, 미카?”
짝!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카가 작은 손으로 크록에게 따귀를 올려붙였다.
크록의 얼굴이 돌아가자마자 그의 무리 중 하나가 미카의 어깨를 거세게 밀어붙였다.
땅으로 털썩 주저앉은 미카가 원망과 비난이 섞인 눈에 잔뜩 힘을 준 채로 크록을 올려다봤다.
“쯧. 어리석긴.”
아버지라는 인간에게 단련된 것 중의 하나는 맷집이려나. 크록이 비릿하게 웃으며 입안에서 혀를 굴렸다. 매섭게 날아온 손이었지만 그리 놀라울 정도의 아픔은 아니었다. 그저 기분이 더러울 뿐.
이어 손수건을 꺼내든 크록이 제 입가를 살짝 닦아냈다.
“서둘러. 그리 시간이 많지 않아.”
버리듯 미카의 얼굴 위로 떨어진 손수건에선 썩은 내가 났다.
“미카, 잘 생각해. 기회는 한 번뿐이니까.”
* *
좋은 향기가 난다.
그것은 흔히 인간들에게서 풍기는 엇비슷한 냄새도 아니었고, 종종 불쾌감을 느끼게 했던 낯선 냄새도 아니었으며, 명백히 다른 인간들과 구별되는 누군가의 짙은 냄새였다.
요즘 들어 나자크는 좀처럼 미카의 향기를 거스르지 못했고, 모른 척 지나치지도 못했다.
제아무리 뛰어난 후각을 가진 늑대인간이라 해도 이건 모든 인간을 뚫고 들어오는 향기라 더 미칠 노릇이었다.
멍하게 걸어가던 미카의 어깨를 가볍게 톡 쳤을 뿐인데, 그녀는 어쩐지 강렬한 접촉을 한 것처럼 근육이 긴장한 채 화들짝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그래서. 뭘 어쩔 생각인데?”
나자크는 가타부타 설명조차 하지 않고 뜬금없이 미카에게 물었다.
“나자크.”
미카는 눈에 띄게 숨을 내몰아 쉬었다.
모든 걸 다 꿰뚫고 있는 것처럼 나자크는 한 번 더 질문을 반복하지 않았다.
잠시 미카가 숨돌릴 틈을 기다렸다. 곧이어 그녀의 뒤늦은 답이 돌아왔다.
“…… 뭘 어쩌다니?”
미카의 말에 나자크는 잠시 고민하는 듯 짧은 침묵을 지키고는, 이내 미카에게로 느리게 한 걸음 다가섰다. 이번엔 놀라지 말라는 듯 배려가 담긴 사려 깊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 태도와는 반대로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씨와 음성은 감정이 뒤섞이지 않은 이성, 그 자체였다.
“칸에게서 우릴 떼어놓는 방법이 한두 가지는 아닐 테고. 그중에 네가 할 만한 가장 유력한 건 이간질을 한다든가, 칸을 구슬려서 우릴 그레이 여관에서 쫓겨나게 만든다든가, 뭐 그 정도 수준일 것 같은데. 뭐, 어느 쪽도 썩 너한텐 어울리지 않는 방법이긴 하지만.”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항상 맑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명랑했던 목소리가 사포처럼 까슬까슬해졌다.
굳이 늑대인간으로서 고충을 하나 더 말하자면.
“내가 귀가 좀 밝아서.”
단정한 나자크의 답에 미카의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는 듯했다.
귀를 닫고 살려고 해도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이 늑대인간의 운명이다. 형제 중에서도 나자크는 능력이 뛰어난 편이니, 한 번 기억해둔 인간의 흔적을 쫓는 것 또한 어쩌지 못하는 습성이다.
그게 비단 미카뿐만은 아닐 거라며 나자크가 스스로에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한데도 진실을 말하기 꺼리는 건 아무래도 상점을 운영한다는 제 할머니에게 해가 갈까 두려워서겠지.
나자크는 그리 판단하며 베이지색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올렸다. 188센티미터의 큰 키를 가진 그가 손을 움직이자 미카의 머리맡에 연하게 그림자가 졌다.
제 시선 아래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순진하게도 훤히 표정을 드러내는 한 여자아이가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떤 식이 간단할까.
다정하게 구슬리는 건 제 취향에 맞질 않고, 그렇다고 몰아세우자니 묘하게 죄책감을 자극하는 저 깊고 올곧은 눈동자가 불편할 정도로 거슬렸다.
처음부터 그랬다. 미카는 칸만큼이나 우직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흔들리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왜 피로한 걸까.
인간의 마음은 그저 인간의 마음일 뿐인데.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데.
엔지만큼이나 나자크의 마음은 파도처럼 요동쳤다.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들은 각자의 마음이 누구에게로 향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엇 하나 속 시원히 들은 답도 없는데 별안간 가려진 그녀의 한쪽 무릎에서 피 냄새가 났다.
위험하다. 하필 이런 때에.
“너, 다쳤어?”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