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존재의 이유 (17/40)


17. 존재의 이유
2023.03.23.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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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보지 않는 친구들을 둔다는 건 꽤 고단한 일이었다.

요 며칠간 그레이 여관의 장기 투숙객이자 전학생들을 상대하며 미카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 중이었다.

가뜩이나 시험에, 수업에, 도맡은 반장 자리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그런 와중에 철없이 제멋대로 구는 문제아까지 떠안아야 하다니. 어쩌면 이 그레이빌 세컨더리는 제게 졸업증서 따위 내어줄 생각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의욕이 없어도 너무 없어.”

반쯤 포기한 투로 미카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이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들었음이 분명한데도 맞은편에 있는 사람은 꿈쩍조차 하질 않는다.

독서 클럽은 활동 자체가 정적이긴 해도 내면에 불타는 무언가를 쏟아낼 수 있다는 열정적인 슬로건을 내건, 그레이빌 세컨더리에서도 꽤 유서 깊은 클럽이었다.

그런데 그런 고귀하고 특별한 이 활동에, 도서관이 무슨 자기 집 안방이라도 되는 양 의자의 오와 열을 맞춰 침대로 삼아 누워 있는 엔지를 보고 있자니 미카는 이가 바득 갈리는 심정이었다.

“못 들은 척하지 마.”

이어 미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감은 엔지의 머리맡에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너, 말이야. 너, 엔지.”

지적이 계속되고 나서야 엔지가 잔뜩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한쪽 눈만 찡긋 떠 보였다.

아니, 사람이 이렇게나 무기력할 수 있나? 엔지는 종종 말릴 수 없을 정도로 과격해지거나, 건조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상대를 가볍게 눌러놓곤 했다. 그래서 지금처럼 무방비하고 느긋한 모습을 보일 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미카는 그 모습이 마치 배부른 맹수 같다고 생각했다.

“뭐가 문제야.”

“지금 중간고사야. 잊었어?”

“잊을 리가. 모범생께서 이렇게나 열심히신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엔지는 자신의 낮잠을 위한 편한 자세를 찾기 위해 의자 위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트는 중이었다.

“자꾸 느물거릴래?”

“하여간 아주 골고루 귀찮게 하네, 이놈의 학교. 애초에 다니질 말았어야 했는데.”

“허.”

이제 헛숨을 내쉴 기운도 없는 미카는, 문득 저러고 있는 엔지를 보며 불현듯 궁금증이 생겼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한 채로 미카는 엔지의 눈동자를 가만 응시했다. 그 시선엔 호기심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의문, 그리고 자의적으로 해석하자면 애정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애정이라니. 문득 엔지의 뒷목이 뜨끈해졌다.

“말을 해. 그렇게 노려보지 말고.”

엉뚱하게 까칠한 말이 먼저 튀어 나가고 만다.

“노려본 게 아니라, 그냥 쳐다본 거야. 너흰 대체 어디서 왔니?”

정말이지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저 눈을 보고 있자니 엔지는 절로 웃음이 났다.

아아. 지나치게 웃음이 헤퍼졌어. 왜지.

“궁금해하기엔 한참 늦었단 생각 안 해?”

“해. 그래서 지금이라도 알아보려고.”

“아서라. 알아봤자 네 신상에 좋을 거 하나 없으니까.”

엔지는 영 자리가 불편한지 결국 상체를 일으켜 세워 앉더니, 두 다리를 느른하게 뻗곤 허리를 비스듬히 등받이에 기댔다. 정말이지 도서관인지 제 방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내 신상을 왜 네가 걱정해?”

나름 논리적인 대꾸라 생각하며 미카가 엔지를 부추겼지만, 그는 설렁설렁 행동하는 것치곤 쉽게 어떤 것들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 이 같았다. 손쉽게 움직여줄 것처럼 굴지만 엔지는 좀처럼 쉬운 상대가 아니다.

엔지는 가만 지난번 미카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전에 그랬었지. 어쩔 수 없는 사정이란 게 있다고.”

“응.”

그랬었다. 어른들의 세계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돈이든 힘이든 무언가에 짓눌려 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근데 난 왜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단조로이 떨어지는 조용한 물음에 미카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소년들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왜 저마다의 사연 같은 건 없을 거라 쉽게 결론 내려버렸을까.

“나도 내 무능함에 화가 치밀었던 적 있었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압도당해서 멍청하게 당했던 적도 있었지. 네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끔찍함을 겪었단 뜻이야, 나도.”

어느 날 기리에게 물었었다.

마하바 초원을 떠나오며, 몇 번이나 도망치고 배신하려 했던 엔지를 기어코 다시 잡아 와 그 능선을 넘던 날이었다.

‘우린 왜 존재하는 거야.’

내내 궁금했었다.

나는 왜 태어났는지. 이토록이나 비루한 삶을 왜 살아야만 하는지.

삶의 의지가 그 누구보다 강한 기리라면, 어쩌면 해답을 가지고 있으리라. 그렇게 작게나마 희망하며 물었던 말이었다.

근원적이고 심오한 그 물음에도 기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어리고 다친 소년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된 자처럼 의연했다. 달빛을 받은 기리의 검은 눈동자엔 그 무엇도 믿지 않는 소년의 얼굴이 고스란히 비쳤다.

‘존재의 이유를 찾는 건 죽음의 이유를 찾는 것과 같아. 이유를 찾으려는 순간부터 지옥이지. 우린 그냥 태어났을 뿐이야.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인간들과 마찬가지라니.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은 말이다.

자신과 누나가 늑대인간임을 밀고한 것은 인간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다른 존재보다 대단히 고귀하다거나 좋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인간만큼은 싫었다. 하지만 기리는 그 무엇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평화로운 얼굴로 엔지에게 쉽게 고문을 가했다.

‘누가 더 열등하고 누가 더 가치 없는 삶인지 재고 따지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궤변이었다. 적어도 엔지의 귀에는.

‘그렇다고 아무 이유 없이 살아가기엔 버거운 삶이야. 나한테도 형제들한테도. 형도 이유 없이 살았다면 내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살진 않았겠지.’

‘난 늑대인간으로 태어났고, 그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뿐이야.’

그저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니. 살아내야 한다니.

이 긴긴 시간을 무슨 수로 버틴단 말인가. 엔지는 절망했다.

‘우린 그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거야. 그걸 지키기 위해 지금껏 버텨온 거고.’

그런 그의 어깨를 기리는 다 안다는 듯 다정히 토닥였다.

‘그것만이 진실이야, 엔지.’

엔지는 오랜만에 과거의 순간에 사로잡혔다.

창가로 스며드는 햇빛을 맞으며 나른하게 몸을 늘어뜨린 그는, 꼭 영화 속 한 장면을 곱씹듯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미카는 잠시 그 얼굴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뭐랄까.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았달까. 그것은 종종 칸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이었는데, 엔지 또한 정의 내릴 순 없지만 비슷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긴장시키는 사람. 말 한마디 없이도 보이지 않는 완력으로 저를 끌어당기는 사람. 칸도 전학 온 형제들도 자신들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까. 미카는 문득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엔지를 내려다봤다.

그러던 찰나, 미카에게로 정지되어 있던 엔지의 눈이 살짝 열린 도서관 입구 쪽으로 향했다. 복도에는 클럽 활동으로 바쁜 학생들이 오가며 정적을 깨부쉈다.

“넌 행복해?”

움직이는 사람들을 날카롭게 눈으로 좇으며 엔지가 물었다.

“갑자기?”

“인간으로 태어나 즐거워?”

“무슨 질문이 그래. 너도 똑같은 인간이면서.”

“……그렇지. 나도 인간이지.”

느리게 끄덕이는 그 표정에서는 씁쓸함이 묻어났다. 미카는 처음으로 엔지의 심연을 목격한 듯했다. 역시. 아주 가끔씩 칸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었던 그것과도 매우 닮아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너도 고단했겠다.”

따듯하게 내려앉은 미카의 말에 엔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미카는 며칠 전부터 읽었던 한 권의 책이 거의 끝나가는지 마지막 장을 손으로 넘기고 있었다.

“그래도 기특해.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니까.”

고단했겠다니. 기특하다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제 누나에게도, 형제에게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묵직하고 따듯한 말.

마음이 방향을 잃은 바람처럼 일렁였다.

엔지는 두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리며 쓸어내렸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미카에게 표정을 들킬세라 빠른 걸음으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그의 등 뒤에다 미카가 최대한의 데시벨로 소곤대듯 말했다.

“야, 너 책 안 보고 어디 가!”

“화장실.”

원래 같았음 대답도 안 했을 텐데. 저런 질문 따위야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지나쳤을 텐데.

아. 무언가 꼬여도 단단히 꼬이고 있었다. 그건 지금 복도의 건너편에 선 저 녀석의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왜 쥐새끼처럼 안 어울리게 엿듣고 그래?”

등 뒤로 열린 문을 닫으며 엔지가 제법 까칠한 목소리를 냈다. 이어 금기의 선을 긋기라도 하듯, 굳게 닫힌 문 앞을 등으로 가로막아 섰다.

한쪽 손에 농구공을 든 나자크는 한참 경기를 뛰었을 텐데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엿들은 게 아니라 들린 거야. 네 목소리가 비상식적으로 큰 거고.”

“뭐지. 답지 않게 대답이 기네.”

엔지가 이죽거리자 나자크는 손안에서 굴리던 농구공을 바닥에 튕겼다. 침묵 속에서 그렇게 반복하길 두어 번. 다시 위로 튀어 오르는 농구공을 한 손으로 잡아챈 나자크는 생각 정리가 끝난 듯 다시 운을 떼었다.

“칸 때문에 저 아일 흔드는 거라면…….”

“누가 칸 때문이래.”

기다렸단 듯 떨어지는 답에 나자크는 잠시 숨을 참았다. 날뛰는 맥박과 파도처럼 흐르는 혈액의 흐름을 막는 일이란 곤욕스러웠다.

왜지. 왜 미쳐 날뛰는 거야.

엔지는 나자크와의 거리를 좁혔다. 한 걸음씩 밀고 들어올 때마다 그들은 형제가 아니라 적이 된 기분이었다.

“왜. 갑자기 내가 막 걸리적거려? 방해돼?”

“엔지. 그 버릇 좀 고쳐.”

“무슨 버릇?”

“멋대로 넘겨짚는 거. 그거 꽤 기분 더럽거든.”

참고 견디는 게 장점인 나자크도 지금 이 순간엔 예외인 듯했다.

공격적으로 돌아오는 나자크의 말씨와 눈빛에 엔지는 언제나처럼 의중을 알 수 없는 휘어진 눈으로 웃어 보였다.

“역시. 난 네가 이럴 때 좋더라.”

찰나에 반사된 엔지의 안경 너머로 빛이 넘실거렸다.

느른한 오후의 햇살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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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레이빌로 이사 와 형제들과 함께 밖을 나온 적 없던 기리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형제들을 밖으로 불러냈다.

“사실 얼마 전에 경찰서에 다녀왔어.”

기리의 한마디에 동그랗게 모여 서 있던 형제들이 단숨에 그에게로 집중했다.

“경찰서? 거긴 왜?”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타헬이 기리를 채근했다.

“그레이빌에서 머물기로 한 이상 특별히 이상한 일은 없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으니까.”

“그래서?”

“최근에 실종자가 늘어나고 있대.”

“숲에서 실종된 사람 외에 더 있다고?”

나자크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그래. 길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시장에서, 영화관에서도. 장소 같은 건 상관없어. 그냥 거짓말처럼 증발해버리니까.”

“설마…….”

뱀파이어 놈들인가.

차마 입으로 뱉고 싶지 않아 나자크가 그 말을 삼켰다.

“일단 지금으로선 방법은 하나야.”

의미심장한 기리의 말에 형제들이 긴장했다.

“이제부턴 무조건 같이 다녀. 4인 1조로.”

3인 1조도 아니고, 4인 1조?

역시나. 언제나 그렇듯 기리가 선택한 방식은 손쉽게 분란을 조장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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