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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배척 (16/40)


16. 배척
2023.03.16.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상처는 금세 아물었다.

고작 하룻밤 만에 아물었다고 해서, 짓밟혔던 마음까지 아무는 건 아니었다.

나자크는 묵묵히 앞서 걸어가는 칸의 등을 조용히 바라봤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칸은 단정하고 넓은 등을 가진 소년이었다.

나자크가 지금껏 지켜본 칸은, 삶에 대한 동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처진 어깨로, 적당히 그럴듯한 눈빛으로 제 가족을 성의 없이 안심시키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꾸역꾸역 자리를 털고 끝없이 가라앉는 심연을 짓밟고 단번에 일어났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왜 하필 그레이빌이었을까. 왜 하필 너였을까.

수많은 인간 중, 수많은 도시 중. 왜 하필.

“괜찮아, 나자크.”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칸이 조곤하게 말했다.

등에선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것은 정의 내리기 까다로운 제법 날이 선 온기였는데, 칸은 그것이 자신에 대한 동정인지 경계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나자크의 시선에 화답하듯 묻지 않은 질문에 먼저 답을 내놓은 것이다.

“오해하지 마. 특별히 걱정한 건 아니니까.”

까칠하게 던져놓는 말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친절하지도 않은 나자크의 말이었다.

표정을 볼 수 없는 칸의 뒷모습은 그렇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앞서나가고 있었다.

주말을 무사히 넘기고 돌아온 학교의 분위기는 평소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물과 기름처럼 분리된 건 기본이고, 기묘한 적대감, 공격성과 두려움이 뒤섞인 기류.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그 기운을 숨기지 않는다는 건 필시 이 모든 걸 조종하는 압도적인 한 사람이 있단 증거였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쉬웠으나, 인간들의 유치한 알력싸움에 휘말려 귀찮은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바로 지금처럼.

복도를 걸어가는 엔지의 발 앞으로 노골적일 만큼 긴 발이 불쑥 튀어나왔다.

정성껏 발을 걸어준 건 고마우나, 거기에 홀랑 넘어갈 엔지가 아니다.

뒤꿈치를 들어 올려 가볍게 그 발을 뛰어넘곤, 외려 실수인 척 그 발등을 짓이기듯 밟아버리고는 엔지가 남학생의 귓가에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비켜. 문어 대가리.”

엔지의 차가운 일갈에 남학생의 얼굴이 구겨지고, 그 말소리를 들은 타헬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애써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며 타헬이 헛기침을 하더니, 한쪽 눈을 구긴 채 서 있는 엔지를 향해 반쯤 말리는 어투로 말했다.

“사람한테 문어라니. 너무해, 형.”

“가만히 지나가는데 발 거는 건 안 너무하고? 쯧. 나 상처받게.”

그 말에 살짝 떨어져 앞서가던 칸이 멈칫하며 돌아봤다. 칸의 표정이란, 어떻게 저렇게 얼굴색도 안 바뀌고 뻔뻔한 말을 할 수 있지? 하는 눈빛이었다.

“그렇게 안 봐도 알거든?”

엔지가 그렇지 않아도 구겨진 미간을 꿈틀이며, 표정으로 제게 반쯤 욕을 하는 칸에게 따졌다.

이런 대화가 언제부터 가능했지?

아직도 서로를 경계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칸은 몇몇 사건을 거치면서 그들과의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달라지고 있다고 느꼈다. 황량한 겨울을 지나, 봄꽃을 건너, 하늘이 푸르러지는 계절이 돼서야 겨우 만난 새로운 이들이었다.

칸은 겉으로는 무뚝뚝했으나 여관에 머무는 형제들이 싫지 않았다.

자신의 삶에 멋대로 침범해 들어온 이방인이었고 불편할 정도로 제 의중을 깊게 파고들었으나, 그에 대한 칸의 감정은 들켰다는 자각보다 기묘한 안심에 가까웠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그리 인간을 사랑하지 않음을, 올곧고 바보처럼 착하기만 한 부부의 어리기만 한 아들이 아님을 말이다.

어쩌면 며칠 전 일을 이후로, 칸은 깊은 제 속마음을 들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흐음, 더러워. 기분이 아주 더러워.”

엔지가 두 손을 겹쳐 뒷목에 대고는 상체를 느릿하게 뒤로 기울여 걸으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무슨 벌레라도 되나. 왜 숨고 난리야.”

“숨은 게 아니라 피한 거야.”

나자크가 단정한 어조로 틀린 사실을 정정했다.

하여간 융통성이라곤 없는 녀석. 그게 그거지. 엔지가 정돈된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헝클이며 잇소릴 냈다.

“그러니까 왜 피하냐고. 짜증 나게. 그냥 확 다 치워버리고 싶잖아.”

“진심 같으니까 입 좀 다물어, 엔지.”

“아. 미안하게 됐네.”

쿨하다 못해 서늘하게 거짓된 사과를 뻔뻔하게 내놓는 엔지에게서 나자크가 피로한 듯 시선을 거뒀다.

“지금 우리를 피하는 거야? 왜?”

타헬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순진하게 반 친구들에게 손까지 흔들어가며 인사해보지만 철저하게 외면받을 뿐이었다.

게다가 앞선 칸이 복도를 지날 때마다 학생들은 바이러스라도 옮을 듯 홍해처럼 갈라졌다.

테오는 학교에서 보이질 않았고, 다른 학생들의 경계는 가시처럼 아프게 돋아났다.

그 모습을 무심히 지켜보다 말고 엔지가 넌지시 칸의 의중을 살폈다.

“괜찮냐.”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의외로 의연한 칸의 대답에 엔지는 놀랐으면서도 별것 아닌 양 표정을 숨겼다.

“하기야. 네가 언제는 이런 거 신경이나 썼냐.”

“괜찮지만 신경은 쓸 거야. 앞으론.”

의외의 대답에 형제들의 시선이 칸에게로 쏠렸다.

“그렇게 당하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리셨어?”

얼굴까지 들이밀고서 반쯤 놀릴 준비가 되어 있는 엔지를 칸이 가볍게 무시했다.

이렇게 생각한 건, 평생 이런 방식의 삶을 지속시킬 순 없어서였다.

언제까지고 당하면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요한나와 시몬은 이 그레이빌을 떠날 생각조차 없다. 그러니 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에도 칸은 그들 곁에 머물러야 했다.

그건 곧 싫으나 좋으나 크록와 그의 아버지의 권력 아래 이 도시에서 살아가야 한단 뜻이었다. 나중 일을 준비한다면 어떤 쪽으로든 칸은 자신의 선택이 최대한 빨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모두의 시선에 다시 답이라도 내놓듯 칸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형제들을 향해 돌아보았다.

“더 이상 크록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을 뿐이야.”

휘둘리지 않겠다면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듯, 칸의 문장엔 힘이 단단히 붙어 있었다.

“그래. 이 세상은 약육강식이란 걸 좀 잊지 말아 달라고. 그 김에 우리도 좀 덜 귀찮게 하고.”

“강한 게 꼭 힘만은 아니지. 전부도 아니고.”

엔지에게 그 대답은 참으로 오묘하고 어려운 것이었다. 어느 쪽으로 해석해봐도 달리 명쾌한 의미가 읽히지 않는 말이었다.

 
뱀파이어는 피를 먹는다.

그 피를 먹는 자들이 제 가족도 형제도 모조리 몰살했다.

그저 힘의 차이였다.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했던 어린 늑대인간들이 무리 지어 살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인간의 피를 먹은 상급 뱀파이어 몇을 견뎌내지 못했다.

그때의 공포, 힘의 전복. 엔지는 그 순간을 영원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강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니. 강한 게 힘 말고 무엇이 더 있다고.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것을 확신하는 칸의 태도에 엔지는 속이 들끓었지만, 감정을 내리눌렀다.

그래. 녀석은 우리와 다르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불편한 학교 분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유일하게 이 그레이빌 세컨더리에서 그들을 피하지 않는 건 역시 미카만이 유일했다.

“대체 무슨 사고를 친 거야?”

미카의 목소리엔 평소와 다른 질책이 녹아 있다.

“사고라니?”

칸이 능숙하게 모른 척 반문하자 미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봤자 네가 날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미카의 눈은 꼭 그렇게 말하는 듯했으나 칸은 애써 모른 척 시선을 반대편으로 슬쩍 돌렸다.

“어, 이거 봐, 이거. 왜 내 눈 피해?”

“먼지가…….”

“칸, 어디서 수작질이야.”

미카가 어릴 때처럼 칸의 한쪽 볼을 잡아 아래로 쭉 늘어뜨렸다.

“아주 애를 잡네, 잡아.”

뜬금없이 엔지가 끼어들어 상황을 종결시킬 태도를 취하자 미카는 꽤 황당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칸과 껄끄러운 관계라 생각했는데 며칠 사이에 왜인지 가까워 보이기까지 하다니. 분명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었다.

“뭐야. 나 빼곤 다 아는 눈친데? 대체 무슨 일이야.”

미카가 칸을 놓아주곤 팔짱을 낀 채 불량한 자세로 서자, 어쩐지 엔지는 웃음이 났다. 그 표정을 능숙하게 숨기며 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일이 있긴 뭐가 있어. 이 학교 애들이 유별난 거지. 크록 그놈이 뭔 대수라고 설설 기기 바쁘잖아?”

“그래, 넌 안 기어도 돼서 좋겠네.”

미카의 입에서 기어코 까칠한 한 문장이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피해의식인지 부러움인지 저조차 구분하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뱉어버린 말을 담을 수 없어 미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뜻이야.”

좀처럼 인간들의 말에 궁금증을 품거나, 대화를 길게 이어가지 않는 엔지가 미카의 말을 잡고 늘어졌다. 그건 꼭 무슨 말이든 지금 당장 들어야겠다는 표정이었다.

“말 그대로야. 크록의 아버지는 이 도시의 유지고, 대부분 이곳 사람들이 다 그 밑에서 일을 하니까. 그건 우리 집도 마찬가지야. 어른들의 세계엔 어쩔 수 없는 사정이란 게 있거든.”

어쩐지 자조가 섞인 미카의 대답에 엔지의 녹갈색 눈이 그녀의 눈을 부드럽게 좇았다. 부드럽다니. 좀처럼 사람이든 형제에게든 잘 내보이지 않는 시선이었다.

할 말 하는 똑 부러진 구석이 있는 여자아이라 생각했기에, 그런 고충으로 괴로움을 겪을 거라곤 생각해본 적 없었다. 엔지는 어쩐지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미안함이란 감정이 낯설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느 곳 하나 비슷한 구석이 없는데 이상하게 미카를 볼 때면 누나가 떠올랐다. 아름답지만 시든 백합처럼 힘이 없던 그녀의 눈망울이.

“크록에게 꽤 적대적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학교의 누구나가 그래. 다만 나서서 싸우냐, 싸우지 않냐의 차이일 뿐이야.”

“어째서 싸우지 않는데?”

“배척당하고 싶지 않으니까.”

“……배척?”

미카는 천천히 등을 돌려, 무슨 바이러스라도 있는 양 멀리 흩어진 아이들을 살짝 훑었다.

“지금처럼 말이야.”

그녀의 말에 형제들의 눈이 동시에 그들의 반대편으로 쏠렸다.

꼭 무슨 선이라도 그어놓은 듯, 오염된 썩은 무언가를 보는 듯, 철저하게 보이지 않는 장벽을 만들어놓고 아이들은 멀찌감치 그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었다.

“나 참. 같잖아서.”

엔지는 헛웃음이 나오는 걸 겨우 막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진심이었다. 가뜩이나 꼴 보기 싫은 인간들 틈에서 겨우 성질 죽이고 살고 있는데, 합심해서 한다는 짓이 겨우 저 수준이라니.

칸은 이런 상황이 익숙해 보였고, 타헬은 하루아침에 제게서 다른 태도를 보이는 인간들의 방식이 그저 신기한 눈치였다.

그중에서도 나자크는 곰곰이 무슨 생각에 빠진 듯 가만 저쪽을 쳐다보더니, 이내 비스듬히 미카에게로 몸을 반쯤 돌려세웠다.

“배척이란 거 말야.”

급할 것 없이 생각을 곱씹듯 천천히 운을 띄우는 나자크게, 미카의 눈이 이끌리듯 그의 붉고 단정한 입술로 집중됐다.

“그거 무언가를 거부한다는 뜻 아냐?”

“맞아.”

미카가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어 나자크의 손가락이 몰려 있는 학생들 쪽을 가볍게 가리켰다.

“그럼 저쪽이 아니라 우리 쪽이 하는 건데.”

당연한 듯 말하는 나자크의 답에 엔지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좀처럼 잘 하지 않는 동의를 기꺼이 내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잠시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미카가 응? 하고 표정을 짓자 나자크가 제법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미소를 짓는다.

“내가, 하는 거라고. 배척.”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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