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본보기 (15/40)


15. 본보기
2023.03.09.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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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하게 돌아간 손목을 움켜쥐며 괴성을 지르는 사내가 나자크의 발밑에 쓰러졌다.

나자크가 그 옆으로 떨어진 날붙이를 발끝으로 툭 쳐냈다.

자신들에겐 애들 장난감도 되지 못하는 걸 들고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뭐야. 죽이는 건 안 되고 부러뜨리는 건 돼?”

엔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몸소 새로운 방법을 실천한 나자크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규칙이 있으면 진작을 말을 해주든가. 괜히 헛고생만 했잖아. 엔지가 투덜거리며 제 앞에 남은 사내들의 머릿수를 눈으로 가늠했다.

“계속할 거야? 크록.”

나자크는 쓰러진 사내를 지나쳐 사뿐히 크록 앞에 섰다.

보통 상대가 아닌 걸 깨달은 듯 나머지 사내들이 공격 태세를 갖췄다. 나자크는 그런 자들을 느릿하게 한 번 훑었다.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고작 인간이다.

나자크는 잠시 격정적으로 끓어오른 제 감정을 누르고 이성을 끄집어냈다.

“우린 그냥 조용히 여관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야. 이만 보내줄래?”

“조용히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저런 짓을 하면 쓰나.”

크록이 괴로워하며 손목을 부여잡은 사내를 보며 비실 웃었다. 그렇게 부러 여유를 부리고 있었지만 크록은 명백히 긴장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예민한 변화를 나자크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나자크는 피로한 듯 뒷목을 살짝 쓸며 아래로 시선을 떨궜다.

“본보기. 뭐 그 정도면 설명이 될까.”

“아아. 너도 참 내 취향이야, 나자크.”

“아쉽네. 난 남자는 관심 없거든.”

“그 선하고 다정한 얼굴 뒤에 얼마나 엄청난 걸 숨기고 있을지. 아주 찢어발겨서 구경하고 싶을 정도거든.”

크록은 진심이었다. 칸도 나자크도, 그들은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크록의 모든 기민한 감각이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협상 결렬이네.”

나자크가 느긋한 자태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의 말에 크록이 고른 치아를 내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기묘한 웃음이었다.

이어 크록이 한쪽에 쓰러진 칸을 바라보았다.

“가져갈 수 있음 가져가 봐.”

꼭 선심이라도 쓰듯 기껍게 덫을 내어준다.

하지만 그 덫에 걸리는 것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 엔지가 먼저 제 앞을 가로막은 사내 셋 중 하나의 안면을 짧고 굵게 강타했다.

힘 조절을 한다고 했는데 맞자마자 코피를 흘리며 뒤로 기절한 남자를 보며 외려 당황한 건 엔지였다.

“뭐야. 너무 셌나?”

그 반응에 나자크가 쯧, 소리를 내며 고개를 내저었다.

“타헬, 넌 가서 칸부터 챙겨.”

나자크가 드디어 할 만한 일을 건네주자, 한쪽에서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서 있던 타헬이 언제 그랬냐는 듯 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자크는 이어 타헬이 쉽게 지나갈 수 있게 길목을 가로막은 사내 하나의 경동맥을 가볍게 손가락 끝으로 쳐냈다. 급소를 맞은 사내는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그대로 흙물에 상체가 처박혔다.

“자. 이제 지나가.”

“고마워, 형!”

타헬이 웃으며 그 옆을 지나치자 크록의 표정은 점차 심각해지고 굳어졌다. 이건 자신이 상상하고 그려왔던 상황이 아니었다.

“뭐해! 이 새끼들 빨리 치우라고! 돈을 받았으면 일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수단 방법 가리지 마! 다 죽여버리라고, 다!”

크록이 아예 우산까지 집어 던지며 격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용하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형제들 앞을 막아서는 사내들의 끝은 처참하기만 했다.

모든 것은 간결하고 조용했다.

빠른 반사신경으로 날아오는 주먹을 피해 급소에 제 주먹을 꽂고, 가볍게 찬 정강이에 금이 가고, 무기를 휘두르는 손가락이 뒤로 꺾여 부러지고, 크게 휘두르던 팔은 뒤로 빠져 덜렁거렸다.

그런 무자비한 일들이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 뒤엉키는 소란스러움은 없었다.

외려 최대한 고칠 수 있는 부위만을 고르느라 그게 더 애를 먹는 참이었다.

“아이 씨, 긁혔잖아.”

엔지가 눈가를 찌푸리며 아주 살짝 긁힌 제 손등을 보며 까칠하게 말했다.

“형! 칸 형! 죽었어?”

타헬이 묶인 칸의 손발을 풀고, 꼼짝도 하지 않는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죽긴 누가 죽어. 그만 흔들어, 타헬.”

나자크가 마지막으로 저를 막고 있던 자의 머리통을 잡아 한쪽 나무에 내다 꽂는 걸 마지막으로 칸의 앞에 걸어와 서며 타헬을 말렸다. 상처야 낫는다 해도 지금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일어날 수 있지.”

이렇게 직접 찾으러 와 구할 땐 언제고 음성은 고저 없이 차분하기만 하다.

칸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상체를 세우고 등을 기대앉았다.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어떻게 몰라. 숲에 널 두고 온 게 우린데.”

나자크가 칸의 상처를 살피다 말고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그때 엔지가 젖은 옷을 툭툭 털어내며 망설임 없이 칸의 옆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별안간 말도 안 되는 엔지의 행동에 타헬과 나자크가 살짝 당황한 듯 그 모습을 지켜봤다.

엔지는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어 엔지는 제 목에 칸의 팔을 걸어 단번에 일으켜 세우며 부러 냉정한 투로 말했다.

“하여간 귀찮은 자식.”

“윽-”

움직이자 통증이 밀려오는 것인지 칸이 제 옆구리를 틀어쥐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비상할 정도로 맷집이 좋긴 했으나, 상처가 빨리 낫는 것과 느끼는 고통은 완전히 별개였다.

그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엔지는 모르는 척 비틀거리는 칸의 팔을 잡아 제 몸에 고정시켰다.

“엄살피우지 마. 왜, 이번엔 작정하고 맞아서 증명하려고 했냐? 네가 진짜 좋은 놈이라고? 미리 말해두는데 넌 좋은 놈이 아니라 그냥 멍청한 놈이야. 모두가 널 그렇게 부르듯이 덩치만 큰 바보 새끼라고.”

피식. 숨도 안 쉬고 이어지는 엔지의 일갈에 칸이 웃고 만다.

“이제 미치기까지 했냐. 죄다 터져가지고 웃음이 나와?”

“괜찮아. 어차피 내일이면 다 나으니까.”

칸은 더 이상 숨길 생각이 없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고 담백하게 대답했다.

“누가 뭐래? 지금 아프니까 그렇지.”

엔지의 입에서 듣기 힘든 답이 나오자 칸이 걷다 말고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어정쩡한 자세로 같이 멈춰버린 엔지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뭘 봐.”

“……아니. 아니야.”

“나 얘 데리고 먼저 갈 테니까 뒷정리하고 와.”

엔지가 칸을 부축하며 나자크와 타헬을 스쳐 지나갔다. 엔지는 보지 못했지만 나자크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느린 대답을 했다.

나자크는 겨우 땅에 발을 붙이고 서 있는 크록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어 나자크가 점점 멎어가는 빗줄기를 만지곤 어두컴컴한 주변을 느긋하게 살폈다.

“자정 안 됐지?”

30분은커녕 그 절반도 되지 않아 끝난 일이었다.

크록은 자신이 눈앞에서 뭘 목격했는지조차 자각하기 힘들었다. 확실한 건 그의 몸은 뻣뻣하게 굳었고, 지난번 옥상에서 느꼈던 그 위화감 그 이상의 것을 느끼고 있었다.

“……뭐야. 너희들 도대체…… 정체가 뭐야?”

“뭐긴 뭐야.”

하얗게 질려가는 크록의 눈동자를 보며 나자크가 선하게 웃었다.

“전학생이지.”

찢어발겨 보고 싶다던 그 엄청난 얼굴은 결코 보지 못한 채 크록이 결국 무너져내렸다.

“좋은 본보기가 됐길 바랄게.”

젖은 흙길에 주저앉은 그를 나자크가 고요히 내려다보았다.

* *

햇빛이 그림자를 조각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쏟아졌던 비는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안개 없이 맑은 날이었다.

“기리, 괜찮으면 커피 한잔 마시고 가!”

저 멀리 제복을 입은 경찰이 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기리는 특유의 사교성으로 주변 곳곳에 지인들을 만들고 있었다.

덩치가 좋고 웃음이 잦은 50대 후반의 리암은 오후 여섯 시가 되면 꼭 밖을 나와 주변을 살피는 버릇이 있는 자였다. 기리의 목적지는 처음부터 그곳이었음에도 그는 넉살 좋은 얼굴로 경찰서 안으로 들어섰다.

“혹시 자네 결혼했어?”

“네. 그럼요.”

잠시 멈칫하며 어두워졌던 기리가 능숙하게 웃으며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에 걸린 실반지를 내보였다. 아내와 함께 나눠 꼈던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링이었다.

“그럼 그렇지! 멋지고 잘난 놈들은 죄다 채간 뒤라니까.”

“그나저나,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세요?”

“우리 딸 어떤가 하고, 혼자 기대 좀 했지! 허허!”

리암의 너털웃음에 화답하듯 장난스럽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

“아저씨도 참. 딸 의견도 물어보셨어야죠.”

“그럼 와이프는 어디에서 지내? 여기에 이사 오고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었던 것 같은데.”

“아…… 실은 제 아내는 세상에 없어요. 몇 년 전에 죽었거든요.”

“아, 이거, 내가 실수를. 사람 참.”

리암이 당황해 안절부절못하며 땀이 나는지 손수건을 꺼내 벗겨진 제 이마를 황급히 닦아냈다.

“미안해 마세요. 미안해하실 일도 아닌데요, 뭘.”

오랜만에 아내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낸 기리는 문득 그 얼굴이 떠올랐다. 무슨 일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더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떻게 웃었는지, 어떻게 울었는지, 자꾸만 그 기억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 사실은 기억하며 살아야 하는 누군가에겐 고마우면서도 또 한편으론 절망적인 일이었다.

‘기리, 넌 그게 문제야. 넌 예전부터 기억력이 너무 좋다니까? 내가 한 실수도 모조리 기억하고. 난 억울하다구!’

빨간 스웨터를 입은 나의 아내, 해일.

그녀가 팔랑거리며 초원을 뛰어 그 수풀 속으로 제 몸을 던지곤 하늘을 올려다본다.

‘내 기억력이 나쁜 게 아니라, 네가 지나치게 좋은 거야.’

그 옆자릴 차지하며 기리가 헝클어진 해일의 머리칼을 귀 뒤로 다정히 넘겨준다.

잠시 달콤한 기억에 잠겼다 깨어난 기리가 다시금 자신의 목적을 상기했다.

“그나저나 요즘 일은 어떠세요?”

“뭐 항상 똑같지. 어쨌든 우리 도시야 팔로하이드 씨께서 돌봐주고 있기도 하고.”

“팔로하이드 씨요?”

“아아. 자네도 알 텐데. 형제들이 다닌다는 학교에 크록도 다닐 테니까.”

“아. 그 친구의 아버지군요.”

엔지에게 듣기론 크록은 그저 ‘하찮은 인간’에 불과했으나 이 도시의 사람들에겐 그저 하찮은 존재가 아닌 듯했다.

“그래. 그분 덕분에 우리가 먹고사는 거 아니겠나.”

생각보다 팔로하이드의 손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게다가 공권력까지 통제하는 걸 보니 살펴둬서 나쁜 것이 없어 보였다.

“다행이네요. 큰일은 없으니까요.”

기리가 능숙하게 미소지으며 좀 더 대화를 끌었다.

“뭐…… 큰일이랄지. 사실 요즘 주민 몇이 갑자기 사라져서 우리도 주시하는 중이야.”

“……사라져요?”

비슷한 양상이었다.

마하바 초원에서 그 수많은 형제를 잃고 또 잃었을 때처럼.

시작은 늘 그렇듯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자네만 알고 있어. 글쎄, 땅으로 꺼지는지 솟는지 증거도 목격자도 없어. 워낙 깨끗해서 가출을 했거나 도시를 떠났거나 그렇게 여겼는데. 아무래도 이상해. 내 촉이 그래. 이래 봬도 내가 경찰 생활만 30년 아닌가.”

“그렇군요.”

턱에 힘을 준 기리가 요동치는 제 감각을 억눌렀다.

맑았던 하늘이 탁해지는 듯했다.

무언가가 오고 있다.

형체도 그림자조차도 없는 무언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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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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