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늑대의 발톱 (14/40)


14. 늑대의 발톱
2023.03.02.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걔 소식을 왜 나한테 물어.”

무슨 이유에서인지 미묘하게 신경질이 난 엔지가 노크도 없이 제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나자크에게 까칠하게 반응했다.

침대에 등을 기댄 채 시선을 멀리 둔 엔지를 가만 바라보다 말고, 나자크가 그의 방 한쪽에 있는 의자를 끌어와 그의 침대 옆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앉긴 왜 앉아? 너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냐.”

“어, 싫어해. 그러니까 대답해.”

엔지의 공격적인 태도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나자크가 의자에 등을 기대곤 무심히 요구했다.

“엔지, 네가 칸을 마지막으로 만난 거 다 알아.”

“알 게 뭐야. 그 멍청한 놈.”

엔지의 까칠한 답에 나자크가 노곤한 듯 이마를 짚었다. 오랜만에 힘을 쓴 것도 그렇고, 칸과 엔지를 동시에 신경 쓰느라 감정적 소모를 한 것도 컸다. 하지만 나자크는 반드시 지금 이 순간에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칸이 잘못될 리는 없겠지만 여관 식구들이 불안해해. 타헬도 마찬가지고.”

또 그놈의 타헬이지. 가끔 엔지는 자신이 그들의 형제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영원히 섞이지 못한 채 공기 중을 떠다니는 이물질처럼, 쓸모없이 썩어가는 부산물처럼.

“요한나 아주머니가 걱정하셔. 칸이 돌아오기 전까진 잠들지 못하실 거야.”

“그러니까. 그 불안을 왜 내가 해소시켜줘야 하냐고.”

엔지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무엇 하나 제게 이득 될 것이 없는데, 늘 내어주기만 하는 기리도 나자크도 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늘 외로웠다. 언제나 자신이 악역이었음을 알기에 먼저 그들을 버리려 했으나, 늘 기리의 손에 붙잡혔고, 또 붙잡히고 싶었다.

엔지의 눈에 그저 형제들은 순진한 늑대인간에 불과했다. 누가 자신의 뒤통수를 치는지, 이용하려 하는지 계산하지 않고 모두를 대했다. 그건 처음부터 형제들에게 사기를 치려 했던 지난날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함께하면 할수록 한없이 초라해지는 마음을 과연 나자크가 알까.

그래서 칸이 궁금했을 뿐이다. 저만큼이나 인간에 대한 기대가 아무것도 없다는 듯 건조하고 헛헛하기만 한 그 눈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칸도 자신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지금은?

칸은 나와 같은 동류인가. 아니면 정반대에 선 자인가.

자신에게 온갖 혼란을 가져다주는 이상한 인간 따위. 엔지는 연습하듯 마음에 선을 긋고 있었다.

“우린 인간에게 책임이 있어. 우린 모두 같은 세계, 같은 땅에서 살고 있지. 그러니 함께 살아가는 이곳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란 게 있다고.”

그것은 흔히 인간들이 말하는 시민의식과도 결을 같이하는 말이었다. 기리가 그랬듯 나자크 또한 작고도 광활한 이 땅에 태어나, 누군가로부터 배우기도 전에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이들 중에서도 엔지가 봐온 나자크는 충직한 성품을 가졌다. 얼굴도 모르는 남들에게 대단히 이타적이지도 않았지만, 받은 것에 모른 척할 수 있는 자도 못되었다.

그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엔지는 물러설 수 없는 독기가 일었다.

“그럼 그 죽여버려도 시원찮은 뱀파이어 놈들은? 그 새끼들은 인간들한테 허락 맡고 인간 죽여? 무슨 책임을 지는데, 그놈들이! 필요한 것만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멋대로 파괴하고, 철저하게 짓밟아 놓는 놈들인데?”

“그러니까 증오하는 거야. 그러니까, 우린 달라야 하고.”

엔지처럼 나자크는 흥분하지 않았다. 그의 문장엔 분노도 노여움도 담겨 있지 않았으나 짧은 대답 안엔 과거의 역사가 모조리 함축되어 있었다.

그렇다. 나자크 역시 뱀파이어를 증오한다. 하지만 증오의 마음만으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증오 말곤 표현할 길이 없는 엔지의 마음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같은 늑대의 피를 이어받은 후예들이었으니까.

그러니 폭풍처럼 쏟아내는 저 말들을 그저 맞고 있다.

“힘이 있다고 사람을 다 구하고 살아야 해? 맘대로 떠밀려서 원하지도 않는 책임을 다하라고? 그건 대체 누가 정해주는 건데. 그럼 차라리 영웅이 되지 그랬어.”

“비난은 쉬워, 엔지. 화를 내는 것도, 욕을 하는 것도 다 쉽지. 근데 참고, 견디고, 지키는 건 어려워. 그래서 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거고.”

“가르치려 들지 마. 짜증 나.”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벌써 잊었어? 아무도 우릴 돕지 않아서야. 오히려 이용당하고 버려졌지. 그 끔찍했던 짓을 우리 스스로 할 셈이야?”

나자크는 그 누구보다 엔지의 폐부를 잘 알고 있다. 그의 마음속 가장 약한 구석이 어디인지도.

그러니 가족이다. 누구보다 치명적인 약점을 가장 잘 알고 있기에, 말 한마디로 그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었기에. 그러니 엔지는 어쩌지 못하고 나자크의 가족이다.

지금쯤 엔지는 그 산속에서 끝끝내 헤어지고야 말았던 제 누나를 떠올리고 있을 터였다. 그 지옥 같은 마음을 알기에 나자크는 조용히 침묵했다.

엔지는 길게 한숨을 뱉었다. 논쟁이 길어져봤자 먼저 지치고 나가떨어지는 건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 될 게 뻔했다.

“너도 어차피 알잖아. 칸, 그 녀석이 힘을 숨기고 있다는 거.”

“그래. 알아.”

처음부터 느낄 수 있었다. 칸에게서 풍기는 위화감의 정체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아는데 굳이 찾으러 가겠다고? 그럼 처음부터 내 제안에 응하지 말았어야지. 거기 칸을 두고 오겠다고 결정한 것도 너야.”

“알아. 그래서 후회 중이야.”

“후회한다고?”

엔지의 반문에 나자크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곧 아랫입술을 깨물곤 느릿하게 손을 말아쥐었다.

“그 녀석이 반항도 않고 당하고 있을 거란 것도 아니까.”

“역시, 넌 정말 재수 없는 놈이야. 나자크.”

“그것도 알아.”

그 말을 기껍게 들으며 나자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의 대화는 시간만 낭비할 뿐이었다.

“잘 들어, 엔지. 우리 늑대인간들은 필요 이상으로 사냥하지 않아. 필요 이상으로 먹지도, 자지도 않지. 피와 욕망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는 뱀파이어 따위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단 얘기야. 알아들어?”

그러니 이제 대답해.

“어딨어, 칸?”

* *

퍽- 퍼억-!

소용돌이치는 바깥 소음에도 불구하고 칸의 육체에 가해지는 잔인한 폭격은 여과 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검은 세단 뒷좌석에 앉은 채, 창밖으로 칸을 내다보며 크록은 제 옷에 튄 물기를 툭툭 털어냈다.

역시, 칸은 신음 한 번 내질 않는 독종 중의 독종이었다.

차라리 제 가랑이 밑으로 기어와 살려달라 애원했다면 이미 오래전 이 유치하고 잔인한 괴롭힘은 끝났을지도 모른다.

빗속에서 두 손과 발이 묶인 채 밟히고 또 밟히기를 반복하며 칸은 조용히 지쳐갔다. 사내의 발길질은 꽤 버틸 만했지만 칸의 머릿속엔 온통 시몬과 요한나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한 번도 연락 없이 이 늦은 시간까지 들어가지 않은 적 없던 그였기에, 지금쯤 잔뜩 걱정하고 있을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라 그 사실이 더 괴로운 칸이었다.

“자. 그만 그만.”

차에서 여유롭게 내린 크록이 기침을 하며 피를 뱉는 칸의 머리맡에 다가와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 앉았다.

“괜찮아? 버틸 만해?”

크록은 꼭 응원이라도 하듯 칸의 어깨를 툭 쳐주고는 손수건을 꺼내 그 손을 닦아냈다.

“그나저나 칸, 내가 아주 재밌는 얘길 하나 들었는데 말야.”

정말 즐겁기라도 한 듯 크록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 상처가 아주 빨리 아문다던데. 꼭 인간이 ‘아닌’ 것처럼.”

크록의 말끝에, 그의 뒤에 선 사내의 손에 쥔 날카롭고 서슬 퍼런 날붙이가 어둠에 반짝였다.

“어때. 오늘 이 자리에서 시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크록은 선을 잃었다.

그는 선함도, 넘지 말아야 할 선도, 더 이상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칸은 흙바닥에 누운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천장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는 멎을 기색이 없었다.

한편, 후각이 뛰어난 엔지의 뒤를 나자크와 타헬이 쫓았다.

“빌어먹을. 비 때문에 냄새가 희미해.”

칸의 냄새를 좇고 있지만 그 향기가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게다가 아주 기분이 더럽게도 바람 곳곳에 흐릿한 피 냄새가 섞여 들어오는 것 같기도 하다.

초여름이라 해도, 곧 자정을 넘길 시간인 데다 급격히 온도가 떨어져 밖은 제법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몸에 열이 펄펄 끓는 늑대인간들이니 문제 될 건 없었지만, 인간인 칸의 얘기라면 다를지도 몰랐다. 게다가 엔지는 이 야밤에 빗길을 뚫고 가는 이 상황 자체가 몹시 불만인 와중이었다.

“어? 잠깐만. 형, 저쪽에서 소리 나는 것 같은데?”

타헬이 갈라지는 길목의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들의 걸음은 인간이 쫓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고 빨랐다. 순식간에 그 길 끝에 다다른 세 사람이 같은 광경을 동시에 목도했다.

“참…… 이래서 인간은 역겹다니까.”

빗속에서 엔지의 밝은 눈동자가 서릿발처럼 차갑게 빛났다.

가라앉은 녹갈색 머리칼은 물에 젖어 칠흑처럼 까맣게만 보였다. 엔지는 물기가 맺힌 안경을 대충 손끝으로 훔쳐내고는 짧게 혀를 찼다.

어디서 뭐 하고 자빠졌나 했더니, 결국 또 저 꼴이다. 차라리 저럴 거면 구하러 가질 말든가.

칸에게 쏟아냈던 비난이 마치 제게 화살이 되어 돌아와 꽂힌 듯 심장이 아릿했다.

“결정해, 나자크.”

어딘가 식어 있는 엔지의 말에 나자크가 고요히 그를 바라봤다.

“기리 형은 없고. 그럼 네가 우리 리더잖아. 저 인간들, 처리해 말아?”

처음이었다. 엔지의 입에서 나자크의 존재를 인정하는 말은.

나자크는 잠시 고심하는가 싶더니 꽤 진지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처리한다는 건 죽인단 뜻이야?”

그가 거침없이 말을 뱉자 엔지가 고개를 내저으며 허, 숨을 흘렸다. 방금 전까지 인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지껄였던 녀석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저게.

“살벌한 놈. 우리가 뭐 뱀파이어 새끼들이냐? 쓸데없이 인간들 죽이게?”

“아.”

아는 무슨 아야?

아까 실컷 자신에게 훈수질을 할 땐 언제고 또 이럴 땐 모른 척이다. 미운 놈 같으니.

“뭐가 문제야! 이참에 늑대의 발톱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자고.”

타헬이 손목을 우드득 꺾으며 귀여운 얼굴로 비장하게 말하자 외려 엔지는 어이없는 웃음이 났다. 뭘 알고나 저러는 건지.

“근데 형, 나 힘 조절 힘든데 실수로 죽이면 어떡해?”

“너도 나자크 닮아가냐? 됐으니까 넌 빠져.”

“왜! 나도 도울래!”

“뭐 봉사활동 나왔냐? 돕긴 뭘 도와.”

엔지가 제게 가까이 들이미는 타헬의 얼굴을 한쪽에 치워버리고는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낯선 인기척에 먼저 그들을 알아차린 건 바닥에 뻗어 있는 칸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나자크는 사내의 손에 쥐여진 날붙이를 보았다.

“인간들은 참 이해할 수가 없어.”

빗소리가 나자크의 잔잔한 음성을 삼켰다.

무엇을 위해 저런 쓸모없는 것들을 휘두르며 사는 걸까. 고작 수명이 백 년도 되지 않는 한낱 미물 같은 자들이. 무엇을 차지하겠다고, 무엇을 더 가지겠다고, 저런 멍청한 선택들을 하는 걸까.

그래. 엔지는 나자크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너희들은 지독히도 아름답지만, 또 지독히도 역겹다.

“손님들이 찾아왔네……?”

비스듬히 어깨를 돌린 크록이 꼭 반가운 듯 히죽 웃었다.

“뭘 쪼개, 새꺄.”

엔지가 젖은 머리를 대충 털어내며 느슨하게 대답하는가 싶더니, 이내 거침없이 칸이 쓰러진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칸의 머리맡에 다다르기도 전에 사내 셋이 엔지를 둘러싸고 그 앞길을 막아섰다.

“뭐야. 이 덩치들은.”

고개를 가볍게 옆으로 젖힌 엔지가 눈으로 대충 사람 수를 가늠했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뚱하게 선 타헬과, 크록과 대치하고 있는 나자크를 바라봤다.

“자정 전엔 돌아가자고.”

툭 던지듯 떨어지는 엔지의 말에 나자크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정까지 앞으로 30분.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크록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는 때였다.

빠각-

날붙이를 쥔 사내의 손목이 반대로 돌아가 꺾였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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