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위선자 (13/40)


13. 위선자
2023.02.23.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지면 위로 칼날처럼 비가 내리꽂혔다.

우기가 잦은 도시에선 이상할 것 없이 흘러가는 하루였다.

‘넌 그 순간을 기다렸을 뿐이야. 칸.’

질퍽거리는 숲의 땅을 밟으며 칸은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벌을 주고 싶었다고 내가? 누구에게?

테오에게? 아니면 크록에게? 그것도 아니면 인간 그 모두에게?

거센 비바람이 흙을 휩쓸고 내려와 곳곳에 흙무덤을 만들었다. 칸은 그것들을 밟고 또 밟으며 테오가 버려졌던 그 장소로 가고 있었다.

테오와 그 무리의 몰골은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저들끼리 내분이 생겨 다툰 모양인지 얼굴 곳곳이 찢어지고 피멍이 들어 있었고, 체온이 떨어진 듯 몸을 웅크린 채 덜덜 떨면서 잔뜩 공포에 질려 있었다.

“……칸?”

반쯤 울음과 원망이 섞인 테오의 부름에 칸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정말 내가 이 몰골을 보고 싶었다고?

저렇게 두려움에 떨며, 자신을 구세주인 양 바라보며 애타게 부르는 저 목소릴 듣고 싶었다고? 그래서 벌을 준 거라고?

칸이 쏟아지는 빗물에 젖은 제 얼굴을 두 손으로 쓸었다. 무엇이 진짜 자신의 마음인지 마주 볼 용기가 도저히 나질 않았다.

다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 참고 지금껏 견뎌온 것도 잘한 일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견뎌왔다.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의 다짐을 기만해버린 칸은 문득 제 자신이 두려워졌다.

이제 와 테오를 구원해주며 선한 척 위선자라도 될 생각이었나.

“왜 이제야 온 거야! 왜! 이 빌어먹을 숲에서 내가 얼마나……!”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을 흘리며 테오가 칸에게로 달려들어 힘껏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힘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무력한 접촉이었으나 칸은 그저 가만히 당해낼 뿐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어! 뭘! 힘을 가졌는데 쓰지 않는 것들이 멍청한 거야! 그게 더 나쁜 거라고!”

테오가 이를 바득 갈며 울분을 쏟아냈다.

가난하게 자라 내내 폭력적인 가정환경에 노출되어 살아온 테오는 언제고 강력한 힘 앞에 굴복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여지없이 크록을 만났을 때도 발휘되었고,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칸은 제 목을 쥔 테오의 손등을 한 손으로 살짝 감쌌다.

“언제까지 그렇게 변명만 늘어놓을 거야.”

“……뭐?”

“네가 날 해치려 했다는 건 사실이고, 그런 널 내가 구하러 온 것도 사실이야. 약한 소리 할 거면 여기서 혼자 해. 난 나갈 테니까.”

칸이 테오의 손목을 비틀어 한 번에 떼어내자 바닥으로 나자빠진 테오가 얼빠진 얼굴을 했다. 그 표정을 보지도 않고 칸이 가차 없이 돌아서자 테오가 다급히 손을 뻗었다.

“자, 잠깐! 잠깐만!”

다시 돌아본 칸의 눈동자에 동정심 같은 건 읽히지 않았다.

“나도……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나도 피해자라고! 나라고 좋아서 이 짓거릴 했을 거 같아? 시킨 대로 하지 않았다면 내가 당했을 거라고!”

테오의 말에 칸은 허망한 웃음이 흘렀다. 그조차도 거센 비바람에 묻혀버렸지만.

“피해자? 포장하지 마. 넌 그냥 너보다 약한 사람들 앞에서만 힘이 솟는 추악한 인간일 뿐이야. 크록이란 그늘 밑에 숨어서 너도 똑같이 즐겼던 것뿐이라고.”

그래. 나도 어쩌면 그런 마음이었을지 몰라.

스스로 합리화하며 너의 고통을 즐겼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정신 차려. 더 이상은 이렇게 살지 마.”

꼭 자신을 비난하듯 칸이 스스로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칸은 젖어서 무거워진 몸의 무게를 느끼며 물기에 가라앉은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핸드폰은 이미 먹통이고, 테오와 그 무리까지 데리고 이 숲에서 다시 나가려면 족히 30분은 더 걸어야 했다.

“살고 싶으면 따라와. 더는 봐주지 않을 거니까.”

칸은 늑대인간 형제들에게 그러했듯 똑같이 앞머리에 서서 곳곳에 우거진 나뭇가지들을 쳐내며 길을 트고 있었다.

테오와 그 무리의 소년들은 힘이 빠지고 점점 배가 고파왔지만 그조차도 어둠의 공포는 이기지 못했기에 서로가 서로의 등을 보며 군말 없이 걸음을 움직였다.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방향조차 알지 못하는 소년들은 그저 숨을 허덕였고, 반쯤은 굳어버린 허벅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조, 조금만 천천히……! 칸!”

칸의 걸음이 이토록이나 빨랐던가.

생각해보면 자신의 손목을 비틀어 떨쳐냈을 때도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악력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 숲길을 어떻게 아는 거지.

테오는 모든 것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어쩌면 처음부터 자신이 알고 있던 칸이 진짜 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들이 속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테오의 애타는 부름에도 칸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 성큼성큼 더 멀어져만 갔다.

그렇게 얼마를 더 걸었을까. 드디어 숲의 길 끝이 보이자, 소년들이 무릎으로 기다시피 빠져나와 그대로 바닥에 기절하듯 뻗었다.

“드디어 반가운 얼굴을 보네?”

칸은 코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휙 몸을 돌렸다.

커다란 우산을 한쪽 어깨에 툭 걸친 채 건조한 미소를 띠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크록이었다.

크록의 뒤엔 검은 우비를 뒤집어쓴 열댓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그를 엄호하고 있었다. 크록은 발을 떼 바닥에 뻗은 테오와 그 무리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콰직! 크록의 구둣발이 테오의 손바닥을 그대로 밟아 짓이겼다.

“윽! 아악!”

“일이 어떻게 돌아가나 했더니 역시나네. 또 이렇게 날 실망시켰어, 테오.”

그 발을 밟으면서도 크록의 시선은 아무 반응 없이 그저 칸을 향해 있다.

“크, 크록. 그게 아니라……!”

“시끄러워. 고작 한 명 처리하라고 보냈더니, 되려 도움을 받아? 이걸 웃어야 해, 말아야 해? 응?”

크록은 차례대로 테오의 손등, 머리통, 등과 허벅지를 밟고 칸의 바로 앞까지 내려왔다. 한쪽에 무게가 실릴 때마다 테오의 몸은 흙바닥으로 더 깊숙이 처박혔다.

“흐음.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소문?”

칸이 살짝 눈가를 구겼다. 소문이라면 지긋지긋했지만 뭐 또 다를 게 있을까 싶었다.

“네가 라일락 숲길을 안다는 것 말이야. 쓸모라곤 없을 줄 알았더니. 이래서 죄다 너한테 귀신이 들렸느니, 악마가 들렸느니 수군대는 거야, 칸.”

“네가 그렇게 수군대는 거겠지.”

“뭐?”

평소와 달리 적의를 숨길 기색조차 없는 칸의 대답에 크록의 손이 느릿하게 다가와 그의 얼굴을 잡는다. 곧이어 그 손에 강한 힘을 실으며 크록이 칸의 귓가에 제 입술을 가져갔다.

“잠깐 안 본 새 아주 건방져졌네? 주제도 모르고.”

“그냥 네가 할 일을 하고 가, 크록.”

“내가 무슨 일을 할 줄 알고?”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너의 취향을.

크록이 비릿하게 웃자 칸의 눈이 그의 뒤에 모여 있는 사내들에게로 향했다. 꼭 뻔하지, 하는 지루한 표정을 하고 있는 칸의 얼굴을 크록은 마음껏 짓밟고 싶어졌다.

칸은 늘 이런 식이었다. 모질게 당하면서도 그의 눈빛엔 굴복이라는 것이 없었다. 제 아비인 팔로하이드에게 매일같이 짓밟히는 자신의 눈동자엔 언제나 공포와 굴복이 가득한데 말이다.

크록은 칸으로부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칸.”

* *

“……방금 뭐라고?”

기리는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다 말고 제 귀를 의심하며 나자크의 옆얼굴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분명해. 희미하지만 뱀파이어 냄새였어.”

지난번 학교 운동장에서 만났던 크록에게서 났던 뱀파이어의 냄새는 오래도록 나자크를 쫓아다녔다. 그리고 그 냄새는 오늘 만났던 테오에게서도 희미하게 풍기고 있었다.

“그걸 왜 지금 얘기하는 거야, 나자크.”

형제들에게는 늘 한걸음 물러서서 넓은 품을 기꺼이 내주었던 기리의 음성엔 노기가 섞였다.

내리는 빗물 만큼이나 어둡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나자크가 잠시 침묵했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일로 형한테 걱정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어. 형제들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너 혼자 지켜보려고 했다?”

나자크의 설명에도 기리는 화가 나는 마음을 쉽게 누르지 못했다.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이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걸 나자크는 여전히 모르는 걸까.

“나자크. 난 너희를 보호할 의무가 있어. 마하바 초원 국경에서 타헬과 널 만났을 때부터 그렇게 약속하고 다짐했지. 비록 내 아내는 지키지 못했지만 너희만큼은 지켜내겠다고.”

“형, 난…….”

“알아. 네가 느끼는 책임감. 그것조차 내가 짊어지게 했다는 것도. 하지만 나자크, 네가 아무리 강인하다 해도 넌 아직 어려. 늑대로 발현됐을 때 이능력이 폭발적인 것과는 별개로 힘의 운용 자체가 불완전해. 아직까진 나한테 충분히 기대도 괜찮단 얘기야.”

기리의 따듯한 위로에 나자크의 표정이 조금은 안도했다. 기리는 자신이 아직 어린 이 소년에게 큰 짐을 지게 한 건 아닐까 후회가 밀려왔다.

형제들에게 요구되는 건 항상 경계와 긴장이었다. 즐겁게 뛰놀아도 모자랄 시기에 불완전한 생활과 끝없는 위협이 이어졌으니 그들의 마음이 여느 행복한 가정의 소년들처럼 편할 리 없었다.

그런 와중에 나자크에게 책임감을 늘 강조했으니 기리의 마음이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기리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나자크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었다.

똑똑. 그때,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기리의 방문이 열렸다.

과일 접시를 손에 든 요한나가 보이자, 나자크가 그녀에게서 접시를 받아들었다.

“과일 좀 먹으면서 해. 아주 달고 맛있어.”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나자크가 단정히 대답했다.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겠니?”

“오늘은 괜찮아요. 밖에서 먹고 왔거든요.”

“그래. 그렇구나.”

요한나는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지 우물쭈물하는 모양새였다. 그 순간 밖에서 천둥이 쳤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검은 구름은 이미 하늘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아주머니?”

기리가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요한나의 두 손을 잡으며 다정히 물어왔다.

“칸하고는 라일락 숲에서 헤어졌다고 했지?”

“네.”

나자크는 그리 단정하게 대답하면서도 불편한 마음을 숨기기 어려웠다.

“비가 많이 오는데 칸이 너무 늦는구나. 이상해. 이렇게 늦은 적이 없는데…….”

요한나가 불안한 눈빛으로 점점 더 거세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미 시간은 밤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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