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일상을 살아가야지
(10/40)
10. 일상을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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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일상을 살아가야지
2023.02.02.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잔디밭 구장을 누비며 아이들 틈에 둘러싸여 있었던 나자크 아니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제 앞에 서 있는 그를 보며 미카가 입을 벙끗했다.
“썩 그렇게 좋아 보이는 표정은 아니길래.”
미카가 먼저 묻기도 전에 나자크가 나서서 설명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자신이 크록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걸. 경기에 내내 집중했을 테고, 아이들의 함성에 이깟 떨리는 목소리쯤이야 묻혔을 텐데.
“앞으론 크록하고 단둘이 있지 마.”
늘 상대를 배려하는 화법을 쓰던 나자크의 입에서 별안간 지시 같은 명령이 떨어지자 미카는 잠시 당황했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나자크는 솔직하게 설명할 수 없어 답답한지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크록 그 녀석에게서 뱀파이어 냄새가 나거든.
나자크가 말을 잇다 말고 반 이상 사라진 음료를 들어 보이며 살짝 곤란해진 표정을 지었다. 그건 꼭 또래와 다름없는 모습이라 어쩐지 미카는 웃음이 나버렸다.
“미안. 다 마셔버렸네.”
“그거 네 거 맞아.”
미카가 군더더기 없이 단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주려고 가져온 거, 맞다고.”
그런 미카의 시선 끝에 벤치에 쌓인 나자크의 선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많은 것 같길래. 나까지 보탤 필요는 없다 싶어서.”
이번엔 미카가 묻지 않은 질문에 대해 길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나자크는 눈빛으로 그녀를 재촉하지도, 따지고 들지도 않았다. 그저 반쯤 남은 음료를 다시 들어 제 입에 털어 넣고는 빈 병을 미카의 손에 쥐여주었다.
“잘 마셨어. 마침 목말랐거든.”
나자크는 다정하게도 거짓말을 입에 담는다. 저 수많은 음료 중에 그의 입으로 들어갈 것이 굳이 미카의 것일 필요는 없었을 터였다.
“……난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그날, 크록에게서 우리 도와준 거.”
그 ‘우리’라는 범주에 들어가 있는 건 당연히 칸과 미카임이 분명했다. 나자크는 어쩐지 그 표현이 거슬린단 생각이 들었다.
“너희가 아니라 난 내 사촌 동생을 도운 거야. 신경 쓸 필요 없어.”
“하지만…….”
“그리고. 너한테 고맙단 말을 대신 듣고 싶진 않아.”
나자크는 단호했고 때때로 형제들에겐 유독 더 엄격했다. 무엇보다 도덕적 선과 관계의 선 또한 분명했다. 그런데 그 선이 자꾸만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어 나자크는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자크는 자신 있었다. 처음 인간들의 삶 속에 섞여 살겠다 했을 때도, 칸과 미카의 일에 개입했을 때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자신 말이다.
하지만 보기 좋게 흔들리고 있는 건 나자크 본인이었다. 외려 금방이라도 지쳐 나가떨어질 것 같았던 칸이야말로 묵묵히 시간을 견뎌내는 재주를 가진 녀석이었다.
나자크의 기분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먼저 가볼게.”
나자크가 미카를 바라보지 않은 채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햇빛은 적당히 따가웠고,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았다.
선선한 초여름의 바람을 맞으며 미카는 한동안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탈의실로 돌아온 나자크는 캐비닛 앞에 서서 잠시 이마를 대고 기대섰다. 차가운 감촉이 이마의 뜨거운 열기를 억지로 가라앉히자 그제야 이성이 곤두서는 듯했다.
조용히 앉아 축구화 끈을 푸는 나자크의 옆으로 빵을 우물거리며 타헬이 다가왔다.
“미카 누나랑 싸웠어?”
천진한 그 물음에 유연하게 움직이던 나자크의 손이 잠시 허공에 멈췄다.
“내가 걔랑 왜 싸워.”
“에이, 싸운 것 같은데? 미카 누나 엄청 슬픈 얼굴로 갔어.”
슬픈 얼굴이라니. 대체 내가 뭘 했다고.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을 억지로 분리해내며 나자크가 상의를 탈의했다. 매끈한 굴곡을 따라 떡 벌어진 어깨와 체격은 럭비에도 아주 적합해 보였다.
“난 땀 흘리는 건 질색인데 형은 진짜 특이해.”
“수업 들어갈 준비 안 해?”
“그치만 너무 지루한걸.”
“그래도 해야 해. 인간들과 잘 섞여 살려면 너도 노력해야지.”
나자크가 너그럽게 웃으며 타헬의 복슬거리는 군청색 머리칼을 툭 쓰다듬었다. 대충 스치듯 훑고 가는 손짓이었지만 그 안엔 동생에 대한 깊은 애정이 가득했다.
타헬은 입안에 가득 물고 있던 빵을 마저 씹어 삼키고는 아예 몸을 틀고 앉아 본격적으로 나자크를 향해 질문을 퍼부었다.
“형. 빨리 자라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야?”
“그게 왜.”
나자크는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질문에 뭐가 문제냐는 듯 다시 반문했다.
“칸 형 말이야.”
“……칸?”
불편한 이름이다. 그 이름이 타헬의 입을 통해 나온다는 것도.
“칸 형도 빨리 자랐다잖아. 그래서 악마가 들렸느니, 저주를 받았느니, 다들 그렇게 떠들어댄다구.”
겨우 그런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다는 건가. 좀 더 구체적인 이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인간들의 괴롭힘이란 지나치게 단순하고 평면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타헬 또한 나자크와 마찬가지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눈동자엔 어렴풋이 칸에 대한 동정이 섞여 있었다.
“우린 태어난 지 몇 년 안 돼서 금방 자라잖아. 그러고 아주 오랫동안 유지되고. 빨리 자라는 게 인간들 눈에 그렇게 이상한 일일까?”
생각해본 적 없었다. 어린 늑대 시절엔 성인 뱀파이어 종족들에게 쫓기느라 살아남기 바빴고, 이렇게 크고 나서는 무리 생활에서 벗어난 적이 없기에 제 존재 자체를 부정해본 적도 없었다.
나자크의 이름은 선대의 전사에게 물려받은 함자였다.
위대한 늑대인간의 혈족으로부터 이어진 고귀한 이름은 그에게 언제고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그런 그에게 제 존재가 이상하다고 묻는다면 그건 단연코 아니었다.
나자크는 잠시 칸의 얼굴을 떠올렸다.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녀석.
그래서 자꾸만 눈에 걸리고야 마는 녀석.
나자크는 요즘 들어 과해지는 제 생각을 제어하며 두 눈을 고요히 감았다.
“형, 정말 칸 형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응?”
타헬의 재촉에도 나자크는 천천히 교복 셔츠에 팔을 집어넣고 단추를 꿰었다.
“인간들이 사는 세상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규칙들이 많으니까.”
타헬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 *
아무것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일상은 계속됐다.
이따금씩 칸과 형제들은 스치듯 대화를 나눴고, 냉전 중이던 엔지와 나자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솟아 있는 가시도, 잊을 만하면 찔러대는 독침도, 서로가 서로의 입을 가린 것처럼 그들은 일상을 살고 있었다.
나자크는 며칠 전 제게 했던 기리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도 우린 일상을 살아가야 해, 나자크.’
예상치 못한 일들이 우릴 덮쳐와도, 형제들끼리 분란이 일어도, 뱀파이어 무리들이 언제 저들에게 들이닥칠지 몰라도, 그럼에도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야 했다. 그게 그들이 형제들과 함께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시몬의 웃음소리는 언제나처럼 인자했고, 분주하게 부엌을 오가는 요한나의 발소리는 안락했다. 인간들이 꾸려가는 가족의 형태란 늑대인간 형제들에게도 꽤 익숙한 방식이었다.
“와…… 이걸 뭐라고 설명을 해야…….”
조잘조잘 말만 잘하던 타헬이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손바닥으로 제 입을 가렸다. 단정하게 쥐었던 숟가락이 툭, 상 위로 떨어졌다.
“아주 끔찍한 맛이야.”
엔지가 숨도 쉬지 않고 냅킨으로 입술을 닦으며 일갈했다. 아무리 늑대인간이라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 맛이었다.
“하하. 얘가 다른 건 다 날 닮았는데…… 그, 요리 솜씨가 좀, 하하하.”
얼굴이 달아오른 시몬이 제 아들 칸의 눈치를 살피며 호탕하게 웃었다.
분명 보기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데 이토록이나 엉망진창인 맛을 느껴본 적 있었던가.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칸은 아무렇지 않게 제 음식을 맛보곤 순진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했다.
“그렇게 맛없어?”
뻔뻔하게까지 느껴지는 표정에 엔지가 얼얼한 혓바닥을 물로 입을 헹구며 짐짓 진지하게 물었다.
“잠깐만. 혹시 이거 암살시도, 뭐 그런 거야?”
“엔지, 그럴 리가 없잖아.”
기리가 요한나와 시몬의 표정을 살피며 엔지의 발을 꾹 밟았다.
“그럼 형이 내 것도 먹든지.”
“아, 음, 어…… 그건 좀.”
“그리고 발 좀 치워줄래. 아프거든?”
기리가 헛기침을 하며 은근슬쩍 엔지의 발 위에 있던 제 발을 치워냈다.
-장담하는데, 쟤 우리한테 뭔 억하심정 있는 게 분명해.
엔지가 제 형제들만 들을 수 있게 말하자 타헬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의 이유를 알 리 없는 시몬과 요한나는 그저 따라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사이로 아무 말 없이 나자크가 묵묵히 음식을 먹는다. 그 모습을 보며 엔지가 팔짱을 끼고 앉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쟨 미각을 잃은 게 분명해.”
정말이지 아무 문제가 없단 얼굴로 음식을 먹는 나자크를 보던 타헬이 슬쩍 제 형의 음식을 맛보는 그때였다.
“윽! 뭐야! 똑같잖아!”
타헬이 기겁하며 생수를 들이켰다.
제 동생의 반응에 나자크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일 뿐 마지막까지 변화 없는 차분한 얼굴로 식사를 끝마쳤다. 조금도 남기지 않고 빈 그릇을 내놓은 나자크의 행동은 칸에게는 꽤 인상적이었다.
칸은 점점 잃어가는 제 미각을 들킬 수 없어 최대한 말을 아끼는 중이었지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침묵하는 나자크에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억지로 안 먹어도 됐어. 애들 말대도 내 요리실력은 끔찍하거든.”
“음식이 무슨 죄야.”
나자크가 담백하게 답했다.
“그래. 만든 사람이 죄지.”
엔지가 밉살스럽게 뒷말을 보태자 기리가 그를 향해 강렬히 눈빛을 쏘았다.
“그만 좀 노려봐. 타 죽겠네.”
엔지가 입술을 삐죽이며 양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조용한 날 없이 시끌벅적한 그레이 여관은 형제들이 오고 나서부터는 정말이지 사람들이 사는 곳처럼 늘 북적이고 따듯했다.
한 가지 요한나가 특이하다고 생각한 것은, 이상하게 집 안의 온도가 자꾸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여름이라 그러려니 했으나 비정상적으로 느껴지는 과도한 열기에 한동안 그녀는 냉방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 이유가 유독 높은 체온을 가진 늑대인간들 때문이라는 걸 알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형, 오늘이야. 안 잊었지?”
타헬의 다갈색 눈빛이 커다란 강아지처럼 예쁘게 반짝였다. 이건 꼭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나오곤 하는 타헬의 필살기나 다름없는 애정 표현이었다.
“잊을 리가 있어? 이렇게 분 단위로 알려주는데.”
타헬의 질문이 한 삼십 번쯤 반복되고 있음에도 나자크는 짜증스런 기색 없이 그저 웃고 마는 게 전부였다. 누군가는 쉬이 볼 수 없는 진짜 미소가 제 동생에게만큼은 유독 헤펐다.
“아, 오늘이구나? 시내 구경이라니. 재밌겠구나, 타헬.”
“네! 아저씨! 너무 기대돼요!”
시몬이 인자하게 웃으며 타헬의 외출에 기대감을 실었다. 이 도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가보지 않은 곳도, 먹어보지 않은 음식도 많을 게 분명했다.
“그레이빌은 해산물이 유명하단다. 잊지 말고 꼭 먹어보렴.”
요한나가 구운 과자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미소를 띤 채 말했다.
타헬은 기쁜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이내 제 옆자리에 앉은 나자크의 팔에 반쯤 매달렸다.
“형! 나 옷도 사고 싶어. 음, 신발이나 가방도! 시내도, 라일락 숲도, 오늘 꼭 다 가보는 거야! 알았지?”
“그래. 알았어.”
나자크가 다시 긍정을 표하고 나서야 타헬이 안심한 듯 환하게 웃는 때였다.
“그러지 말고 칸, 네가 구경시켜주는 게 어떠니?”
요한나의 권유에 그릇을 정리하던 칸이 잠시 당황한 낯빛을 했다.
“라일락 숲은 ‘너 없인’ 위험하잖니.”
당연한 듯 콕 집어 표현하는 요한나의 말에 기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숲이 위험하다니?
형제들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칸에게로 꽂혔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