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작약 (9/40)


9. 작약
2023.01.26.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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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흡……! 쿨럭!”

크록의 몸이 저만치 날아가 무력하게 벽 아래로 처박혔다.

기침을 하자 어금니와 핏물이 함께 튀어나왔다.

“약해 빠진 놈!”

크록의 아버지이자, 이 그레이빌의 대부호인 팔로하이드는 승리에 도취된 사내였다. 그 중독증은 가히 높아 유일한 제 혈육인 아들을 물건처럼 무자비하게 짓밟을 정도였다.

팔로하이드는 꼭 피를 보아야만 그만하는 성미를 지닌 자였다.

크록은 울지 않았다. 울면 더 맞는 법이었으니 이가 부러져도 참아야만 한다. 그나마도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몸에 흉터가 남을 만한 짓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단 거였다. 그 이유도 제 아들의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에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끓는 주전자 소리가 높은음처럼 강렬하게 온 집 안을 울릴 땐 그건 하나의 신호였다. 오늘 밤은 결코 평안할 수 없다는.

크록은 제 아비가 저보다도 더 아끼는 정원의 꽃과 화분들을 보며 옆으로 툭 쓰러졌다.

저것들도 언제든 시들기 마련이다. 아름답지만 쓸모없는 것들이란 다 그랬으니까.

“더 밟아줬어야지! 기어오르지 못하게 다 죽여놨어야지!”

학교엔 아버지가 붙여놓은 사람들이 시시각각 크록을 감시했다. 제 아들이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엔 관심이 없으나, 응징하지 않음에는 이토록이나 미친 사람처럼 길길이 날뛰며 분노했다.

폭행을 당하지 않기 위해 폭행해야 하는 크록의 삶은 아주 오랫동안 고단했다. 이제는 그것이 아버지가 원한 일인지, 아니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해서 하는 일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들 하나 상대 못 해서 내 귀까지 들어오게 만들어?”

“죄, 죄송해요, 아버지……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제 발아래로 기어와 무릎을 꿇는 크록을 보며 팔로하이드가 손수건을 꺼내 피 묻은 제 손을 닦아냈다.

그러고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제 아들을 내려다보더니, 꼭 보상이라도 쥐여주듯 신용카드를 바닥에 툭 던졌다.

“구질구질하게 하고 다니지 마. 내 얼굴에 먹칠하는 거니까.”

그는 곧이어 입에 시가를 문 채 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한참 동안 일어서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던 크록이 익숙한 듯 피 묻은 손으로 신용카드를 쥐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는 옷을 입은 채 차가운 물줄기 밑에 숨을 참고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온몸이 불에 타들어 가는 것처럼 뜨겁고, 어깻죽지부터 등을 타고 지도처럼 그려진 붉은 화상 흉터가 근질거렸다. 크록은 상의를 벗어 던지고는 손톱을 세워 제 살을 미친 듯 긁기 시작했다.

제 몸속에는 벌레가 살고 있다.

아주 더럽고, 냄새나고, 지독스러운.

“도련님! 긁으시면 안 돼요! 그만요, 도련님!”

수건과 약을 챙겨온 유모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와 크록의 손을 떼어놓았지만 도무지 완력으론 상대가 되질 않았다. 유모는 비상벨을 눌러 경호원들을 불러들였다.

건장한 사내 여럿이 달려들어 크록의 양손을 결박하고 나서야, 몸을 긁는 광적인 행위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질리언……! 질리언을 불러줘! 제발! 질리언을……!”

크록이 절규했다. 이런 순간마다 그는 질리언을 찾았다.

반쯤은 울음 섞인 그 절절한 부름과 반대로, 화려한 차림에 긴 곱슬머리를 한 질리언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화사하게 웃으며 크록의 방을 찾아왔다.

“날 찾니? 크록.”

“질리언!”

크록의 목소리에 반가움과 서러움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질리언이 나타나자 유모는 경호원들을 향해 급히 눈치를 주며 주변 사람들을 물렸다.

언젠가부터 이 집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질리언은 도련님의 유일한 친우라 했다. 이상하게도 그녀가 올 때면 크록은 거짓말처럼 유순해졌기에 유모는 낯선 여자의 방문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크록의 방에 여자가 드나든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면 팔로하이드는 제 아들 같은 도련님의 발목을 분질러버리고도 남을 것이다.

유모는 황급히 양 문을 닫고 밖으로 후다닥 사라졌다.

질리언은 익숙하게 크록의 곁에 다가와 결박된 그의 손을 풀어냈다. 손이 풀어지기 무섭게 크록이 그녀의 품속으로 거칠게 안겨들었다.

질리언은 아무렇지 않게 크록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손 아래로 도마뱀 가죽 같은 화상 흉터의 촉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래. 나 여기 있어. 많이 무서웠지?”

아이를 끌어안듯 제 품속에 크록을 가둔 질리언은, 그가 자신 말고는 무엇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대체, 대체 어디 갔었던 거야! 아무 데도 안 가고 내 방에 있기로 했잖아!”

“별채에서 지내기로 했잖아. 네 아버지가 알면 어쩌려고 그래?”

“상관없어. 아버지 따위……!”

“음. 사실 네 방은 해가 너무 잘 들더라고. 난 어두운 걸 좋아하는 데 말이야.”

“커, 커튼! 사람을 시켜서 커튼을 치라고 할게! 그러니까 아무 데도 가지 마……! 날 버려두고 아무 데도! 제발…….”

크록이 질리언의 품에 쓰러진 채 더 깊이 안기며 절박하게 애원했다. 크록은 무언가에 쫓기듯 잔뜩 두려움이 가득 찬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그가 두려워하면 할수록 질리언의 붉은 입술은 더욱더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래. 아무 데도 안 갈게. 아아…… 근데 이거 혹시 네 피 냄새니?”

“아. 미, 미안해. 치료한다는 게.”

당황한 크록이 질리언에게서 멀어지려 하자, 순간 엄청난 악력으로 그녀가 크록의 목덜미를 잡고 제 품으로 거세게 끌어당겼다.

“아니, 아니. 아주 좋아. 더 맡을 수 있게 해줘. 썩 달진 않겠지만 일단 향기는 좋으니까.”

“……뭐라고?”

“네 피를 맛보고 싶은데. 그건 좀 이르겠지?”

그 말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질리언에게 매달렸던 크록의 울분이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흐음. 왜 반응이 미적지근하지? 내 말이 이상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크록이 질리언의 품에서 빠져나와 살짝 떨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들여다봤다. 너무도 이질적이고 낯선 감정이 크록을 덮쳐왔다.

“그런데 질리언…… 우리가 어디서 만났었지?”

“이런. 서운한걸.”

순간 붉게 물들어가는 질리언의 적안에 매혹된 듯 크록의 눈이 풀리더니 아득한 나락의 공간에 갇혔다. 질리언은 가볍게 크록의 입술에 제 입을 맞췄다.

질리언은 차갑게 얼어붙은 두 손으로 크록의 양 볼을 잡고, 의식을 잃어가는 그 눈동자에 세뇌하듯 조곤조곤 속삭였다.

“벌써 잊은 거야, 크록? 너와 난 시내의 꽃집에서 마주쳤잖아? 넌 아버지의 선물을 사기 위해, 난 너에게 줄 꽃을 사기 위해 말이야. 아주 예쁜 작약이었지.”

이미 문장엔 모순이 있었다. 크록을 알지 못했던 첫 만남에 그를 위한 꽃을 준비했다는 건 시점의 오류였다. 하지만 크록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아아, 그랬었지. 그랬어, 맞아.”

홀린 듯 크록이 중얼거리며 바람 빠진 풍선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의심은 마. 그럼 내가 널 죽여야 하잖니.”

“아니…… 의심하지 않아, 질리언. 난 네가 필요해.”

“그래, 크록. 나도 네가 필요해.”

질리언의 붉은 손톱이 크록의 볼을 긁고 지나가자 그 자리에 핏기가 맺혔다. 그 피를 손끝으로 번지게 한 질리언이 그 아름다운 색을 감상했다.

“그러니 부디, 조금만 더 내 품에 있어주렴.”

⁕ ⁕

학교는 떠들썩했다.

전학생 세 명이 동시에 왔을 그 시점보다 더 과한 열기가 이는 것 같기도 했다.

반쯤은 스포츠에 미쳐버린 남학생들의 환호가, 열성적인 치어리더 클럽 여학생들을 제치고 우람한 모양새로 팔을 흔들며 소리를 내질렀다.

나자크는 스포츠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구가하는 중이었다.

나자크는 말수가 적고 행동이 크지 않았으나, 독보적인 운동 실력으로 고작 며칠 사이에 남자아이들 사이에선 꽤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 또한 운동하는 걸 좋아하고, 인간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데에는 이만한 방법도 없으니 일석이조일 터였다. 다만 어려운 것이 있다면, 그건 역시 인간답게 ‘적당히’ 실력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금만 스피드를 내거나, 조금만 몸싸움을 해도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거나 같은 편조차 쫓아오지 못하는 일들이 태반이다 보니 나자크는 여러모로 힘과 속도를 조절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애를 쓰고 있었다.

벤치의 나자크 자리에 음료와 샌드위치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마도 그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여학생들의 흔적임이 분명했다.

미카는 제 손에 쥔 에너지 음료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반대편으로 걸음을 돌렸다.

“누구부터 해줄까.”

문득 들려오는 조용한 물음에 미카의 발끝이 움찔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입술이 터진 크록이 느긋하게 서서 축구 경기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 더 슬프겠어, 미카?”

“……뭐?”

그건 꼭 자비로움처럼 들리는 문장이었다. 슬픔보다 더 슬플 수 있는 것을 선택하게 해주는 자비로움. 크록은 지금 그 선택을 미카에게 맡기고 있었다.

“저 축구하는 잘난 다리를 부러뜨리는 게 재밌을까. 아니면 칸 그놈의 팔을 잘라버리는 건? 아아, 그럼 그 손님도 없는 여관에 일할 손이 없어서 망해버리겠구나. 쯧. 그건 좀 나도 미안한데.”

혼잣말처럼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크록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목소리는 고저를 잃어버렸고, 눈빛은 생기 없이 죽어 있었다.

“아니. 넌 그럴 수 없어, 크록.”

미카는 단호히 크록을 보며 말했다.

“네 아버지가 아무리 대단해도, 네가 그레이빌 세컨더리의 왕처럼 군다고 해도. 넌 그럴 수 없어.”

미카의 흔들림 없는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크록이 이내 밀랍처럼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쩐지 그것이 꼭 죽은 동물의 표정처럼 공허하게 느껴져 미카는 불쑥 두려움이 일었다.

“미카, 네가 날 잘 모르지……?”

크록이 한 걸음 다가서자 미카가 약속한 듯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난 그럴 수 있는 사람이야.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말이야.”

상체에 딱 붙인 두 팔이 떨리는 것 같았다. 미카가 제 손에 쥐어진 음료가 바닥으로 떨어지질 않길 간절히 기도하는 때였다.

“나 주려고 가져온 거야?”

온화하게 얼굴 옆을 스치며 들어오는 나자크의 얼굴에 미카가 깜짝 놀라 음료를 떨어뜨리자, 무리 없이 그것을 허공에서 능숙하게 낚아챈 나자크가 뚜껑을 따고 반쯤 그 음료를 마셨다.

꼭 선을 긋듯 미카의 앞을 교묘히 막아선 나자크는 음료를 마시면서도 여전히 크록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자크는 크록에게서 미세하게 풍기는 위험한 향기에 신경이 곤두섰다.

득실거리는 인간들의 체취를 뚫고 들어오는 냄새. 다른 향들과 제멋대로 섞여 두통이 일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분명 늑대인간이 가장 경계하고 경멸하는 뱀파이어의 냄새였다.

어째서지? 왜 크록에게서 뱀파이어의 흔적이 남은 것인가.

나자크는 천천히 크록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흡혈의 흔적은 없는 몸이다. 그렇다고 피를 갈구하는 눈동자도 아니었다.

옥상에서보다 더 예민하게 구는 나자크의 경계에, 크록은 처음으로 아무것도 없는 표정을 지워내고 살짝 입술 끝을 올렸다.

“끼어드는 게 취미인가 봐. 나쁜 버릇이네.”

“그러게. 고치기가 힘들어, 나도. 식구가 많아서 생긴 버릇이라.”

“걱정 마. 내가 도와줄게.”

크록이 친절하게 말했다. 그건 나자크가 그에게 했던 방식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나 그런 거 잘 고치거든.”

피식, 크록이 웃으며 여유롭게 걸음을 뒤로 물렸다. 옥상에서 굳어 아무것도 못 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얼굴이었다.

“그래? 그럼 잘 부탁해. 크록.”

나자크가 가볍게 그 권유를 받아들였다.

크록은 빙긋 웃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더니 이내 돌아섰다.

조금 거리가 벌어지고 나서야 핸드폰을 꺼내든 크록이 전화 너머로 싸늘히 말했다.

“테오.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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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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