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안개 속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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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안개 속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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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안개 속의 도시
2023.01.19.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안개가 짙은 새벽 바다는 위험했다.
깊이도 거리도 가늠할 수 없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바닷속으로 칸이 걸어 들어갔다.
이정표도, 길도 없는 바닷속을 칸이 익숙하게 유영했다.
푸른 초목이 자라나는 초여름이었으나 바람은 거셌고 물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뼛속이 아려옴을 느끼며 칸은 멈추지 않고 팔과 다리를 움직였다. 칸은 어떻게 해서든 이 생각의 늪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넌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나자크의 목소리가 꼭 세이렌의 노랫말처럼 아무도 없는 망망대해에 울려 펴졌다.
탈의한 상체엔 작은 상처조차 없다. 고작 간밤의 시간이 그의 몸을 치유한 것이다. 차라리 아팠다면,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아팠다면, 이 상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칸은 스스로도 제 치유능력에 의문을 품었다. 찔리고 피가 나도, 입술이 터져도, 시퍼렇게 멍이 들어도, 그 모든 것이 사라지기까지는 겨우 단 하룻밤이면 되었다.
칸이 수영을 멈춘 채 가만히 물에 떠 있다가 몸을 세워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삶과 죽음의 반복이었다.
숨이 막혀 입속으로 귓속으로 물이 밀려들어 올 때였다.
덥석!
별안간 누군가가 칸의 목덜미와 어깨를 쥐고 그대로 수면 위로 뽑아 올렸다.
어푸-!
젖은 머리를 들어 올린 칸이 숨을 급히 뱉더니 그 손의 주인을 확인했다.
“뭐냐, 이 새벽에? 얼어 죽으려고 작정했냐.”
못된 말을 쏟아 붙이고 유유히 헤엄쳐 바닷속을 빠져나가는 건 엔지였다.
뭐지? 어디서 나타난 거야.
남들보다 기척을 훨씬 빨리 읽는 칸이었으나 물속에 잠겨 있는지라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게 분명했다. 아니면 상대가 말도 안 되게 빨랐거나.
“아. 찝찝하게. 쯧.”
엔지가 제 몸에 묻은 소금기를 털며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을 보고 있는 칸만 아니었다면 단숨에 이능력으로 물기를 날려버렸겠지만 그러질 못해 더 귀찮아지는 참이다.
물속에서 따라 나온 칸은 대체 어디서 어떻게 알고 나타났는지 모를 엔지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고는 엔지에게서 살짝 등을 내보이며 조용히 변명했다.
“……죽으려던 거 아니야.”
“누가 뭐래냐.”
“뭐랬잖아. 죽으려고 작정했냐고.”
“야, 그건 그냥 미사여구거든?”
별 걸 다 딴지 거네. 엔지가 팍 미간을 구기며 칸을 타박했다. 덩치는 산만 한 게 자세히 살펴보면 섬세하고 여린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칸은 뿌연 수평선 너머를 가만히 주시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한쪽에 뭉쳐 있던 하얀 안개가 몰려와 시야가 더 아득해졌다.
“여긴 왜 왔어. 안개가 짙어서 새벽엔 위험해.”
“그 위험한 델 너는 왜 왔는데.”
“난 익숙하니까.”
“익숙해봤자 물길이야. 표지판도 없는 바다라고.”
“괜찮아.”
칸의 입버릇일까. 엔지는 그가 곧잘 괜찮다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 이 대답도 그저 습관 같은 거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라일락 숲도, 그레이빌의 바다도, 나한텐 다 괜찮아.”
빠르게 모였다 흩어지길 반복하는 안개도, 누구 하나 기억하지 못하는 라일락 숲길도, 깊이를 알 수 없이 모두를 집어삼킬 저 깊은 바다도 칸에게만큼은 괜찮은 일이었다.
그의 확신이 어디서부터 기인하는지 엔지는 알지 못했다. 칸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분명 가졌다. 허나 그게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엔지는 답답했다. 제한된 정보 속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가리는 것은 엔지의 특기였으나, 이상하게도 칸은 그 방법이 통하질 않는 상대였다.
엔지가 테트라포드 한쪽에 몸을 걸치고 앉아 제 젖은 머리를 툭 털었다.
“왜 그랬어?”
“여름이니까.”
수영에 대해 묻는다고 생각했는지 칸이 준비된 답을 내놓자 엔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거 말고. 왜 맞았냐고.”
“무슨 질문이 그래. 왜 맞았냐니.”
“너, 일부러 맞아주는 거잖아.”
무심히 떨어지는 엔지의 말에 칸의 행동이 잠시 멈췄다. 곧이어 아무렇지 않게 벗어둔 옷을 대충 젖은 몸에 걸쳐 입으며 칸이 대꾸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요것 봐라? 너 아주 재밌는 놈이구나?”
엔지가 비싯 입꼬리를 올리며 외려 흥미가 생긴 얼굴을 했다.
“네 몸.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해. 그것도 하룻밤 만에.”
엔지는 정확히 기억했다. 칸의 어디에 상처가 나고 어디에서 피가 났었는지. 그런데 그 기억이 꼭 거짓인 것처럼 그의 몸은 말끔하기만 했다.
이런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건 하늘 아래 단 두 개의 존재.
늑대인간이거나…… 뱀파이어거나.
하지만 하급 뱀파이어라면 햇빛 아래에서 생활할 수 없으니 멀쩡하게 학교를 다닌다는 건 불가능하겠고, 그렇다고 상급 뱀파이어라 하기엔 겨우 인간에게 맞아 상처 따위가 생길 리도 없었다.
그러니 네가 누군지 더더욱 알아야겠다.
내가 널 죽여야 할지 살려야 할지도.
엔지는 능숙하게 제 속내를 숨기고 흉터 하나 없이 매끈한 칸의 등을 보며 말했다.
“크록인지 나부랭인지 그것들은 모를 거 아냐. 네가 지금 무슨 생각으로 바보처럼 맞아주고 당해주는지.”
“생각이라니……?”
칸은 그저 툭 털고 일어나 제 옷에 묻은 모래와 물기를 털어내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 행동에는 전혀 계산이 없어 보였다.
“그럼 생각도 없이 맞아준다고? 그냥? 이거 왜 이래. 지금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거냐.”
“믿고 안 믿고는 네 문제야, 엔지. 난 그냥 내 할 일을 할 뿐이고.”
“때리면 맞는 게 네 할 일이라고? 웃기지도 않아.”
“나한테 궁금한 게 많네.”
고요히 떨어지는 칸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는 분명히 달랐다. 찰나에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눈동자가 금안처럼 보였다 사라졌다.
뭐지.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엔지가 모래 바닥으로 다시 발을 내려 칸에게 성큼 다가와 섰다.
몰아치는 파도 소리, 바람과 바람이 뒤엉키는 모든 것이 허공에 걸려 있었다.
“그래. 난 네가 아주 궁금해, 칸.”
엔지는 파문이 이는 제 속마음을 가라앉히며 칸과 두 눈을 맞췄다. 방금 본 것이 꼭 환영이었던 것처럼 칸의 눈동자는 밝은 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네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뭘 먹고, 뭘 보고, 뭘 듣는지도.”
“애정 표현치곤 과하네.”
날카로운 칸의 지적에 엔지는 그저 입술을 틀어 올리고 여유롭게 웃어 보인다.
“그치? 내가 좀 그래.”
순순히 인정한 엔지는 물기가 맺힌 제 안경을 대충 옷자락으로 슥 닦으며 순한 짐승으로 위장했다.
“이렇게 과한 내가 어떤 방법을 쓸지 너도 궁금하지 않아?”
엔지는 안경 너머가 뿌연 것이 안개 때문인지 얼룩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설명해봐. 네 상처, 어디로 갔는지.”
엔지의 질문에 칸은 보란 듯 그에게로 성큼 더 다가섰다. 그러곤 안경테 끝에 매달린 바닷물을 제 손끝으로 훔쳐냈다. 섬세하고 배려 깊은 행동이었다.
“그레이빌은 안개가 많이 끼는 도시지.”
“…….”
그래. 칸의 말대로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알 수 없는 도시다.
“뭘 보았든 대부분은 네 착각일 거야, 엔지.”
축축한 바닷바람과 함께 들려온 목소리엔 경고가 섞여 있었다.
⁕ ⁕
타탁- 타다닥-
체육관 한쪽 구석에서 낮잠을 청하던 엔지는 낯설지 않은 발소리에 감은 눈을 꿈틀했다.
잰걸음이 빠르고 신경질적인 걸 보니, 또 무슨 일로 화가 났을까.
엔지는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발을 까딱거리며 수백 미터 앞부터 그 발소리가 제 앞에 당도할 때까지 집중했다.
새벽부터 칸과 실랑이를 했더니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엔지를 괴롭히던 찰나에 잘됐다 싶을 정도의 적절한 등장이었다.
“클럽신청서 왜 안 내?”
아니나 다를까, 잔뜩 쏘아붙인 미카의 목소리에 신경질이 묻어났다.
“무슨 신청서?”
빙긋 미소를 흘리며 엔지가 모르쇠로 대답하자 미카가 두 손을 허리춤에 올렸다.
“눈이나 좀 뜨고 말하는 게 어때. 네가 종이비행기로 접어 날린 그 신청서 말이야! 너 학교 놀러 다녀? 아님 졸업하기 싫은 거야?”
“글쎄. 둘 다 아니라곤 대답 못 하겠는데.”
나자크나 타헬처럼 순순히 모범생 노릇을 하는 건 엔지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애초에 인간들이 사는 도시에서 섞여 지낸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코미디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루 종일 엔지를 찾아다닌 미카의 이마엔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이런 곳에서 천하 태평한 몰골로 자고 있는 걸 알았다면 진작 엉덩이를 걷어차 줬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무 순수하게 드러나는 미카의 얼굴을 엔지가 금세 읽어내렸다.
“나 한 대 걷어차고 싶단 표정이네?”
“아, 내 속마음이 거기까지 들렸니.”
미카가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클럽신청서를 내밀자 엔지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주까지 선생님께 제출해야 해. 안 내면 내 맘대로 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넌 어딘데?”
“독서클럽. 근데 니들은 왜 다 그게 궁금해? 어차피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클럽에 들었다고 생각할 거면서.”
미카는 지루한 클럽이라고 말하던 나자크의 말이 불쑥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신경질을 내고 말았다.
“까칠하네.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미카가 괜히 찔려 시선을 피하자, 엔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신청서를 받아들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에서 반대편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가 걸음을 떼기 무섭게 미카가 엔지의 팔을 잡아 세웠다. 순간 예상보다 더 뜨거운 온도에 미카가 잠시 움찔했다.
“……잠깐! 어디 가?”
“조용한 곳.”
“수업은 안 들어오니? 아예 불량학생이 되기로 작정한 거야?”
“모범생은 이해 못 하겠지만.”
모범생이란 말은 미카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였다. 공부 잘하고 야무지면 다 모범생이란 말인가. 그 단어가 제게 긍정적으로 작용한 적은 한 번도 없기에 엔지의 입에서 나온 저 말이 아주 불쾌한 참이었다.
“여러모로 참 피곤하게 사는 편이네. 너도, 칸도.”
“내가?”
“챙길 거면 칸, 그 녀석만 챙겨. 나같이 불량한 전학생한테까지 관심 쏟을 필요 없으니까.”
알고 있다. 자신이 지금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새벽에 벌어진 칸과의 입씨름의 여파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화를 낼 줄 알았더니 미카는 외려 관찰하듯 엔지를 빤히 들여다봤다.
“너 삐뚤어졌구나?”
“……뭐?”
“삐뚤어졌다구, 너.”
미카의 말에 놀라서 되물은 것이 아니었다. 정곡을 찔린 정확한 문장에 심사가 뒤틀렸을 뿐이다.
체육관 유리창을 타고 반사된 빛이 녹갈색 머리칼이 반짝였다. 미카는 잠시 그 머리색이 이제 막 녹음이 지기 시작한 라일락 숲의 나무들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푸르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 딱 좋은 정도의 색이라고.
미카가 부러 빛을 받은 엔지의 머리칼에서 시선을 떼며 그의 눈동자로 방향을 옮겼다.
“차라리 누군가의 관심이 낯설다고 말해. 그쪽이 솔직하고 더 좋으니까.”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알아.”
제 영역으로 들어오는 선을 넘지 말라는 짧은 경고였다. 하지만 그것이 미카에게 통할 리가.
“모르지. 내가 널 어떻게 아니? 이제 겨우 말 몇 마디 섞은 게 전분데.”
“허.”
순간 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엔지는 못된 버릇이 샘솟았다.
‘이렇게 과한 내가 어떤 방법을 쓸지 너도 궁금하지 않아?’
칸에게 그리 말했던 것처럼 엔지는 과함의 경계가 없다.
문득 미카를 보며 느껴지는 건, 어릴 적 제 누나를 위해 소매치기를 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범죄를 택했던 그때처럼, 칸을 자극하기 위한 아주 좋은 미끼가 여기 눈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엔지의 갈색 눈은 미카를 먹잇감처럼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미카가 그 시선을 느끼고 뒤로 슬쩍 물러나는 때였다.
성큼 다가가 그녀의 손에 쥐어진 클럽신청서와 펜을 홱 뺏어 든 엔지가, 대충 글씨를 마구 휘갈겨 쓰곤 실실 웃으며 다시 뒷걸음질로 멀어졌다.
아아. 어쩐지 불길하다 불길해.
역시나, 신청서를 받아든 미카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야, 너……!”
악필로 대충 쓴 단어는 ‘독서클럽’이었다.
“엔지!”
“그럼 앞으로 잘해보자고, 반장.”
찡긋, 한쪽 눈으로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을 지은 엔지가 그제야 몸을 완전히 돌리곤 유유히 사라졌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