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각자의 무게 (7/40)


7. 각자의 무게
2023.01.12.


7. 각자의 무게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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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치울까.’

부드러운 권유였다.

작은 일렁임조차 없는 일직선의 목소리에 크록은 목울대가 콱 막혀왔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허벅지 근육이 떨리는 듯도 하다.

“크록! 뭐 하는 거야!”

“참지 말고 저 새끼 치워버려!”

멍한 의식 뒤로 무리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신경을 긁는 날카로운 이명이 공기를 찢고 크록의 무의식을 침범했다.

아주 가볍게 크록의 손목을 쥔 나자크의 다정한 손은 모순적이게도 여차하면 손쉽게 뼈를 분지를 준비가 되어 있다. 그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건 단연 크록이었다.

크록이 왜 경직되어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엔지는 발끝을 까딱거렸다. 곧이어 그는 너머에 선 인간들의 반응에 웃음조차 나질 않는단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참나, 인간 따윌 상대로 힘도 제대로 못 쓰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쯧.

-어떻게 좀 해봐, 형! 계속 저렇게 둘 거야?

타헬은 정확하게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인지하지는 못했으나, 평소와는 다른 나자크의 모습에 잔뜩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에 반해 천하태평인 엔지는 높고 화창하기만 한 하늘을 무심히 올려다봤다.

-안 놔두면. 나자크 저 녀석 말릴 재주는 나도 없거든?

엔지가 혀를 차며 조급하게 구는 타헬에게 무신경하게 대꾸했다. 나자크가 순순히 제 말을 들어 먹는 인사도 아니고, 뭣보다 이성을 잃고 전학 첫날부터 사고를 칠 만큼 멍청하지도 않다.

“……이 손 안 놔?!”

돌이라도 삼킨 듯 콱 막혀 있던 크록의 성대가 그제야 제 할 일을 찾았다.

“아, 미안해.”

표정은 전혀 그렇지 못한데 이상하게 목소리는 꼭 진심 같다. 나자크는 크록을 결박하고 있던 제 커다란 손을 느리게 떼어내며 정중한 어투로 사과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들어온 예상 못 한 사과에 주춤한 건 크록이었다. 그의 눈빛엔 제 일그러진 제 위상에 대한 복수와 분노가 뜨겁게 일렁였다.

감히 아랫것들 앞에서 내게 모욕을 줘?

크록의 눈은 꼭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눈빛과 기운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듯, 나자크는 외려 더 다정하고 친절하게 시선 끝으로 크록의 손목을 살폈다.

“아팠어? 힘 조절을 한다는 게 서툴러서 그만.”

크록의 자존심이 저 밑 땅바닥까지 뭉개졌다.

나자크는 옥상에 쌓아놓은 책상다리 사이로 거미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촘촘하게 만들어진 실타래에 갇힌 가엾은 나비의 날개가 슬프게 뒤엉키는 소리까지, 나자크에겐 모든 것이 선명하게 들렸다. 신경이 곤두섰단 증거였다.

눈에 띄지 않고 늑대인간이란 사실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입장에서, 벌써부터 인간들과 이런 소란을 겪게 된 것 자체가 질서정연함을 추구하는 나자크에겐 피로한 일이었다.

그는 곧 반대편에 선 칸을 바라봤다.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 건 제 형제들만으로도 충분했다.

“……너희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까드득. 크록의 잇속에서 뼈가 갈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 충고 고마워.”

나자크가 진심으로 대답했다.

크록은 꽉 말린 주먹을 바지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으며 돌아섰다.

순순히 그가 물러나자 무리 중 테오가 그의 뒤를 따라붙으며 필요 이상으로 흥분했다.

“크록! 그냥 이렇게 돌아가는 거야? 저놈들 내버려 두고?”

“닥쳐!”

크록이 테오에게 소리쳤다. 자신이 무얼 경험했는지, 왜 그런 무기력함을 느꼈는지 다른 이들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크록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저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듯했다.

그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덫에 걸린 먹잇감이 된 이 기분을 반드시 되갚아 주리라 다짐했다.

테오는 크록의 윽박에 침묵하면서도 칸과 전학 온 형제들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엔 두려움보단 의아함이 더 컸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려 초 단위로 생각하고 있는 바쁜 눈동자였다.

어쩌지 못하고 크록을 따라 옥상을 나가는 무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칸이 뻣뻣하게 굳어 있던 제 어깨에 힘을 풀었다.

“칸, 괜찮아?”

“…….”

미카가 어쩐지 핏기가 없어진 칸을 걱정했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두 사람 앞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지고 나자크가 조용히 다가섰다.

“칸.”

차분하게 흘러나온 부름이 칸을 긴장케 했다. 나자크는 낯선 일을 아주 자연스럽게 해내는 재주를 가졌다.

“넌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묘한 질책이었다. 칸이 꼭 타헬을 구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의 행동엔 분명 이유를 알 수 없는 망설임이 있었다.

그래. 칸은 왜 망설인 것일까.

지금껏 봐온 칸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쪽을 늘 선택했다.

형제들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을 내놓고 달려드는 기리나, 가족과 떨어지면 죽는 줄 아는 타헬이나, 개인주의자인 엔지조차 제 누나를 살리기 위해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형제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동안 행동하지 않은 선택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칸이 누군가를 지키는 방식은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게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자크는 그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나자크는 꼭 유리 파편을 씹는 것처럼 입안이 불편했다. 책망하지 않는 투로 말하겠노라 했으나, 영문도 모르고 당한 타헬을 보고 있자니 이성적인 나자크의 음성엔 어쩌지 못하고 감정이 실렸다.

자격지심일까. 칸은 꼭 그 말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처럼 들렸다.

“난 내 형제들이 위험해지는 건 못 참아.”

나자크는 진심이었다.

단순히 무력적으로 당해야만 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정체가 알려지는 순간, 상급 뱀파이어들의 추적은 더 빨라질 것이고 기리가 우려하는 그 상황이 당도할 것이라는 걸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자크는 똑똑히 기억했다. 동생 타헬과 겪었던 그 지옥 같은 순간을. 누구 하나 먼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으나, 내장이 찢기고 피가 솟구치는 그 장면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잊어본 적 없었다.

나자크가 말하는 위험이란 바로 이 수준의 강렬한 위기였다. 자칫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뱀파이어들에게 피가 빨려 죽거나, 썩은 채로 어딘가에 버려지는 것.

그 모든 장면이 꼭 진짜처럼 나자크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런 상상은 그를 끔찍한 고통 속으로 아주 손쉽게 인도했다. 그 기억을 지울 수도, 벗어날 수도 없어 나자크의 삶은 때때로 지옥이다.

그건 나자크뿐만 아니라 형제들 모두가 그러했고, 그 기억의 연대는 그들을 끈끈한 가족애로 묶었다. 그런 제 가족이 조금이라도 위험에 빠진다면 나자크는 남은 삶을 제대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난…… 나는.”

칸의 입술이 떨렸다. 무언가 소리 내 말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얼 이야기해도 고작 변명에 불과할 것이란 걸 알았다. 결국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보기 좋은 헛소리가 될 거라는 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면, 아무것도 보지 마. 차라리 그쪽이 나으니까.”

칸이 대답할 마음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나자크가 가차 없이 일갈하며 돌아섰다.

멀어지는 아이들과 칸 사이에서 갈등하던 미카가 급하게 나자크의 뒤를 쫓았다.

“칸……!”

옥상 계단을 내려가는 나자크를 붙잡은 건 어딘지 애절한 미카의 외침이었다.

“칸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야!”

“……그래.”

나자크는 감정적인 미카의 어조에도 단조롭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그걸 왜 네가 설명하고 있냐는 표정이었으나 미카는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미카는 작은 손을 말아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맺히는 듯했다.

모두가 바보라 해도, 모두가 틀렸다 해도, 그건 결코 진실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칸은 그 누구보다 인간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미카는 그렇게 확신했다.

“칸은 자기가 살아온 방법대로,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는 거야.”

“그래.”

또 반복된 가짜 같은 수긍.

나자크가 천천히 돌아서며 다시 계단을 밟는다.

“누구나 자기 삶은 버거운 법이니까.”

온화하게 받아친 말씨 속에 자비는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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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쾅!

별안간 문이 떨어져라 쾅 닫혔다.

여관 1층에서 시몬과 요한나가 부탁한 식탁을 고치다 말고 기리가 그 소리의 주인을 찾으려 고개를 빼꼼 들었다.

적어도 엔지거나 조심성 없는 타헬이겠거니 생각했건만, 그건 누구보다 섬세하고 얌전할 나자크였다.

게다가 어디서부터 싸우며 들어온 것인지, 발을 동동 구르는 타헬과 나자크의 뒤를 따라붙는 엔지의 표정이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없을 땐 나자크 네가 내 대신이야. 잊지 마. 형제들을 지켜야 해.’

나자크가 입술을 짓이겼다. 하마터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뻔했다.

기리의 말은 강요도 부담도 아닌 믿음과 신뢰였다. 기리는 언제나 형제들에게 그런 존재였으나 나자크는 자신이 그 책임을 이어받아도 될 만큼 자신이 가치 있고 괜찮은 자인지 고민했다.

고작 인간 따위이나, 결코 자신들이 해치지 못할 인간이기에 더 위험했다. 그저 찌르면 찌르는 대로, 밟으면 밟히는 대로,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이 인간들에 대해 늑대인간이 가지는 최소한의 도리였다.

“왜 불똥이 나한테 튀어? 타헬이 휘말린 것도 내 탓이라는 거냐, 지금?”

엔지는 억울함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나자크에게 따지고 들었다.

잘못한 건 빌어먹을 그 인간놈들인데, 왜 혼은 자신이 나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섣부르게 먼저 행동한 건 너야, 엔지.”

“아아, 그래서 크록 그놈 손목을 분질러버리려고 하셨나? 고상하기도 하셔라.”

“비꼬지 마. 꼼짝없이 타헬이 두들겨 맞는 것보단 나았어. 칸은 어차피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인간한테 한 대 맞는다고 죽냐? 그냥 조용히 뒤에서 처리하면 될 걸 굳이……!”

“엔지.”

낮게 떨어지는 나자크의 부름에 엔지가 결국 말을 뒤로 삼켰다. 알고 있다. 그깟 매질 몇 대 맞아줘봤자 생채기조차 안 날 늑대의 몸뚱어리지만, 그 상처는 배가 될 것이라는 걸.

“왜 또 둘이 으르렁거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기리는 단번에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평소와는 달리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함께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이 정도쯤이야 그에겐 기본소양 같은 감지능력이다.

“고고하신 도련님께선 나 같은 싸구려 방식을 싫어하시거든.”

엔지가 차갑게 비꼬았으나 나자크는 흔들림조차 없다.

“대체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얘길 해.”

이미 둘의 시야에 기리는 없었다.

나자크는 2층 제 방 문고리를 쥔 채 차분히 엔지의 잘못을 꼬집었다.

“칸에게 늑대인간에 대해 물어본 건, 아마 네가 태어난 이래로 가장 멍청한 짓이었을 거야.”

“흐음, 네가 내 멍청한 짓의 절반도 못 봤구나?”

“어련하시겠어.”

“둘 다 그만! 혈기왕성한 나이인 건 알겠는데, 계속 어린애처럼 유치하게 싸울 거냐? 그리고 나자크, 너까지 같이 싸우자고 달려들면 어떡해?”

무릇 첫째가 대부분의 잘못을 뒤집어쓰듯 늑대인간 무리 안에서도 그 법칙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수평관계이긴 하나, 형제들 사이에선 제각기 책임감의 무게가 다르고, 그렇기에 기리가 나자크를 나무라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자크가 숨을 고르고 엔지에게서 날이 선 시선을 거뒀다.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나자크는 오늘 하루 제 감정을 능숙하게 다스리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나자크.”

제 방문을 여는 나자크를 기리가 불러세웠다.

대충 주고받는 대화를 보아하니 이 분란의 중심에 있는 건 칸이 분명하지 싶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은 보이질 않으니 당연히 찾을밖에.

“칸은 어때 보였어?”

“짜증 났어. 아주 많이.”

어때 보였냐는 물음에 비뚤어진 대답이 돌아왔다.

신경질적으로 닫힌 문을 보며 기리가 허, 숨을 흘렸다.

좀처럼 나자크에게서 들을 수 없는 적대적인 말씨와 목소리였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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