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단 하나의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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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단 하나의 의심
2022.12.29.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칸은 어디에 있어?’
나자크의 물음에 미카의 사고 회로가 잠시 정지했다.
그건 미카와 이 학교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준비된 문장이었다.
적어도 그저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는 걸 미카는 알아차렸다. 호기심 그 이상의 것을 칸으로부터 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머릿속에 태풍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잠시 멍하게 서 있던 미카가 이내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들어 나자크와 시선을 똑바로 맞췄다.
그건 꼭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눈빛이었다.
“……칸?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의외의 대답이 돌아오자 나자크가 살짝 목덜미를 간질었다. 돌아온 그의 말엔 꼭 무언가를 시험하듯 재는 모양새가 다분했다.
“둘이 친한 거 아니었어?”
“내가 칸과 친한 걸 어떻게 알아? 그것도 방금, 막, 이 학교에 도착한 전학생이.”
전학생에 대해 보였던 적당한 친절과 적당한 호의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미카가 적의를 숨기지 않고 올곧은 눈동자로 나자크를 채근했다.
칸을 이 녀석에게서 떨어뜨려 놔야 해.
결코 이유를 알 수 없는 위기감이 미카를 향해 그렇게 명령하고 있었다.
“말해. 칸을 왜 찾는지.”
나자크는 확연하게 달라진 미카의 목소리의 떨림을 읽었다. 묘하게 상승된 음성과, 뜨거워지는 체온, 모든 것이 늑대인간인 제겐 적나라하게 느껴질 정도의 변화였다.
칸과 이 아이는 무슨 관계일까.
도대체 무슨 사이기에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지. 고작 행방을 물어보는 질문이었을 뿐인데.
-감이 좋은 인간이네. 귀찮게.
상황을 관망하던 엔지가 미카를 슥 보더니 나자크를 거들었다.
아마도 나자크의 질문에서 느껴지는 아주 미세한 위화감을 감지한 것이 분명했다.
인간을 상대하는 것엔 그리 익숙하지 않으니 제 기운을 억누르는 게 나자크로서도 쉽지 않았을 테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알아차리는 인간도 드물었다.
하지만 나자크는 인간의 끓어오르는 감정 변화에 보기 좋게 동요할 만큼 손쉬운 상대가 아니다. 그는 가볍게 미소를 띤 채 능숙하게 날카로운 창끝을 등 뒤로 숨겼다.
“몰랐구나? 난 칸이 운영하는 여관에서 살고 있어. 우리 가족 모두.”
“아…….”
그제야 설명이 되었단 얼굴로 미카가 굳은 표정을 살짝 풀었다.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가던 칸이 떠올랐다.
“의심이 많은 스타일인가 봐. 아님 유독 너만?”
잠자코 있던 엔지가 기어코 창밖으로 클럽 신청서를 접은 종이비행기를 날려 보내며 미카의 신경을 긁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미카는 유독 칸의 문제에 관해서라면 날이 서고 예민해졌다.
이 녀석들은 이제 막 전학을 와 잘 모르겠지만, 칸이 그레이빌 세컨더리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목격한다면 그들의 태도가 언제 달라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레이 여관에서 지내고 있다면, 칸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그건 시몬과 요한나에게 자신의 처참한 학교생활을 들키는 것이다. 누구보다 부모님을 걱정시키는 걸 가장 꺼리는 칸에게 이보다 더 큰 위기는 없다.
“그래서, 칸이 어딨는지 모른단 거지?”
나자크가 실망을 굳이 감추지 않고 미카를 향해 되묻는 그때였다.
“어이, 야채팔이.”
그 부름에 미카의 미간이 꿈틀했다.
오늘은 웬일로 조용히 넘어가나 했더니 그럴 리가 없지. 미카는 시답잖은 것을 상대하기라도 하듯 고개를 돌려 제 뒤에 선 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제 클래스도 아니면서 밥 먹듯 여길 찾아와 굳이 시비를 거는 인간은 크록, 그 녀석밖에 없다.
샛노란 머리에 귀에 너덧 개쯤은 달린 피어싱, 떼 지어 몰려다니는 습성은 고치지도 못하는 건방지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인간. 적어도 미카가 내린 크록에 대한 정의는 그랬다.
“뭔 팔이?”
크록의 노골적인 비하에 미카가 어깨를 뾰족하게 세웠다. 그 반응이 즐겁기라도 한지 크록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그녀를 도발했다.
“들었잖아.”
“어. 들었어. 그러니까 다시 말해봐.”
“뭘 까칠하게 굴고 그래. 너 그거 자격지심이야. 원래 그래, 없이 산 것들이 꼭 없어도 될 것까지 갖추거든.”
“혹시 네 얘기 하니? 하긴. 네 정신 수준이 발바닥이니까 겨우 그런 생각, 그런 단어들밖에 생각 못 하는 거겠지.”
미카는 단 한 번도 전교 1등을 내어준 적 없는 모범생인 데다, 모의고사 상위성적 단골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완벽주의자이자 지독한 학생이었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는 이가 있다면 그건 단연코 칸이었다.
“참 재밌는 일이지? 너희 아버진 때마다 과외며 스쿨캠프며 안 해주는 게 없던데. 넌 겨우 야채팔이한테 힘 한번 못 써보고 밀려나다니, 안 그래?”
“뭐야? 내 땅에 기생해서 사는 주제에.”
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유독 발끈하는 크록을 잘 알고 있는 미카였기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의 약점을 건드렸다. 크록의 반응에 미카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계속 혼자 떠들거면 난 이만 가볼게. 뇌가 팽팽해서 수준 이하인 너랑은 대화하는 게 아주 불쾌한 참이거든.”
미카가 크록을 차갑게 지나치려는 그때, 그녀만큼이나 서로의 약점을 잘 아는 크록이 비싯 웃음을 흘리며 찰나에 미카의 마음을 아무렇지 않게 조각냈다.
“오늘은 칸 그놈 타령 안 하냐?”
“……뭐?”
크록의 도발에 미카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지럽게 몰려드는 생각을 하나씩 제거해가며 그녀가 머릿속 순서를 정리했다.
나자크는 칸을 찾는다.
실제로 오늘 학교에서 칸을 보지 못했다.
순간 미카의 눈이 놀라 번뜩였다.
“칸 어딨어.”
모진 일들을 당하면서도 걱정할 부모님을 위해 단 한 번도 학교를 빼먹은 적은 없는 칸이다.
지금쯤이면 교실 한쪽 구석에 앉아 조용히 음악을 듣거나, 미카가 필요로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지독하게 성실한 녀석이 아침부터 보이지 않는다는 건, 분명 저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이고, 그 일의 주동자는 단연 크록일 확률이 가장 높았다.
“호오, 이제야 반응하네. 얘들도 아냐? 네가 그 덩치만 큰 바보 같은 놈 끼고도는 거.”
“알든 말든 상관없잖아? 그러니까 말해. 칸한테 또 무슨 짓 했어!”
“생사람 잡지 마. 나라고 뭐 맨날 그 악마 새끼만 쫓아다니는 줄 알아?”
또 악마다. 두 사람의 대화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나자크가 그 단어에 반응했다.
크록의 손이 미카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치고 지나간다. 귓가에 닿는 크록의 숨결이 불쾌하기 그지없다. 다시 크록이 손을 미카에게로 뻗으려 할 때 나자크의 발끝이 잠시 꿈틀했다.
엔지는 가족들 일이 아니고서는 크게 반응하는 법 없는 나자크가 미세하게 공격적인 태세를 취하자 덩달아 크록과 미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다행히 나자크가 끼어들기도 전에 미카가 크록의 손등을 차갑게 쳐냈다. 크록은 부러 아프다는 듯 손을 털며 인상을 찌푸리더니, 꽤나 다정스럽게 미카의 귓가에 조롱을 뱉었다.
“잊지 마, 미카. 잘난 네 할머니가 운영하는 그 상점 주인이 나라는 걸.”
“네가 아니라 네 아버지겠지.”
“뭐, 어차피 같은 뜻이잖아?”
크록이 씨익 웃으며 고요해진 반 아이들을 느긋하게 훑었다. 그는 이 그레이빌 세컨더리에서 꼭 왕좌를 틀어쥔 폭군처럼 굴고 있었다.
-유치해서 못 들어주겠구만.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엔지가 이 소비적인 대화가 지루했는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간들의 싸움이란 이토록이나 지지부진한 건가. 자신이었다면 벌써 주먹부터 한 대 날리고 시작했을 텐데.
엔지가 움직이자 나자크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이능력으로 말을 걸었다.
기리가 없는 곳에선 언제나 나자크가 그들의 리더였고, 나자크는 형제들을 책임질 의무가 있었다.
-어디 가, 엔지.
-저것들 꼴 보기 싫어서. 도망 안 가니까 걱정 마.
크록이 밖으로 나가는 엔지와 한쪽에 선 나자크를 향해 손을 살랑 흔들었다.
“반가워, 전학생들.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엔지는 그 말에 반응조차 아까운 듯 무시한 채 교실을 빠져나갔고, 나자크는 그저 묵묵히 크록을 가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건 꼭 자신이 서 있는 영역을 보호하는 늑대의 습성과도 아주 닮아 있는 행동이었고, 미카는 꼭 그것이 사냥할 대상을 탐색하는 맹수의 눈빛 같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자크에게서 위화감을 느꼈던 미카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앞을 막고서 걱정 반 경고 반인 목소리로 말했다.
“크록 무리 애들하곤 웬만하면 안 엮이는 게 좋아.”
보호해주는 건가. 고작 이 작은 몸으로?
늑대인간인 나자크로서는 한 손으로 들어도 무리가 없을 법한 미카의 행동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쟤들은 무서운 게 없거든. 그레이빌 땅 절반이 크록 아버지 거야.”
“흐음.”
미카의 말에도 나자크는 그저 미적지근하게 옅은 숨을 흘렸다.
“뭐야, 그 반응은?”
“그냥.”
“그냥?”
미카의 물음에 나자크는 유유히 돌아서는 크록을 가만 지켜볼 뿐이다.
“무서운 게 없는 게 아니라, 정말 무서운 걸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닐까…… 하고.”
미묘하게 흐려지는 말끝엔 어쩐지 차분한 나자크와는 어울리지 않는 희미한 장난기가 섞인 것 같기도 했다.
고작 오늘 처음 본 거지만 미카는 그 표정이 낯설게 느껴졌다.
“……정말 무서운 거?”
“세상은 넓으니까.”
단조롭게 말하며 돌아서는 나자크의 등을 미카가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잔잔하고 깊은 호수의 밑바닥만큼이나 알 수 없는 사람.
그것이 나자크에 대한 미카의 첫인상이었다.
* *
눈을 뜨고 보니 암흑이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그랬다.
칸은 소각장 뒤뜰에 뿌리 깊은 고목처럼 파묻힌 채 얼굴을 겨우 내밀고 있었다. 뙤약볕에 입술은 말라버린 지 오래였고, 머리칼을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혹시 일광욕 중인데 방해한 건가? 모래찜질 중이라거나.”
땅에서 고개만 내민 칸의 옆으로 낯선 발이 다가왔다.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후각이 뛰어난 엔지는 그레이 여관 곳곳에서 맡았던 칸의 냄새를 따라 용케 이곳까지 찾아왔다.
이 상황이 칸에게 전혀 유쾌하지 않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엔지는 까칠하게 굴고 있었다.
그는 유독 당하는 사람에게 더 모질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연민과 동시에 분노가 늘 함께 이는 것이다.
칸의 머리 한쪽 옆에 대충 쪼그리고 앉은 엔지는, 그저 길가에 핀 잡초를 보는 시선으로 무료하게 말했다.
“보자. 이건 뭐, 반송장이잖아?”
“……엔지?”
쩍 갈라진 칸의 목소리가 엔지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골치 아픈 듯 안경을 살짝 끌어 올렸다.
“너도 참 피곤하게 산다. 아까 그놈들이 한 짓인가? 크록인지 나발인지 하는 것들 말이야.”
인간이 잔인하다는 걸 칸은 이미 오래전의 경험으로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고작 이 흙더미에 파묻히는 것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칸은 발 없는 새처럼 지내는 소년이었다.
존재감 없이 늘 고요했고, 날 수 있는 날개가 있음에도 결코 펼치는 법 없는, 지극히 평범함을 꿈꾸는 사람.
그 평범함에 가장 누가 되는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이다.
땅에 온몸이 파묻혀 있단 사실보다, 들키고 싶지 않은 걸 들켜버린 게 더 괴로운 칸의 얼굴은 금세 그늘로 짙어졌다.
“부모님한텐 비밀로 해줘. 부탁할게.”
“내가 왜 말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정말이지 무관심하고 심드렁한 반응에 외려 당황한 것은 칸이었다.
“네가 무슨 일을 당하든 관심 없어. 난 그냥 너한테만 관심 있을 뿐이거든.”
이건 또 무슨 궤변이란 말인가.
칸이 당하는 일에는 추호도 관심이 없으면서 칸 자체에는 관심이 있다니.
씨익 웃는 엔지의 입술이 붉은 호선을 그렸다.
나자크만큼이나 칸에게 흥미가 있었지만, 그와 같은 종류의 호기심은 아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궁금한 것은 오직 하나.
그건, 처음 칸을 봤을 때부터 싹텄던 단 하나의 의심.
“너, 늑대인간이라고 들어봤어?”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