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레이 여관엔 손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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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레이 여관엔 손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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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레이 여관엔 손님이 없다
2022.12.06.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어둠이 세상을 집어삼켰다.
해가 넘어간 건 아주 잠깐만의 일이었다.
보름이 다가오면 이 마을 주민들은 약속이나 한 듯 더없이 잔인해지고 광포해졌다.
보름밤이 될 때마다 사람의 탈을 쓴 늑대인간이 사람을 먹이로 삼았단 흉흉한 소문이 퍼진 건 1년 전의 일이었다.
이유 없이 사라지는 마을 주민이 스물을 넘을 무렵 사람들의 공포는 정점에 다다랐다. 도시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이 시골 마을을 떠날 돈도, 용기도 없던 주민들은 보름밤이 되면 두려움에 떨며 값싼 술과 약에 취해 겨우 그 밤을 버텨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선량한 자신들에게 계속되는 이 고통과 불행에 대한 분노를 퍼부을 곳을 찾게 된 것은.
그들에겐 그저 마땅한 이유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 나누는 이 대화가 그리 잔인할 것도 없다.
“그 아인 처음부터 소름 끼쳤어. 애초에 자기가 누군지 기억도 못 하잖아. 하필 왜 우리 마을에 그런 끔찍한 것이……! 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맙소사. 오늘 식사 당번이 누구였지? 난 이제 그 창고 근처만 지나가도 두드러기가 날 지경이야.”
“내 순서를 사고파는 것도 지쳤어. 언제까지 그 앨 내버려 둬야 하지? 생각만 해도 역겨워. 그 시든 금빛 눈깔이며, 밀랍인형처럼 죽은 표정이며. 더 이상 저렇게 가둬두기만 할 순 없어……!”
소년이 이 마을에 쓰러진 채 버려진 것은 딱 1년 전의 일이었다.
마을 주민들이 보름이면 사라지기 시작한 바로 그날 밤 말이다.
처음 발견됐을 때의 소년은 아주 작고 왜소한 아이였다. 많이 쳐봐야 고작 예닐곱 정도의 몸집이었다.
그날 밤 소년을 키우겠노라 데려갔던 마을 초입의 쌍둥이 보모가 실종된 이후 돌아가며 소년을 도맡아 온 마을 주민들은 그의 성장 속도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다.
1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소년은 중학생 정도의 몸집까지 빠르게 커졌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사라졌다.
불길한 존재로 인식된 그는 결국 떠밀리다시피 혼자 사는 철물점 주인의 집에 마지막으로 맡겨졌다.
하지만 그것이 시작이었다. 다음 날 철물점 주인은 피가 모두 빨린 채 몰살당한 산짐승들이 집 앞마당에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곤 그 자리에서 소년을 철물점 창고에 가둔 채 도망치듯 모든 걸 버리고 마을을 떠나버렸다.
그때부터였다. 모두가 암묵적인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창고에 소년을 가둬두기로 한 것은.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몸, 기이한 잿빛 머리칼, 형형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 가족도 연고도 없이 모든 기억을 잃고 버려진 이질적인 소년은 결코 사람들의 마음을 열지 못했다.
소년은 종종 인간이라기엔 기이할 정도로 오감에 탁월했고, 커지는 몸을 감당하지 못해 열흘에 한 번 새 옷을 지어 입었으며, 빠르게 자라는 잿빛 머리칼을 감추려 머리를 올려묶곤 했다.
사라지는 주민들의 수를 세길 포기할 무렵, 소년은 마을의 사내들에게 강제로 붙잡혀 사람을 잡아먹는 늑대인간으로 내몰렸다.
가구 수가 얼마 되지도 않는 이 좁디좁은 곳에서 소년은 공포의 대상이요, 사람들이 사라지는 이 마을의 재앙인 것이다.
소년은 이 모든 비극을 안고 갈 어린 희생양이었다.
소년이 창고에 갇힌 이후로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사라졌지만, 이미 주민들은 판단력과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다. 그중 약에 취한 젊은 사내가 앉은 상을 쾅 내리쳤다.
“그놈이 보름밤마다 탈출하는 게 분명해. 그러곤 앙큼하게 아닌 척 붙잡혀 있는 거라고! 그래야 사람을 더 잡아먹을 수 있을 테니! 이젠 정말 해치워야 해.”
“안 돼!”
곧장 말문을 막으며 소리친 건 이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90대 노파였다. 그녀의 한쪽 눈은 병변으로 이미 하얗게 멀었으나, 눈이 먼 만큼 그녀는 다른 것을 보았다.
“그 아일 죽이면 분명 저주가…… 저주가 내릴 거야! 우린 다 죽을 거라고!”
낯빛이 사나워진 노파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영매인 어미의 손에 자라 이곳을 단 한 번도 벗어난 적 없는 여인이었다.
이 마을은 버스 정류장까지도 차로 두 시간인 데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발전된 바깥 도시와는 교류가 전혀 없는 외진 마을이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전래의 미속 신앙에 의지했고, 끈끈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을 한 노파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은 점차 하얗게 질렸다.
“지, 지금 무슨 정신 나간 소릴……!”
“저 말이 맞아! 설사 죽인다고 쳐. 그럼 누가 처리할 건데? 돌변해서 우릴 잡아먹기라도 하면? 허투루 움직였다간 우리가 먼저 죽어!”
마을 주민 하나가 노파의 말에 동의했다. 취한 사내의 말처럼 그 소년을 ‘처리’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차라리 경찰에 넘겨버리는 건 어때.”
“말이 되는 소릴 해! 증거가 있길 해, 목격자가 있길 해. 우리 말을 경찰들이 믿어줄 거 같아? 게다가 우리가 그놈한테 한 짓을 알면……!”
여자는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저 지금은 이 밤을 새우고 날이 밝아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미 몰락해버린 마을의 생존자들에게 선량한 도덕심이나 인간적 선의 같은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이미 망가졌고, 지옥이 있다면 자신과 같은 몰골이 분명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정말 늑대인간 짓일까?”
갓난아이를 꽉 끌어안은 젊은 여인의 중얼거림에 좌중이 불안감에 휩싸이는 때였다. 꺼어억, 거나하게 취한 사내의 트림이 무거운 침묵을 갈랐다. 육중한 사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 먹은 마룻바닥이 갈라진 소리를 냈다.
“거 쓸데없는 소리들 그만하고, 돈이나 내놓으쇼.”
마을 주민들은 돌아가며 번을 섰다.
마을의 버려진 창고에 가둬둔 소년에게 이 풀죽도 뭣도 아닌 음식을 보름밤엔 서로 나르지 않으려, 돈을 주고 순서를 바꾸기도 했다. 그만큼이나 창고 속의 그 ‘무엇’인가는 그들에겐 지나칠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인 것이다.
커다란 보름달이 점차 어둠을 집어삼킬 즈음, 거구의 사내는 육중한 몸으로 질퍽이는 진흙밭을 밟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움푹 팬 발자국 안으로 빗물이 고여 들었다.
곧이어 산길 초입에 버려진 창고의 양 문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음습하고 차가운 기운이 가득한 곳곳엔 썩은 곰팡이 냄새와 마른 짐승들이 토해낸 오물의 역한 내가 뒤섞였다.
차르륵-
이질적인 쇳소리에 사내의 감각이 잔뜩 예민해졌다.
해가 들어오지 않는 창고의 한쪽 구석엔, 꺼져가는 불빛만큼이나 위태로운 숨이 하염없이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피부가 헐어버린 목에 채워진 가죽 목줄, 양팔에 연결된 녹슨 쇠사슬은 조금씩 몸을 비틀기만 해도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출렁였다.
한쪽 벽에 매달린 것은, 마치 무력하게 박제된 죽은 새처럼 날갯짓을 멈춘 한 소년이었다.
소년의 팔목은 이미 짓무를 대로 짓물렀으나 그는 작은 신음조차 내질 않는다. 통증을 못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계속된 가혹함에 감각을 잃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도 짐승도 아닌 취급을 받는 소년에게 사흘에 한 번 찾아오는 식사시간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언제 마지막으로 물을 마셨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소년의 이름은 ‘칸’.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그때부터 그의 이름은 이미 칸이었다.
사람들은 칸이 늑대인간이라 확신했다.
매달 찾아오는 보름마다 칸은 인간의 모습 그대로였으나 마을 사람들의 공포는 극에 달해 있었다. 인간은 잔인했고, 조악한 공포는 너무나도 손쉽게 죄책감을 집어삼켰다.
“물…… 물을.”
칸의 낮고 깊은 음성이 건조하게 갈라졌다.
시퍼렇게 부풀어 오른 두 눈덩이로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칸은 절망했다. 돈을 받고 보름밤의 번을 가져온 거구의 사내는 마을에서 작은 정육점을 운영하는 자였다.
적어도 과일을 파는 노점상 주인이나, 그릇 가게의 소녀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들이라면 적어도 떠는 손으로 반쯤은 버려질 물을 입에 넣어줬을 테니.
이미 사내는 음흉하고 가학적인 눈으로 발밑을 살피며 무기가 될 만한 것을 고르는 참이다. 사내에겐 모두가 꺼려 하는 이 일이 꽤 적성에 맞는 모양새였다.
깨진 창문 밖으로 소리 없는 번쩍임이 내리쳤다. 고요한 번개였다. 칸은 있는 힘껏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자칫 방심했다간 이가 부러질 것이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내며 칸의 얼굴이 반대쪽으로 홱 돌아갔다. 칸은 스스로 이 아픔이 제법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사내를 더 화나게 한다는 사실도 알았지만, 제 몸의 반응이 그러했다. 신음조차 흘리지 않는 칸을 보며 사내의 숨이 흥분으로 가빠졌다.
“이거 봐, 이거! 네놈이 역겨운 이유가 바로 이거야. 아프면 소릴 질러야지, 살려달라고 내 발밑에서 애원해야지! 건방진 자식! 네까짓 게! 천박한 놈이 감히……!”
어둠 속에서도 칸의 잿빛 머리칼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고귀한 대접을 받아본 적 없는 소년이었으나, 그는 꼭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야윈 가운데도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확인받을 때마다 사내는 더 모질어졌다.
매질은 꽤 오래 이어졌다. 잠시간의 고통이 끝나고 나면 칸은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내가 가져온 것이 깨끗한 물이 아닐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오랜만에 맡는 물비린내에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다.
칸은 인간이고자 했다.
모두 저를 향해 괴물이라 했으나, 그럼에도 인간이고자 했다.
그 생각이 패착이었을까. 몸이 노곤해진다. 충분히 버틸 수 있었음에도 칸은 자의로 제 눈을 푹 감았다. 이대로 잠에 빠진다면 그것 또한 좋은 일이었다.
“오, 하느님. 여보, 어쩌면 좋아요.”
요한나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모아 기도하며 육성으로 터져 나오는 제 경악을 억지로 삼켰다.
우연히 바라본 창가 안의 풍경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요한나의 남편인 시몬은 제 아내를 깊이 끌어안았다. 그들은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차마 믿지 못했다.
부부는 여행 중에 잠시 머문 이 마을을 떠나기 위해 새벽길을 나서는 참이었다. 그들은 선량하고 따듯한 사람들이었으나, 오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랬기에 지금 이 상황을 더 받아들이기가 괴로웠다.
쾅,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식은땀을 흘리며 나온 사내의 시선 끝에 부부가 보였다. 그는 경직된 채 빳빳하게 굳어 있는 부부를 잠시 노려보다 묽은 가래를 바닥에 뱉어냈다.
“저쪽으론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아주 더럽게 재수 없는 놈이 살고 있거든.”
부부의 눈빛은 불안하게 떨렸다. 그들의 눈에 칸은 그저 평범한 아이 같았다. 저런 취급을 당할 이유 같은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찾아낼 수도, 이 마을의 사람들을 결코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칸의 숨은 얕고 조용했다. 오늘도 내일도 이 소년에겐 다를 바 없었다. 이대로 모든 것을 멈출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점차 깊은 물 속으로 칸의 의식이 가라앉는 때였다.
“아가…… 아가?”
꼭 기도문처럼 들려오는 희미한 음성에 앞으로 푹 꺾인 칸의 목울대가 움찔했다.
요한나는 칸의 갈빗대 언저리에 시퍼렇게 든 멍을 보며 울음을 삼켰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이런 모질고 잔혹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인가.
무엇이 진실인지 끝내 구별해내지 못한 채 그녀는 제 남편의 손을 꽉 쥐었다. 그것은 명백한 두려움과 동시에 불안함을 짓누르는 용기였다.
“……우리와 함께 가지 않겠니?”
처음 듣는 따듯하고 포근한 목소리였다. 사람이 저렇게 온화한 말씨를 낼 수 있었던가. 그런 사실조차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지 오래인 칸의 눈동자엔 물기가 어렴풋이 맺혔다. 그것은 슬픔이 서성인 흔적이었다.
빌어먹을. 다시는 인간을 믿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갈래요.”
다시는 인간을,
“데려가 주세요.”
인간을…….
“그래, 아가. 이리 온.”
칸이 널찍한 품에 으스러지듯 쓰러졌다.
실로 이렇게나 따듯한 감촉은 처음이었다.
창고 밖을 도망쳐 나오던 날, 칸은 1년 만에 보는 찬란한 새벽빛에 뛰던 걸음을 멈췄다. 잠시 올려다본 하늘이 이토록이나 아름다울 수 있단 사실에 칸은 문득 슬퍼졌다.
지독한 보름의 밤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 *
그레이 여관은 라일락 숲으로 들어가는 경계선 바로 앞자락에 위치한, 아주 작고 허름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2층짜리의 낡은 목조건물이었다.
큰 길이 나지 않은 골목으로 들어가 가장 끝까지 돌아야만 발견할 수 있는 이 여관은 그레이빌의 유지들이 모여 사는 도심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으로, 굳이 찾아와 억지로 둘러 보지 않는 이상 발견하기조차 어려웠다.
해안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도시 그레이빌은, 운송사업인 무역으로 시작해 제철과 조선업으로 번영한 대표적인 연합도시였다. 이 외에도 바다로 둘러싸인 도시답게 어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아 풍부한 해산물은 기본인 데다, 바닷가 풍경이 좋아 오가는 관광객들로 연일 들끓었다.
사시사철 공장이 돌아가고, 밤낮없이 불빛은 환한, 누구 하나 게을리 사는 사람 없는 이 도시는 언제나 분주했다.
하지만 칸의 가족은 사는 곳은, 도시의 명물인 해안가가 보이는 언덕을 지나, 차나 전철로 30분쯤 들어가야 볼 수 있는 주거지역으로, 재개발에서 밀려난 허름하고 노후한 주택들이 몰려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 여관엔 늘 손님이 없다.
아침부터 요한나와 예약한 병원을 가야 하는 시몬은 정신없이 바빴다. 그는 20년도 더 된 제 차에 시동이 걸리지 않아 벌써 몇 분째 한자리에서 끙끙대는 중이었다.
“제가 봐 드려요?”
칸이 슬쩍 다가가 말을 걸었지만 시몬은 시뻘게진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놈은 너보다야 내가 잘 알지. 같이 산 세월이 얼만데.”
안간힘을 다 쓰고 나서야 힘겹게 시동이 걸린 차를 보며 시몬이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머쓱하게 미소 짓고는 칸에게 당부했다.
“금방 돌아오마. 혹시 손님이 오면…….”
“손님이 오면요?”
칸이 장난스럽게 되묻자 시몬이 그 표정의 뜻을 다 안다는 듯 호방하게 웃었다.
그렇다. 이 여관엔 늘, 언제나, 손님이 없다.
“필요한 건 없니? 돌아오는 길에 사다 주마.”
“전 괜찮아요. 전 그냥…… 엄마 다리가 걱정돼요.”
조심스런 칸의 대답에 시몬이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헝클였다. 최근 들어 관절통이 심해진 요한나는 부쩍 앉아서 생활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시몬은 어른답게 의연히 제 아들을 안심시켰다.
“그런 건 우리 나이엔 다 친구란다.”
이맘때쯤의 소년에겐 혼자 있는 시간이 귀함을 부부는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낡고 작은 여관에 일손을 도울 사람을 들일 만한 경제적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부부는 뭐든 군말 없이 척척 해내는 제 아들이 그저 대견하고 고마울 뿐이었다.
시몬은 제 아들의 잿빛 머리칼을 기특하다는 듯 애정을 담아 헝클였다. 자신이 작은 키가 아님에도 꽤 팔을 높이 뻗어야 한다는 사실에 그는 또 한 번 놀랐으나 이내 표정을 급히 감췄다.
폭풍우가 몰려오던 보름밤. 칸을 데리고 도망치듯 그 마을을 떠난 것이 벌써 6년 전 일이었고, 이 그레이빌에 정착한 지는 햇수로 이제 3년째였다.
그사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소년은 따스한 보살핌으로 햇살 같은 미소를 되찾았고, 어느 평범한 노부부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아이가 되어 건강하게 자랐다.
칸이 남들과는 다른 성장을 한다는 사실이 부부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그들은 종종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사를 다녀야만 했다. 칸이 사람들 눈에 띌 때면 약속이나 한 듯 기이한 소문이 따라붙고 학교생활이 순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몬은 이 그레이빌이 마음에 들었다.
적당히 활기가 도는 가구 수에, 집집마다 거리는 꽤 떨어져 있고, 가속화된 산업화와 도시발전으로 사람들은 서로의 삶에 큰 관심이 없다. 그것이 부부가 칸과 함께 이 도시에 정착한 이유였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리고 실은…….”
칸이 말끝을 흐리자 시몬이 제 아들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실은?”
“안데르스 가게의 초콜릿을 먹고 싶어요.”
“하하. 그래. 꼭 사다 주마.”
칸은 언제부턴가 아주 진하고 자극적인 맛이 아니면, 혀가 맛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까지 제 부모에게 알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부모님은 한 번도 제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분명 지금만도 벅찰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칸의 마음은 충분히 괴로웠다.
부부를 배웅한 칸이 주방으로 돌아와 작은 유리창을 활짝 열었다. 저 멀리 보이는 라일락 숲은 하늘을 가린 울창하고 푸른 녹음으로 미로 같은 숲길을 내고 있었다.
그레이빌에서 저 거대하고 아름다운 숲길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칸이 유일했다.
작년 여름엔 라온 상점의 손녀 미카의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아주기도 했고, 재작년 여름엔 치매 걸린 세탁소 주인 할아버지를 한 시간 만에 찾아온 적도 있었다.
라일락 숲의 입구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여름이 시작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이 한 계절 동안 칸은 꽤 바빠질 것이다.
칸이 간이 조리대 아래 수납장을 열어 무거운 상자를 손쉽게 들어 올렸다. 그건 마치 깃털이나 솜사탕처럼 손쉽게 들린 바람에 누구도 그 안에 든 것이 작물임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칸은 능숙하게 곰팡이가 핀 과일과 야채를 골라냈다.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여관이라 음식을 많이 들여놓지 않는데도, 항구 도시답게 습하고 더운 그레이빌의 날씨를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상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종종 제 가족이 여관을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했다.
쾅쾅-
칸이 본능적으로 반응한 제 귀를 잠시 의심했다.
인기척이다. 그것도 서넛 정도의 제법 큰 몸집을 가진.
쾅쾅- 쾅쾅쾅-
두어 번의 두드림이 반복되고 나서야 칸이 몸을 낮추고 1층 현관문을 내려다봤다.
칸은 남들보다 비범한 제 오감에 집중했다. 작지만 분명하게 들려오는 남자들의 웅성임, 게다가 어딘지 낯설지만 흥미를 끄는 향기.
이것은 흔히 이곳 사람들에게서 맡아왔던 냄새가 아니었다.
그레이 여관엔 언제나 손님이 없다.
그런데,
쾅쾅쾅-
손님이 없어야 할 이 여관에, 손님이 나타났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