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0003, 0005 (13)
단천은 수없이 쏟아지는 비바람을 모조리 잘라냈다. 몇십 번이나 잘라내고 갈랐는데도 멸겁천이 만드는 세계는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자연이라는 것은 돌고 도는 것. 검으로 자연의 흐름을 끊는다고 해도 그 흐름까지 모조리 끊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장기전이 된다면 단천 자신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하다는 뜻.
상대는 무한히 내공을 끌어다 쓸 수 있는데 자신은 내공이 쓰는 족족 줄어들어 버린다.
불합리하기 그지없는 상황. 단천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신화경에 오른 무가 불합리하지 않다면. 그것이 오히려 비웃음을 살 일이지.”
산을 가르고 바다를 베어내는 것이 신화경의 무인들이다. 처음부터 합리적이지 않은 경지가 바로 신화경의 경지다. 그런 자들의 싸움에서 합리를 이야기해 봐야 의미없는 일.
단천의 검이 움직이는 것을 그쳤다. 자연의 형상을 한 기의 폭풍이 단천의 몸을 휩쓸어버렸다.
바람의 형상을 한 기의 폭풍이 단천의 몸을 쪼개고 부서트렸다.
신화경에 오른 신체라 할지라도 걸레조각으로 만들어버릴 수준의 공격.
바람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 서 있는 단천의 모습은 빈말로라도 멀쩡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바라본 멸겁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 포기?”
저 인간의 무는 상상 이상으로 특이하고, 강하다.
한창 재밌어지려고 하는 중에 갑자기 포기하다니.
“비겁해.”
“포기한 적 없으니 걱정 마라.”
멸겁천이 다시금 뭐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 단천이 들고 있는 광선검에서 검울음이 터져나왔다.
고오오오!
섬뜩할 정도로 기운이 응축되어 있는 단천의 검을 확인한 멸겁천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미쳤어.”
저 인간은 자신의 공격 한 번을 오롯이 몸으로 받아냈다. 그러면서도 피하거나 받아치지 않았다.
오롯이 검에 기운을 모을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피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피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신체내구도만을 믿고 벌인 어처구니없는 도박수.
“잘못하면 죽었어.”
“안 죽을 걸 알고 있었다.”
“거짓말.”
“본좌는 천지 아래에 모르는 것이 없다.”
걸레짝이 된 채로 저런 뻔뻔한 말을 뱉어내는 것이 얄밉지만 저 검에 걸려 있는 기운의 양은 보통이 아니다.
안 그래도 단천의 검이 만들어내는 예기에 세상이 몇 번이고 쪼개졌던 터다.
그 두 배가 넘는 기운이 지금 단천의 검에 서려 있다.
예사롭지 않은 일격. 하지만 신체는 한계에 달해 있다. 저 일격을 사용하고 나면 싸움은 끝난다.
막아낼 수 있냐고?
“막을 거야.”
단천의 검이 어처구니없는 수준인 것은 사실. 하지만 그 힘이 배가되었다고 해서 막아내지 못할 것은 없다.
멸겁천의 도가 처음으로 움직여 향해 치켜올라갔다.
“이제야 검을 들어올리는군.”
“검이 아니라 도.”
“도인지 검인지는 이 일격으로 결판날 테지.”
단천의 몸이 멸겁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멸겁천이 만들어낸 풍광의 모든 것들이 단천을 향해 떨어져내렸다.
하지만 단천은 신경쓰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쏟아져내리거나 말거나. 해야 하는 것은 단 하나.
눈 앞의 적을 베는 것.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것을 무시한 채 날아드는 단천을 바라보며 멸겁천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동귀어진이나 다름없는 일격.
고작 상대를 이길 실낱같은 가능성을 위해 생명을 거는.
부자연의 극치.
전진하던 단천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진다. 단천의 몸을 감싸던 기운의 크기또한 줄어들어서 없는 것이나 다름없어진다.
둘 사이의 거리는 열 장이 넘어간다. 이 정도의 거리에서라면 그 어떤 공격도 멸겁천에게 닿기 전에 피해내거나 막아낼 수 있다.
“승부. 결착.”
승부는 났다. 멸겁천은 담담하게 단천을 바라봤다. 온 몸이 거의 다 부서져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사앹다. 이런 상태가 되는 순간까지도 놓지 않은 검.
그리고···.
“누구 맘대로. 승부가 났지?”
승리를 확신한 멸겁천조차 질려서 물러나게 할 정도로 승부욕으로 타오르는 눈.
무엇을 그가 노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무인으로서의 멸겁천이 다져온 감. 그리고 상단전이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지금 당장 피해야 한다고.
‘피해야···!’
단천의 검이 아래에서 위로 움직였다. 검이 움직인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공. 그런데도 무언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거칠게 들려왔다.
“···어?”
그리고 자신의 몸에 박혀 있는 검디검은 광선검.
분명히 열 장 너머에 있던 광선검이 자신의 몸에 박혀들어 있다.
검은 베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적의 무기를 베고, 눈 앞의 적을 베는 것.
극의에 다다른 검은 원하는 무엇이건 벨 수 있다. 그리고 단천이 베기로 선택한 것은.
‘공간.’
십 장에 가까운 공간을 거리를 베어버린다. 말은 쉽다. 글자 그대로 말만 쉽다.
어디 공간이라는 것이 베고 싶다고 벨 수 있는 것이던가. 눈에 보이거나 느낄 수 있는 자연물과는 달리 공간은 그것을 자각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자연의 모든 것에 검기를 담는 데 걸렸던 시간의 배는 더 써야 공간에 대해 어렴풋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눈 앞의 인간은 자신과의 싸우는 시간 안에서 성장해서 공간을 베는 데까지 다다랐다.
“···어떻게?”
“뭔가를 해 보겠다는 생각은 너만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공간을 베어 가른다는 ‘생각’자체는 단천도 기나긴 시간 고심해 오던 주제였다. 깨달음 직전에 존재하는 이론적 토대는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그것이 멸겁천의 자연도라는 계기를 만나 개화했을 뿐.
멸겁천을 만나지 않았다면 완성되지 않았을 검. 그리고 멸겁천을 만나는 순간 완성된 검.
그리고 그 검 안에, 자신의 도刀가 있었다.
“···당신. 내 제자.”
“뭐래.”
“자연도. 당신 통해 이어져.”
“자연도가 아니라 자연검.”
멸겁천이 싱긋 웃었다. 이름이야 무슨 상관이던가.
“···자연도.”
그러니 어차피 이름이 상관없다면 그것은 도刀여야만 했다.
자연도라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멸겁천에게 한 마디를 쏘아붙이려던 단천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0005가 사망했습니다.]
[BJ천마의 승리입니다.]
이름 정하는 중에 비겁하게 죽어서 도망치다니. 이런 상태면 이름을 자연도라고밖에 할 수 없···.
“아니. 암만 생각해도 자연검이지. 자연검.”
하마터면 감성에 넘어가서 중요하기 짝이 없는 이름에 허접한 도같은 무기를 붙일뻔했다.
역시 전 천마라서 그런지 어미어마한 감성팔이였다.
***
[오늘 멸겁천 싸움하는 거 봤나? ‘기’라는 거, 사용하면 저런 것도 되는 거냐?]
[ㅇㅇ 이거 활용성이 어마무시한 것 같더라고 ㄷㄷㄷ]
[거의 샌드박스급 활용도던데?]
[문제는 사용하는 데 난이도가 너무 높다는 거; 조종 좀 쉽게 해 주면 안 되냐?]
VR게임 게시판은 지금 ‘기’에 대한 이야기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비단 VR게임 게시판 뿐만의 일은 아니었다.
스트리머 게시판, 게임 개발 게시판, 게임 플레이 공략 게시판 등등. VR게임에 직간접적으로 관심이 있는 다른 게시판들도 ‘기’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한국 내에서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GI를 사용하는 방법 : 매커니즘이 어떻게 됩니까?]
[이 기를 사용하는 것. 채식과 관계있습니까?]
[명상을 하면 기를 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실험 결과를 포함합니다.]
일본, 중국, 아프리카, 유럽, 북미, 남미. 온 세계 가지각색의 게시판 모두가 지금 ‘기’를 주제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야 당연했다. 본래 게임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오감으로만 국한됐다.
얼마 전부터 ‘기’라는 플레이가 생겨나고부터는 새로운 감각을 사용한 플레이의 길이 열리게 되기는 했지만.
이 ‘기’를 사용한 플레이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까지 가능하냐는 아직까지 미지의 영역이었다.
BJ천마와 패도천의 싸움은 화려하기는 했지만 ‘기’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비슷하게나마 흉내는 낼 수 있었다.
반면. 멸겁천과 BJ천마의 전투 달랐다. 기로 한 세계를 만들고 그것으로 싸우는 멸겁천의 모습은 ‘기’를 사용한 플레이가 얼마나 다채로워질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것은 물론 BJ천마가 마지막에 보여준 한 수.
[공간을 잡아찢는 것도 기로 할 수 있는게 말이 되냐 ㅋㅋㅋㅋ]
[몇번 시도해봤는데 말도 안 됨 ㅋㅋㅋㅋㅋ]
기를 컨트롤하는 실력을 통해 할 수 있는 플레이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이 밝혀진 지금. 그리고 이 ‘기’라는 것이 거의 모든 게임에 사용될 차세대의 감각 매커니즘이라는 게 밝혀진 지금.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기’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로 자연스럽게 쏠리게 된 것이다.
[BJ천마처럼 공간 잡아찢으려면 몇 시간정도 하면 됨?]
[1000]
[??? 1000시간으로 그게 된다고?]
[년]
[와 겨우 1000년만 하면 BJ천마처럼 할 수 있음?]
[딱대라 오늘부터 천년수련법 간다 ㅋㅋㅋㅋㅋ]
새롭게 나타난 매커니즘에 대해서 사람들은 열광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빠르게 무림이 자리잡겠군.”
“그 무림이라는 거. 정말 만들어지는 거 맞아?”
풀창고가 가볍게 툴툴거렸다. 지금 자신들이 열심히 수련해 온 것이 결국 ‘기’를 잘 다룰 수 있는 능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이미 알게 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매커니즘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면서 기를 다루는 수많은 방식이 생겨난다는 것은 쉬이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믿기 싫으면 믿지 않고 탈교하면 된다.”
탈교하려면 목 자르고 북쪽으로 일곱 걸음 걸어야 한다며.
사실상의 강요나 다름없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풀창고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옆에 앉아있는 제로콜도, 정유채도, 토끼가면도 마찬가지다.
결국 BJ천마. 단천이 하는 일은 작든 크든 자신들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을 듯이 괴롭히는 훈련을 빙자한 살해시도를 따라가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은 자신들의 실력이 훈련을 거칠수록 올라간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은 왜 이렇게 빨리 훈련이 끝난 거야?”
평소라면 바닥에서 슬라임처럼 퍼져 있을 때까지 훈련을 쉬지 않았는데. 오늘의 단천은 무슨 일인지 그들을 죽을 듯이 몰아치지 않았다.
“···어쩌면 세상이 멸망하는 거 아닐까?”
“뭔 뜬금없이 세상 멸망이야.”
“왜? 멸망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거라고. 갑자기 운석이 떨어진다거나.”
“방송 안 봤냐? 운석은 천마 형이 자르면 되지.”
“외계인이 나타난다거나.”
“외계인도 천마 형이 갈라 버리면 되지.”
“천마 사부가 세상을 멸망시키고 싶어졌다거나.”
“···그건 큰 문제가 되긴 하겠다.”
진지한 건지 아닌 건지 모를 대화가 진행되고 있던 와중. 단천이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다 됐나?”
“···대충은.”
“거기는 잘 보이나?”
[잘 보여요.]
서유나의 작업실이 작은 휴대폰 화면 너머로 보인다. 단천은 서유나도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를 원했다.
할 일이 넘쳐나고 있는 시점인 데다가 ‘훈련’을 하지 않은 몸인지라 훈련에 직접 참가를 하지는 못한 채지만.
“오늘 본좌는 단순하지만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너희를 불렀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렇게 분위기를 잡는대.”
잠시 뜸을 들인 단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무인 아닌데?”
“시끄럽다.”
단천은 한 마디로 자그마한 반란을 진압했다.
할 이야기가 많은데 헛소리나 하고 있다니. 저래서야 누가 봐도 무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법한 몸가짐 아니던가.
“그러니까. 우리는 무인 아니라니까?”
“시끄럽다.”
웅웅거리는 단천의 기운에 짓눌린 풀창고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누군가 말했던가.
하지만 돌아가는 지구도 멈출 수 있는 인간을 상대로는 그런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풀창고들이 어렴풋이 깨닫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