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천마-205화 (205/212)

44. 0003, 0005 (12)

인간의 무武는 자연에 있는 것들을 흉내내어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이 처음 만들었던 무기는 짐승의 발톱을 흉내낸 것이었다.

인간의 싸움의 형상은 동물들의 것을 흉내내어 만들어졌다.

무공의 근원은 자연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자연을 완전히 흉내낼 수 있다면, 그 자는 단언컨데 천하제일인을 자처해도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는 게 글자 그대로 자연을 갖다 쓰라는 말은 아니었을 텐데.’

손자가 말했던 풍림화산風林火山은 그저 병법의 비유일 뿐이었거늘. 그걸 가져다가 자연을 그대로 무기로 쓸 생각을 하다니.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야.”

> 죄송한데 바람을 죄다 막아내는 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단천의 검은 쉴새없이 움직여 조그마한 반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바깥에서 날아오는 모든 바람마저 막아낼 수 있는 완벽한 방어수단.

놀랍기 그지없는 방어였지만. 이 방어가 영원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촘촘한 그물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바람을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으니까.

서걱!

쏟아지는 광풍을 수없이 받아내던 단천의 검 사이를 비집고 나온 한 줄기 바람이 단천의 뺨을 스쳐지나갔다.

> 이걸 맞네

> 10분동안 바람을 막는 인간이 대단한 건지 끝끝내 뚫고 들어온 바람이 대단한건지 모르겠다

> 저거 인간 맞음?

“인간 맞다.”

물론 바람과 함께 날아드는 내공의 양은 패도천의 검기에 비하면 얄팍하다. 하지만 바람은 검격에 비하면 훨씬 자유롭다. 검의 움직임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자유로움과 복잡함이 바람 속에는 있는 것이다.

바람이 지나쳐간 자리에는 거대한 불꽃이 주변을 휩쓸어나가고, 불꽃이 잦아든다 싶으면 태산만한 크기의 산이 위에서 찍어누른다.

단천의 검이 내리누르는 산을 통째로 베어냈다. 거대한 기로 만들어진 산이 그대로 부숴져내렸지만 멸겁천은 그리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부숴진 자연은 다시 돌고돌아 주변의 풍경이 된다. 단천이 패도천을 상대할 때 사용한 순환의 더 큰 형태다.

‘내공을 소모해서는 답이 없겠군.’

상성이 그리 좋지 않다. 자연을 저 정도로 따라하는 것은 자연을 충분히 관찰한 뒤에야 할 수 있는 일이므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멸겁천의 무공은 순간에 보고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당연하지 저걸 어케 따라해

“아무리 본좌라도 저걸 따라하려면 일주일 정도는 걸릴 거다.”

> ???

그러니. 다른 방식으로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 풍림화산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화산파또한 그 매화를 흉내내어 검에 싣지 않던가. 화산파가 하고 멸겁천이 하는 것이라면 자신이라고 못할 것이 없다.

다만 조그마한 문제가 있다.

‘뭘 따라한다.’

단천 자신은 자연에 대해서 크게 묵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천마신교 자체가 자연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문파인 데다가 단천은 땡중이나 말코도사들을 두드려패는 데 주력했지 그들이 따라하고자 하는 자연물을 유심히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일단 매화이십사식으로 시작해 볼까.”

촤라라락! 극성에 이르른 매화이십사식이 단천의 손에서 펼쳐졌다.

> 오

> 개멋있음

> ㄹㅇ

하지만. 극성에 이르른 매화검이 바람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애초에 매화에 대한 깨달음이 매화검수들만큼 깊다면 바람에 대항해 움직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단천의 깨달음은 그만큼 깊지도 못했다.

애초에 매화란 소리를 찌불거리면서 다니는 말코중에 단천보다 강한 인간이 없기도 했고.

촤자자자작! 단천이 입고 있는 옷이 거칠게 찢어졌다.

“에이씨.”

단천은 빠르게 매화검을 버렸다. 매화주를 주기적으로 상납받아서 줄창 마셨던 덕에 그래도 좀 괜찮게 나올 줄 알았는데. 실패다.

하여간 도가 놈들은 입만 살았지 제대로 하는 게 없다.

도가의 수많은 진인들이 들었다면 살기를 풀풀 날리며 덤벼들었을 생각을 하던 단천은 이후로도 여러 무공을 시험해 봤다.

소림에서 대나무를 보고 만든 죽립탄竹笠彈, 개방에서 달을 보고 만들었다는 월취봉月取棒, 북해빙궁에서 눈을 보고 만들었다는 백설건곤까지.

중원에 있는 자연이 들어간 무공은 죄다 가져다 썼지만 쓸 때마다 멸겁천의 바람에 쓸려나갈 뿐이었다.

그야 당연했다. 결국 자연을 흉내내 만든 무공은 그 자연지물에 대한 관찰과 깨달음이 필요한 법.

자연이랑은 전혀 관계없이 살아온 인간이 그 극의를 바로 깨달아 쓸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당신. 약해.”

계속 도를 쥐고 있는 멸겁천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도발하는 표정이 아니어서 더 열받는다.

“자연. 오래. 묵상.”

오랫동안 자연을 바라보고 묵상해야만 자신처럼 될 수 있다는 소리.

우습다.

“무언가가 가능하고 불가능하다는 잣대를. 감히 본좌에게 들이대는 거냐?”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

단천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자신의 한계를 규정지을 수는 없다.

조그마한 오기가 생겨난다.

“그토록 자랑하는 자연을 흉내내는 자연검.”

“자연도.”

“자연검을. 그대로 부숴 주지.”

단천은 매화도, 눈도, 대나무도 흉내낼 수 없다. 자연을 바라본 적이 없으니까.

단천은 검을 들어올렸다.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기수식이다. 자연에 있는 그 어떤것도 따라하지 않은 기수식. 그렇기에 언뜻 기수식은 평범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본좌의 자연검이. 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마.”

서걱!

검이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갈랐다.

쩌저저적!

자연물로 가득했던 공간 전체가 찢겨져 나갔다. 산도, 들도, 바람도, 숲도.

“···!!”

멸겁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분명히 들어간 기운의 양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멸겁천이 만들어낸 공간은 깔끔하게 반으로 잘려나갔다.

멸겁천은 대경실성해 내공을 뿜어냈다. 반으로 갈려져 부서져내리던 공간을 겨우 다시 원상복구됐다. 공간을 복구한 멸겁천의 입에서 가벼운 기침이 터져나왔다.

내공의 소모도 꽤나 컸던 탓이다.

“···대체, 어떻게?”

“이게 본좌의 자연검이다.”

“···자연도?”

멸겁천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자연현상중에 이토록 예리하고 강렬한 힘을 가지는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존재했다면 자연과 오랫동안 살아숨쉰 멸겁천이 못 봤을 리가 없다.

“자연의 무엇. 흉내낸 거지?”

“궁금한가?”

“···궁금해.”

“그러면, 알려 주지.”

단천은 무공을 숨기거나 가르쳐주지 않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단천은 자신의 깨달음을 언제나 주변에 공유했으며,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의 깨달음또한 숨길 이유가 없다.

“본좌가 따라한 자연물은. 검劍이니라.”

“······?”

무슨 개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이 멸겁천의 얼굴을 지나갔다.

> 뭘 따라했다고?

> 검을 따라한 거라는데?

> ??

> 검이 무슨 자연임

“검. 자연 아니야.”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 그리고 검 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니 자연의 일부다.”

“······.”

> 듣다 보니까 맞는 말 같기도 하고

> 그말대로면 패스트푸드도 자연식 아님?

> 일리가··· 있어···!

“그러니, 검을 따라하는 검 또한 자연검.”

“······.”

> 마트료시카 비슷한 거냐? 인형 안에 인형 넣는 인형

> 듣다 보니까 은근히 설득되는 게 더 열받네 ㅋㅋㅋㅋㅋ

패도천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지나갔다. 그녀가 애초에 타인과 교류를 많이 해 온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었다.

눈 앞의 칠대천마는. 상상 이상으로 미친 놈이라는 것을.

세상에 검을 따라하는 검을 만든다는 발상 자체도 미친놈이지만, 그것을 뻔뻔하게 자연검이라고 우기는 것은 더더욱 미친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친 인간.”

“콜럼버스와 같은 사람은 언제나 무지몽매한 것들에게 미친놈 소리를 듣기 마련이지.”

“당신. 콜롬버스 아냐.”

“다시. 간다.”

내공이 불어넣어진 단천의 검이 다시 한 번 공간을 갈랐다.

발상은 어처구니없지만 그 발상이 만들어내는 위력은 압도적인 것을 넘어서 경외적인 것이었다.

쩌저저적!

검은 예리하게(銳) 잘라내는 것. 지금 저 인간의 검은 검이 가지고 있는 진의인 예리함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 예리함은 주변의 자연물을 잘라내고, 자연물이 가지는 기운또한 잘라내고, 순환마저도 잘라버린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것은 분명히 자연도의 오의를 받아들인 것이 분명하다.

“보아하니 본좌의 깨달음이 자연검이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군.”

“······.”

“뭘 그리 불쾌한 표정을 짓지?”

“불쾌해.”

굳이 따지자면 자연도인데. 왜 이토록 불쾌하단 말인가.

곰곰히 생각을 하던 멸겁천은 자신의 불쾌함이 단천의 ‘별 것 아니군’ 하는 표정과 내리깔아보는 표정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못 이겨.”

저 말도 안 되는 검이 자연검이라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놈이 자연검에 입문한 것은 몇 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이 질 리가 없는 것이다.

비록 멸겁천의 상단전이 전에 없던 지독할 정도의 경보를 멸겁천에게 보내오고 있었지만.

이제 와서 싸움을 멈출 생각은 들지 않는다.

“표정이 밝아졌군.”

“표정?”

“그래.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이더니. 지금은 못 견디게 기뻐하는 표정 아니냐.”

멸겁천은 흐르는 냇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대로였다.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 자들을 상대하는 것은 귀찮다.

하지만. 자신이 평생을 바쳐온 힘을 다하더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난적이 자신의 앞에 있다.

그렇기에 만들어지는 표정.

기쁨.

혹은 즐거움.

“나. 이런 표정. 지을수 있었어.”

“웃어본 적 없냐?”

“처음. 웃는 거.”

“그런 표정 짓는 게 처음이라니. 어지간히도 심심하게 살아온 모양이군.”

“······그러게.”

압도적인 재능이 있는 자는 경쟁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 인간이 개미를 신발로 밟아 죽이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듯이.

멸겁천은 수많은 전투에서 압도적으로 이기기만 했고. 그렇기에 누군가를 베고 이기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고고하기 그지없는 천외천의 재능.

그리고. 지금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과 비견되는 재능. 그리고 자신과 비견되는 힘을 만났다.

“패도천이랑은 안 싸워 봤나?”

“여자. 싸움. 싫대.”

“여자랑 안 싸운다니. 인생 절반을 손해보고 살았구만.”

패도천은 삼대 천마. 단천이 있던 시절로부터도 아득할 정도의 옛 시절이다. 그 시절엔 그 시절만의 법칙이 또 있었을 터다.

고수에는 남녀 가림이 없다. 그러니 여자라고 안 싸우면 인생의 절반은 손해인 것이다.

> 애초에 자연을 부릴 수 있는 존재에 성별이 어딨어 ㅋㅋㅋㅋㅋ

> 핵폭탄이랑 붙어도 이길 것 같은데

> 솔직히 핵폭탄이랑도 붙어볼만함 ㄹㅇ

핵폭탄이란 말에 단천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아직도 신화경에 이르른 자들의 싸움이 고작 핵폭탄이랑 비견되다니.

역시. 무학이 이제 걸음마를 떼는 곳이라 생각이 짧다.

단천은 검을 들어 멸겁천을 겨눴다.

“증명해 보자고.”

“뭘?”

“무가 가지는 힘이 핵폭탄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핵폭탄이 정확하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멸겁천이 깨달은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단천이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무엇이 뜻하는지는 이미 넘치도록 알 터.

“좋아.”

패도천의 만면에 단천의 것과 같은 웃음이 퍼져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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