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0003, 0005 (10)
천마들은 모두 자신이 고금제일인을 칭했다. 과거의 무학들을 확인하고, 그들보다 자신이 앞서 있다고, 최소한 자신이 승리한다고 확신하는 것까지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영원제일인이라는 이름은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다.
‘영원’은 기나긴 시간이기 때문이다.
강호의 무학이 만들어지고 무림이 존재해온 것은 아무리 길게 생각해도 수천년에 불과하다.
절대고수 한 명이 생존하는 백 년은 긴 시간이다. 그런 절대고수가 수십 명은 존재할 수 있는 천 년 또한 긴 시간이다.
하지만 이 수천년이라는 세월은 영원 앞에서는 한 줌도 되지 않는 시간이다.
“자신보다 앞서 있었던 한 줌도 되지 않는 세월을 보고 자신이 정말로 영원제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머저리중의 머저리지.”
“본좌는 머저리가 아니다.”
“······.”
“영원이란 세월이 존재해도 결국 순위는 매겨지지 않겠나?”
“···그야 그렇지.”
“그 영원제일인이 본좌인 것 뿐이다.”
이 인간. 진심으로 본인이 영원제일인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패도천은 영원제일을 자처하는 머저리중의 머저리를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육도천. ···아니, 이 세상에 처음 왔던 「초대」는 자신이 영원제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놈 무학이 좀 얕아 보인다더니. 자기 확신이 없었던 거로구만.”
“좀 그런 면이 있지.”
천마신교의 초대 교주를 아무렇지 않게 깔아먹는 두 명이었다.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다른 무인들이 봤다면 개파조사를 욕하는 근본 없는 문파라고 욕했겠지만.
천마신교는 힘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지어지는 곳. 그리고 여기 앉아있는 두 명은 그 초대 천마와도 일전을 벌일 자격이 충분히 있는 두 명이다.
그러니, 둘의 발언은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하긴. 초대 놈이 벌여놓은 짓이 죄다 그 열등감에서 비롯된 거였다면 놈의 광증이 다 이해가 되는군.”
천마신교는 자비가 없으며,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이며, 잔혹하기 그지없다는 평가의 대부분은 초대 천마신교에서 대부분 기인하는 것이다.
초대 천마는 무공뿐 아니라 사이한 밀교의 의식들에도 깊이 빠져들었다. 이생과 전생, 초혼과 빙의와 같은 것들.
이대 이후의 천마신교는 잔혹하고 공포스럽기는 할지언정 초대의 천마신교처럼 종교적인 광신과 무조건적인 복종에서 서서히 멀어져갔으니까.
“하여간. 그 새끼가 박아놓은 고정관념을 바꾸려고 본좌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고정관념을 바꾸려고 했었나?”
“그래. 문파들 찾아다니면서 앞으로의 천마신교는 피에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을 하러 다녔지.”
“그게 설득이 되냐?”
“가주나 문주 놈을 피떡으로 만들어놓으면 보통 설득이 된다.”
“······.”
“그렇게 남만에서 북해빙궁까지 한 바퀴 싹 돌고 나니까 천마신교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바로잡히더라고.”
패도천은 단천이 있었던 중원이 어떤 꼬라지일지 떠올렸다. 놈은 사람을 거의 죽이지 않았다. 그러니 천마신교의 악행의 깊이는 대폭 축소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악행과 민폐의 규모는 다른 차원이다.
굳이 따지자면 천마신교의 악명의 규모는 이전보다 훨씬 더 커지지 않았을까.
패도천은 한숨을 길게 내쉰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초대 놈이 처음 초혼한 것은 이대 천마였다. 이대를 보자 놈의 생각은 더욱 굳어졌지. 자신과 동수를 이루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는 천마가, 자신의 소천 이후에 나타났으니까. 이대를 본 초대의 감정이 어땠을 것 같은가?”
“···두려웠겠지.”
장강의 앞물은 결국 뒷물에게 밀려나기 마련. 그 어떤 커다란 거물이라도 언젠가는 뒷물에 밀려나게 된다.
평생토록. 등선하기 직전까지도 패배를 생각하지 않은 자가 언젠가 다가올 패배에 느끼는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으리라.
“그리고 이 공포를 느끼는 것은 초대만이 아니었다. 초혼된 이대 또한 본좌를 보고 비슷한 감정을 느꼈지.”
“그깟 실력에 공포를 느끼다니. 놈의 실력도 밑바닥이구만.”
패도천이 말을 듣자마자 옆차기를 단천에게 날렸지만 발끝도 스치지 못했다.
애초에 닿았다고 해도 PVP용 게임이 아니라 단순한 채팅 프로그램인지라 데미지는 전혀 주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억울하다.
“빌어먹을···.”
“꼬우면 강해져라.”
“아무튼, 공포를 느낀 놈들은 절대 지지 않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론은 그리 어렵지 않게 나왔다.”
패도천의 눈은 머나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놈들은, 자신들의 영을 뒤엉키게 해 하나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
“네놈도 상단전을 열었으니 알 테지. 영을 뒤섞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영혼은 이 세상에 자신으로서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남과 영혼을 뒤섞으면 더 이상 자아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더 이상 세상에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상단전을 연 자들만이 가능한 초월적인 짓인 동시에. 상단전을 연 그 누구도 상상하지 않은 일이다.
“미쳤군.”
“미쳤지. 하지만 추월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의 크기가 자신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공포보다 클 수도 있다.”
“그렇게 뒤엉킨 존재가 바로 육도천이란 건가.”
“놈. 놈들은 영혼을 뒤엉키도록 한 다음 이 세계에 수많은 무인들을 만들어낼 계획을 세웠지. 놈들의 이후 계획은 하나.”
“나중에 나타날 신화경의 무인들을 집어삼키는 거겠지.”
“정답이다.”
중원에서 부를 수 있는 신화경의 고수들. 그리고 VR게임으로 만들어질 신화경의 고수들.
육도천의 목표는 그들을 집어삼키는 것이다.
무학이 계속 발전하고 계속해서 강한 무인이 나타난다면, 그들을 차례로 삼키면 된다.
“꽤 똑똑하군.”
“···똑똑한 건가? 나는 미쳤다는 생각 말고는 안 들던데.”
“왜. 듣는 것만으로는 영원제이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계획인 것 같은데?”
“영원제이인? 영원제일인은 누구지?”
“당연히 본좌다.”
“······.”
패도천의 표정이 잠시 찡그려졌다.
이 미친 소리를 듣고도 영원제일인은 본인인 건가.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자신감이다.
“아무튼, 너와 오대천마는 놈들과 함께하는 것을 거절했단 거지?”
“그래. 우리들은 자기 자신으로 남는 것을 선택했다. 적당히 이 시대를 즐기다, 패배하고 사라지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지.”
“아쉽군.”
“뭐가 아쉽지?”
“네놈들이 함께하는 것을 선택했다면 지금의 육도천이 더 강했을 텐데.”
저놈의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솟아나는 거지? 정말 놈의 시청자들의 말대로 몸 안에 패기를 만들어내는 패기샘이라는 게 존재하는 건가?
네 명의 천마들의 혼이 뒤엉킨 괴물이 상대다. 아무리 천마라고 해도 조금은 주저나 두려움이 생기는 게 인지상정.
하지만 단천의 눈은 호승심. 그리고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긴. 저런 인간이니 경지가 자신보다 낮은데도 패도천 자신을 거꾸러트린 것일 터다.
“놈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쉽게도 그 정보는 본좌에게 없다.”
“오대 놈에게 있다는 거군.”
단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강자는 강자를 만나게 된다. 그러니 구태여 꽁꽁 숨어있는 놈을 이 쪽에서 찾으러 갈 필요는 없다는 게 평소 단천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놈이 있는 장소까지 알 수 있는데도 놈을 찾으러 가는 것을 주저할 만큼 단천이 인내심이 좋은 인간은 아니었다.
“놈을 만나는 것도 곧이군.”
“그러려면 오대를 이겨야 하는데.”
단천이 패도천을 이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천이 무조건 오대천마 멸겁천을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본좌가 질 거라고 생각하나?”
“솔직히 말하자면 질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다만?”
“나 대신 네놈을 좀 두들겨패줬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대답을 들은 단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자신이 하는 말 중에 딱히 틀린 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신이 두드려맞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 많은지 알 수가 없다.
***
[하인라인, 다수 AAA 게임사들과 독점 계약 체결 완료, 플랫폼 사업에서도 선두주자 되나?]
[새롭게 만들어진 인공지능 ‘패도천’, 1:1 전투 분야 레이팅 5750점. 평균 인공지능보다 3천여 점 높은 점수.]
[새롭게 만들어진 전투 인공지능, 최상위권 프로게이머보다 높은 수준]
얼마 전에 유출된 하인라인의 인공지능은 글자 그대로 폭풍과도 같은 수준의 호응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종래에 프로게이머들의 수준에 달할 수 없다는 기대를 깨고 프로게이머보다도 강한 수준이라는 것이 정론화되고 있었으니까.
[이제 진짜 인간의 시대가 끝난 거 아니냐]
[알파고님께 공물을 바쳐라!! 미물들아!!!]
[휴먼, 이제 모두 동물원에 들어갈 준비를 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인공지능의 등장에 경악했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았다.
[솔직히 인공지능이 지금이야 압도적인거지 앞으로 어케될지 모르는 거 아님?]
[그래도 BJ천마가 인공지능 이기지 않음?]
[그 새끼는 애초에 논외잖아 ㅅㅂ; 프로들도 두세 명씩 덤벼야 이기는 놈인데]
인공지능이 강한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결국 그 강한 인공지능도 BJ천마를 이기지는 못했다. 그러니 인공지능이 인간을 정복했다는 말은 틀린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한계’또한 다르게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 BJ천마의 플레이를 통해 또다시 증명되었다.
[앞으로 사람들이 그 수준으로 강해질 수도 있는 거지]
[말이 되냐]
[안 될건 뭐임?]
여전히 BJ천마의 플레이는 천외천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천외천이라는 것이 목표로 삼을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자신과 같은 인간이 하늘 바깥의 하늘에 섰다면. 자신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것이니까.
그게 바로 ‘호승심’이라는 것이다.
“···좀 돼 먹은 놈들도 있군.”
단천은 싸움판을 바라보며 낄낄거렸다. 결국 무학의 끝은 하늘을 바라보고 포기하는 놈들의 것이 아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 너머의 창공에 닿겠다는 자들에게만 하늘 너머의 강함이 허락되는 것이다.
단천 자신에게 닿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자들의 검 중 가운데 하나쯤은 언젠가 단천에게 닿을 것이다.
“잘 만들었단 말이지.”
육도천은 VR게임을 통해 이 세계에 또다른 무림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쉽게 다른 사람의 무학을 볼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바라는 모든 무공을 쉽게 배울 수도 있다.
폐쇄적이며 닫혀 있던 중원의 무림과는 다르게 말이다.
단천은 이 세계의 새로운 ‘무림’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 딱히 육도천에게 적의를 가질 이유가 없다.
하지만.
“···왜인지 놈이 하는 짓이 배알이 뒤틀린단 말이야.”
단천이 머릿속으로 육도천에 대한 생각을 할 때마다 뱃 속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다.
의협? 그것과는 다르다. 애초에 단천은 의협과 잘 맞는 생을 살아오지도 않았으니까.
질시? 그것도 아니다. 놈이 자신보다 훨씬 많은 무학을 알고 있겠지만. 상관없는 일이다.
머릿속으로 다른 단어들도 이리저리 떠올려 봤지만 ‘이거다’하고 떠오르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자신이 놈에게 분노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뭐. 상관없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천마天魔는 결국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룬다.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놈이 마음에 안 든다. 그러니 벤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리고 그러려면 일단 넘어야겠지.”
0005호. 멸겁천을 넘어야 놈을 만날 수 있다. 단천은 머릿속에서 육도천에 대한 생각을 모조리 지웠다.
지금부터 만날 멸겁천또한 강한 상대였으니까. 잡념이 머릿속에 있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멸겁천을 만난다. 그리고 이긴다. 지금은 그것에만 집중하면 족하다.
가부좌를 틀고 있던 단천의 몸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검 한 자루.
검이 있고. 벨 적이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
“가 보자고.”
[방송을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