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천마-202화 (202/212)

44. 0003, 0005 (9)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정해진 시간에 따라 뜨고 질 때까지도 술판은 이어졌다. 태양이 뜨고 지는 것도 누군가가 해 놓은 프로그래밍이었겠지만. 상관없었다.

패도천이 문득 입을 열었다.

“취하는군.”

“AI가 취한다는 말은 듣도보도 못했는데.”

“천마라는 놈이 상식에 얽매이고 있어서야. 그래서야 무의 궁극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꼭 진 놈들이 혓바닥은 길더라고. 무명승도 한주먹거리인 주제에 혓바닥만 길었는데.”

“무명승이라는 놈은 소림의 고승이었나?”

“평생 무예라고는 배우지 못한 학승인데도 꽤 강했었지.”

“하. 왜 나는 평생에 그런 놈을 못 만나 본 건지.”

“살면서 선업을 쌓은 놈과 그렇지 못한 놈의 차이인 거지.”

패도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놈이 좀 사람 안 죽이고 좋게좋게 살아온 건 자신도 인정한다. 그래도 천마는 천마다.

천마란 놈이 선업이니 뭐니 지껄이는 것을 들으니 배알이 뒤틀리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는 것이다.

“니가 착하게 산 거면 세상에 안 착한 놈들은 강호공적들 말고는 없을 거다.”

“사람 수천 명은 죽인 도살자가 그런 말을 해 봤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교가 강호에서 가장 강한 집단이라는 것은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시대에서 마교의 힘이 최강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때에는 구파일방의 한 문파와 비슷할 정도로까지 그 세가 약해지는 시대도 존재했다.

패도천의 시대는 중원의 힘이 마교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던 시대였다. 강대해질 정도로 강대해진 구파일방은 마교를 멸문시키기를 바랐고, 고수들을 모아 십만태산까지 쳐들어왔었다.

패도천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앞을 가로막는 모든 이들을 죽여야만 했다.

“중원 놈들이 다시는 마교를 가벼이 보지 못하도록 복수를 해야만···.”

“아. 그건 네 사정이고.”

무림은 결국 힘의 논리에 의해서 돌아간다. 패도천이 있었던 시대에서는 결국 패도천이 천하제일인이었다. 그러니 그의 말이 옳다.

그리고.

“본좌가 네놈보다 강하니. 본좌의 말이 이곳에서는 진리다.”

“···개 같은 놈. 거지같은 논리를 힘으로 납득시키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있나?”

“세상의 모든 논리란 건 다 거지같은 거다.”

패배한 개가 꿍얼거리거나 말거나 단천은 담담했다. 타인을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대의도, 협행이니 뭐니 하는 것도. 결국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 완전히 옳을 수 없다.

그 어떤 위대한 자의 말이라도 얼마간만 맞고 얼마간은 틀린 것.

“그러니 관철하는 거다. 자신의 무를 통해서. 누가 맞냐 틀리냐 이야기하면 말싸움만 100년이고 1000년이고 하게 된다. 싸움박질로 이긴 놈이 맞는 걸로 하면 10분이면 누가 맞는지 결론이 나지.”

“그래서. 네놈은 네놈의 올바름을 관철하려고 천하제일인이 됐단 거냐?”

“일정 부분은 그렇다.”

“상상 이상의 돌아이로군.”

그보다. 일정 부분만 그렇다면, 나머지 부분은 무슨 이유인 거지?

“나머지 이유는 뭐지?”

“나보다 강하다면서 앞에서 깝죽대는 놈들 패 주고 싶어서. 누구보다 강해지면 누가 앞에서 깝죽대건 일단 패고 시작할 수 있잖느냐.”

“그렇구만.”

단천의 말을 들은 것이 다른 사람이라면 무슨 미친소리를 하느냐고 혀를 내둘렀겠지만. 단천의 앞에 앉아 있는 것은 그 자신도 천하제일인이었던 이다.

“천하제일인이어서 좋은 점 중 하나가 짜증나는 놈을 맘대로 패도 괜찮다는 점이지. 아마 다른 천하제일인도 공감할 부분일 테고.”

“역시 말이 통하는군.”

끄덕.

인세에 세상의 재액이라고 불렸던 두 명의 쓰잘데기없는 공감대가 이곳에 펼쳐졌다.

하지만 두 명의 인식이 뒤틀려 있다는 것을 알려줄 도덕군자는 아쉽게도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일평생을 저딴 식으로 살아온 인간들의 뒤틀린 인식을 뒤집어서 계도하는 것은 그 달마라도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네놈은 확실히 특이한 천마야.”

“네놈은 평범한 -천마아님-이다.”

천마아님이 별호가 돼 버린 패도천의 머리에 가느다란 실핏줄이 돋아났다 사라졌다.

저놈의 티배깅도 듣다 보니 조금씩 익숙해지는 기분이다.

그러니 지금은 티배깅에 반응을 할 게 아니라 원래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시작할 때다.

“그래서. 네놈의 목표도 그건가?”

“그거?”

“영원제일.”

영원제일이라는 말에 술을 따르던 단천의 손이 잠시 멈췄다.

“역시. 네놈도 마찬가지였나 보군.”

패도천이 낄낄 웃었다.

“하여간. 천마 놈들의 목표란 게 어느 정도 공통되는 부분은 있는 것 같다.”

“네놈의 목표도 영원제일인가.”

“본좌뿐만 아니라 모든 천마 놈들의 목표가 영원제일인이지. 뭐. 그러니까 등선을 못 하는 게 아닐까 싶긴 하지만.”

“우화등선은 이미 했는데.”

“반쪽짜리지. 우화등선을 한 놈이 이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냐?”

등선이라는 것은 속세와의 연결고리를 모조리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겨 놓은 미련이 없어야만 한다.

등선을 목표로 할 정도로 강한 자들 가운데서도,

진한 미련이 있는 자들만이 결국 세상에 다시 불려나올 수 있다.

“그러니까 달마나 육조혜능, 장삼봉 같은 놈들은 초혼이 불가능한 게지. 놈들은 속세에 남겨놓은 미련이 거의 없으니까. 초혼을 한다고 해도 응할 리가 없다.”

백건또한 이 세상에 꽤나 미련이 있는 몸이었다. 천마라는 놈들도 죄다 영원제일이라는 목표가 남아 있었으니 초혼이 가능한 것이었을 테고.

“···이런 초혼부로 세상에 불러낼 수 있는 놈들이 앞으로도 꽤 될 거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단천이 상대했던 전대의 천하제일인. 백건이었다.

백건의 혼은 사람의 몸에 완전히 정착되어 있었다.

“이 세상에 불러낸 것 치고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던데?”

“거야. 놈이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니도록 하는 게 목적이니까.”

“그게 뭔 개소리야.”

단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백건의 무위가 단천이나 패도천에 비해 약하다고는 하나 아무리 그래도 한 시대를 집어삼켰던 천하제일인이다.

그런 무력을 가진 이를 불러내놓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하는 게 목적이라고?

“어째서?”

“어째서냐니.”

“왜 그렇게 비효율적인 짓을 하느냐는 거다. 나같으면 백건을 부활시키면 하루 종일 캡슐 안에 가둬두고 틈날 때마다 비무용 인형으로 삼았을 텐데.”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말을 하는 놈이로군.”

“뭐가 끔찍해. 놈의 무위도 올라가고, 나는 쓸만한 비무인형을 갖고. 글자 그대로 윈윈이잖아.”

패도천은 단천의 눈을 지긋이 노려봤다.

그러고 보면 생물학자 가운데 인간이 가축을 사육하는 것을 보고 서로간에 윈-윈이라고 생각하는 또라이들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것 같기도 하다.

“남는 시간엔 캡슐 안에서 이런저런 게임도 할 수 있고, 밖에 수련도 하러 다니고. 천하제일인이 쓸 데가 얼마나 많은데.”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재능을 넘치도록 가지고 있는 싸이코를 바라보며 패도천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놈의 생각도 존중하지만. 육도천의 생각은 그게 아니다.”

육도천이라는 말에 단천의 표정이 짧게 굳었다. 육도천. 지금 이 모든 상황의 원흉이자 근원.

“육도천이 뭔지 이미 아는가 보군.”

“물론이다.”

“알고 있을거라곤 생각했다. 얼마나 알고 있지?”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는 더.”

패도천이 혀를 가볍게 찼다. 그래도 저렇게 자신하는 것을 보면 육도천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안다는 터. 그러면 구태여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아도 될 터다.

“육도천이 퀄리티 높은 오픈 소스를 통해 알게 모르게 게임 개발계를 조종하고 있단 건 이미 알 거다.”

“······물론 알고 있다.”

모르는 것 같은데.

“알다시피 육도천은 그 안에 ‘무학’들을 담아내는 걸로 사람들의 뇌에 무의식적인 각인을 심어놓고 있지.”

“···이 또한 아는 사실이다.”

몰랐던 것 같은데. 아니, 혹시나 정말 알고 있는 사실일 수도 있다.

“놈들이 달의 뒷면에 있는 나치들을 후원하는 것도 알고 있나? 곧 놈들이 만든 행성무기가 지구에 쏟아질 거다.”

“···물론 알고 있다.”

‘아무 것도 모르잖아.’

그 와중에 눈빛은 왜 또 흥미로 빛나는 건데.

지구에 행성무기가 떨어진다는데 흥비로운 눈빛 보내지 마!

패도천은 당장이라도 출수해서 눈 앞의 칠대천마 나부랭이를 반으로 갈라 버리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아냈다.

전혀 머릿속에 정보가 없는데도 어떻게 저렇게 뻔뻔하게 굴 수 있는 건지 뇌를 열어보고 싶을 지경이다.

“사실 거짓말이다.”

“······그 또한 알고 있었다. 본좌는 모르는 것이 없지.”

배 아래에서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아무 것도 모르고 왔으면서. 대체 뭐가 저리 뻔뻔하단 말인가.

패도천은 더 이상 단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패도천은 스스로가 정상적인 사람의 궤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눈 앞의 단천이 천하제일 무인이라면 자신은 장난감 칼 들고 설치는 꼬마애다.

하지만 놈의 몸을 반쪽으로 쪼개버릴 수는 없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무력 사용이 불가능한 단순 채팅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첫 번째.

그리고 무력 사용이 가능하다고 해도 놈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 두 번째다.

‘이 놈이랑 같은 시대에 살았던 중원 놈들은 고생깨나 했겠군.’

가만 있어도 사람 화 나게 만드는 인간이 천하제일을 넘어서 고금제일인이다?

중원이 무슨 꼬라지가 났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사람을 죽이지만 않았다 뿐이지 강호에 끼친 해악은 다른 천마들과 비견해도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이건 자신의 영혼 전체를 걸고 내기를 할 수도 있었다.

패도천은 단천에게 희생된 이름 모를 수많은 원혼들에게 묵례한 후에 입을 열었다.

“이런 각인들을 통해서 놈, 아니, 놈들이 노리는 건 하나. 이 세상의 전뇌계. 그러니까 VR 게임계에 새로운 무림武林을 만들려는 거다.”

“무림?”

“그래. 무림. 원래 무림과는 다르게 죽어도 살아나고, 무학을 남녀노소 누구나 수련할 수 있으며, 언제든지 새로운 무학을 배울 수 있는 무림.”

확실히 VR이라는 것은 종래의 무학이 가지는 수많은 단점들을 메울 수 있는 수단이다.

과거 바이킹들이 싸우다 죽으면 가는 곳이라고 믿은 발할라라는 곳이 존재한다.

발할라에 있는 영혼들은 아침이면 부활해 죽을 때까지 전투를 치를 수 있다.

그런 공간이나 다름없는 곳이 바로 VR게임이다.

그런 곳에 무림을 만들 수 있다면?

무학의 발전은 엄청난 속도로 이뤄질 것이다.

“그럼 백건을 이 세상에 풀어놓은 것도···.”

“무림을 만드는 데 공헌하게 하기 위해서지. 세상에 진짜 무학을 아는 자들의 수가 많을수록 ‘무림’이 만들어지는 데는 시간이 적게 들 테니까.”

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육도천의 목표라는 것이 정말로 중원을 만드는 것이라면 구태여 천하제일인을 풀어놓은 것도 이해가 됐다.

물론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전부는 아닐 터다.

상단전이 매일같이 내뿜는 ‘경고’는 겨우 이런 수준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

중요한 것은 ‘무림’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는가. 그것이 본론인 것이다.

“그래서. 육도천은 이 세상에 새 무림을 만들어서, 뭘 하려는 거지?”

“하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 ‘되고 싶어하는 것’이 중요한 거지.”

“되고 싶어하는 것?”

“육도천의 목표는 단 하나다.”

놈이 이 되도 않은 짓거리를 계속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영원제일인.”

패도천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누군가가 입에 담는다면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터.

하지만 그 말을 입에 담는 자가 천하제일인이었던 존재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놈은 영원제일인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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