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천마-201화 (201/212)

44. 0003, 0005 (8)

“흐으음.”

단천은 자신의 몸을 계속해서 찔러대는 살기를 느끼며 하인라인 안으로 발을 디뎠다.

하인라인의 직원들이 자신을 싫어할 이유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딱히 나쁜 짓을 한 적도 없고, 자신 덕분에 하인라인의 인지도와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자신에게 쏟아지는 살기는 오롯이 자신의 착각이라는 뜻이다.

“수맥이 흐르나 보군.”

단천이 논리적이기 그지없는 결론을 내리고 있을 때. 단천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이태흠이 허겁지겁 뛰어나왔다.

“무, 무슨 일로 온 건가?”

“그냥. 심심해서.”

“···엄연히 이곳은 사기업이야. 게다가 회사 내부에는 새어나가서는 안 될 자료들이 넘쳐난다고. 심심하다고 오고 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란 말일세.”

“본좌는 마음 가는 곳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그게 싫다면 실력으로 본좌를 제압해 보던가.”

제압할 수 있겠나. 실시간 시청자수가 100만을 찍는 초거대 스트리머를 건드렸다가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사장이 되고 나서부터는 을의 위치로 살아본 경험이 잘 없는 이태흠인데. 이 인간만 만나면 철저한 을이 된다.

‘더러워서 손절하던가 해야지.’

물론 손절할 수는 없다. BJ천마는 글자 그대로 초월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스트리머. 거기에 그가 지금까지 물어온 수입과, 그가 가지고 있는 주식까지.

이 인간이 자신들이 아닌 다른 기업과 손을 잡았을 때를 생각하면 더더더욱 손절은 불가능하다.

BJ천마가 저렇게 막 나오는 것은 자신을 손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 건가?

근데 가만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안으로 들어오게.”

“사양하지 않지.”

어차피 들어올 거라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차라리 낫다.

“···그보다. 칩은 들고 왔나?”

“칩?”

“0003번이 있던 칩 말일세.”

BJ천마의 말도 안 되는 말에 따르자면 BJ천마가 0003호를 이겼으므로 0003호에서 작동하던 보안장치가 이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을 터다.

물론 이태흠이 그런 비과학적인 말을 조금이라도 믿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이거 말하는 건가?”

품을 뒤적대던 단천이 0003호가 있는 칩을 꺼내들었다.

“다행히 들고 왔군.”

“생각하고 들고 온 건 아니고. 칩을 계속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 뿐이다.”

“왜 그걸 들고 다니는데?”

“집에 가만 놔 두면 누가 나보다 먼저 플레이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다가 누군가가 본좌보다 빨리 누가 클리어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그딴 일이 생기겠냐.’

이미 0003호의 말도 안 되는 전투력을 본 뒤다. 0005호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진 몰라도 0003호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쳤을 때. 프로게이머가 뇌 활성화를 하는 불법 약물을 천 번 도핑해도 클리어가 불가능하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본좌의 영약실에 있던 약포 하나를 누나가 먹어치웠지. 실로 무시무시한 악업이 아닐 수가 없다.”

약포 하나 없어진 걸로 진한 살기를 뿜어내는 BJ천마를 바라보며 이태흠은 그러려니 살기로 했다.

“그렇구만. 아무튼 3호를 들고 왔다니 다행이군.”

사무실로 들어온 이태흠은 0003이라고 적혀 있는 칩셋을 컴퓨터에 연결한 다음 ‘프로그램 복사’를 클릭했다.

물론 안 될 것이다. 안 될 것이 자명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파일 복제를 시작하겠습니다.]

[파일 복제중]

“···된다?”

원래는 시작도 전에 오류가 나면서 그대로 컴퓨터 전체가 원인 모를 버그로 슈트가 났었는데. 이번에는 정상적으로 복제가 된다.

그렇다는 건.

“이 인공지능을 가져다 쓸 수 있다고···?”

이태흠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사장 얼굴 왜 저렇게 환해?”

“방금 보는데 이번에 BJ천마가 붙은 AI. 복제가 되는 모양이야.”

그리고 사무실에서 둘의 상황을 지켜보던 모든 직원들의 표정에 암운이 드리웠다.

“야! 지금 당장 연락왔던 기업들에 전화 돌려! AI관련한 협업 무조건 가능하다고 해! 레일로, 파파야, 누리마블! 또 어디야!”

이태흠의 말을 들은 직원들의 눈이 꼭 감겼다.

“···엄마. 보고싶어. 내가 죽으면 꼭 황금관에 묻어줘···.”

“여보. 미안해. 저 자식들이 비겁하게 돈으로 패지만 않았어도···.”

“이사직 수락을 안 했어야 했는데··· 끄흐흐어으어윽.”

“엄살 그만 피워. 안 그래도 인력도 두 배나 보충해 줬잖아!”

여기저기 할 수 있는 데서 헤드헌팅을 닥치는 대로 해서 사원수를 미친 듯이 늘리고 있는 하인라인이었다.

커리어에 따른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연봉과 복지, 성과급 제시에 지금의 하인라인은 사실상 IT기업의 블랙홀이라고까지 불리고 있는 상태다.

문제는···.

“돌아가고 싶어···. 그냥 돌려보내 줘···.”

헤드헌팅을 해서 들어온 사원들도 밀려드는 일에 입사한 것을 후회한다는 것 정도.

인간적으로 물이 들어와도 정도껏 들어와야 될 것 아닌가. 노를 저어도 저어도 망망대해가 될 정도의 비가 쏟아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낸 것은 단 한명.

BJ천마다.

“으음.”

“왜. 무슨 일인가?”

“그냥. 몸이 좀 으슬으슬해서. 살기도 느껴지는 것 같고.”

이 장소에는 특히 수맥이 심하게 흐르는 모양이다. 단천은 옆으로 한 발짝 물러나서 수맥을 피했다.

찌리릿.

꽤 먼 거리를 움직였는데도 여전히 수맥의 기운은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느낌이다.

“수맥이 심하게 흐르는데. 회사를 옮겨 보는 건 어때?”

“안 그래도 사원 수가 너무 늘어서 새 사옥을 알아보고 있는 중일세.”

“다행이군.”

단천은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토록 어마어마한 수맥이라면 회사 전체가 무너져도 안 이상한 상태인 까닭이다.

단천이 이 비스무리한 수맥을 느꼈던 제갈세가의 가주실도 어마어마한 폭발에 휘말리지 않았던가.

“그보다. 패도천. 그러니까 3호와 대화도 가능한가?”

“가능하지. 이 대리. 증강현실실로 BJ천마 안내해 주게. 지금 전화할 데가 너무 많아서.”

“알겠습니다.”

현재 24시간 밴을 먹은 상태라서 캡슐방 등의 게임실에서도 VR에 접근할 수는 없는 상태.

하지만 대화를 나누는 것 정도라면 캡슐에 들어가지 않고 간단한 증강현실 정도만으로도 가능하다.

단천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증강현실이라고 적힌 방에 도달할 수 있었다.

“헤드셋 착용하시면 바로 0003과 대화 가능하실 겁니다.”

“고맙다.”

간단한 인사를 한 단천은 헤드기어를 착용했다.

[가상현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캡슐에 비해서 명백하게 열화된 화면이 주변에 펼쳐졌다. 헤드기어를 사용한 가상 현실은 이제 사양 사업이 되어버린 탓이다.

[AI. 0003을 로드합니다.]

[AI파일의 용량이 큽니다. 로드까지 시간이 조금 지연될 수 있습니다.]

[주변 환경을 설정하시겠습니까?]

“중원. 그러니까··· 고대 중국의 건물이 있는 곳으로 해 줘.”

주변의 풍경이 꽤나 눈에 익은 풍경으로 바뀌었다. 복식이나 자잘한 문제점이 좀 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썩 괜찮다.

자리에 앉아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무슨 일이지?”

패도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굳이 따지면 ‘진짜 패도천’은 아니다. 초혼부는 패도천이 패배했을 때 사라졌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그저 패도천과 비슷하게 프로밍된 파일에 불과한 무언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천의 태도가 달라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고.

“그냥. 싸움도 끝난 김에 찾아왔다.”

“이긴 걸 자랑이라도 하고 싶어서 찾아온 거냐?”

“본좌의 승리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것. 너는 숨 쉬는 것을 자랑하나?”

“······.”

패도천이 말문을 잃은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쪼르륵! 그러거나 말거나 단천이 술잔에 술을 따랐다. 자신의 잔에 한 잔.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잔에 한 잔.

패도천의 AI는 자신이 AI라는 말을 구태여 하지 않았다. 술을 마셔 봤자 취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단천이 준 술잔을 들어올려···.

딱!

술잔을 집으려던 패도천의 손을 단천이 후려쳤다.

“어허! 어디 무엄하게! 본좌는 천마! 천마가 하사하는 술잔을 구배九拜도 하지 않고 마시려는 거냐?”

“본좌도 천마거든?”

“누구 맘대로 네가 천마야?”

“···뭐?”

“천마는 패배하는 순간부터 천마가 아니다. 그리고 네놈은 본좌에게 졌지.”

맞는 말이다. 거야 맞는 말이긴 하다. 애초에 천마는 한 번이라도 지는 순간 천마의 위를 상실하게 되니까.

하지만 그건 살아있을때의 이야기고. 죽고 나서의 천마 위에 대한 법도가 따로 있지는 않았다.

거야 당연하다. 우화등선을 했으니까. 이미 죽은 사람에게 법도가 있을 리가 없다.

“본좌가 등선한 지 천 년은 됐다.”

“어쩌라고. 천 년 지나면 패배가 패배가 아닌가? 옛날 천마 놈들이란 널널하기 그지없게 살았군. 버릇이 없어 버릇이.”

버릇이 없는 건 칠대 주제에 까마득히 먼 삼대천마인 자신에게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네놈이 없는 거겠지.

패도천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면. 설마 지고서도 스스로를 천마라고 참칭할 셈인가?”

저 인간.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에게서 구배를 받아낼 표정이다.

진짜 미친 놈인가. 하는 표정이 패도천의 얼굴에 어렸다.

패도천마. 아니, 이제는 진짜 그냥 ‘패도천’이 돼버린 패도천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니 똥 굵다. 새꺄.”

패도천은 입술을 깨문 다음 술잔에서 손을 치웠다. 더러워서 안 먹는다 더러워서.

“그걸 진짜 안 먹으려고 하네.”

“안 먹어.”

“한 잔 마셔라. 절 없이 마시는 것을 허할 테니.”

“고오맙다.”

“예의를 아는 전前 천마로고.”

패도천의 입 안으로 술이 들어갔다.

“뭐. 그래서 본좌를 찾아온 이유는. 정보를 알아내고 싶어서겠지? 육도천에 대해서라거나. 놈이 가진 무공이 무언가에 대해서라던가.”

승리했으니 당연한 권리겠지만. 패도천은 이를 순순히 실토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에게 모욕을 줬으니 그만한 값을 치러야 답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뭐. BJ천마 입장에서야 자신을 그저 리셋해서 기억을 지운 다음에 물어보면 되는 일이긴 하겠지만. 적어도 최소한 지금의 자신이 질문에 대답을 순순히 해 줄 일은 없으리라.

“그래서. 뭐가 궁금하지? 놈의 무공? 정체?”

“그런 거 없는데.”

“···뭐?”

“그런 거 없다고.”

단천은 술을 홀짝이며 먼 곳을 바라봤다.

“네놈이 술 마시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찾아왔다.”

패도천이 마지막에 했던 말이다. 자신과 술 한잔하자는 말.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BJ천마는 여기에 있었다. 물론 지금 패도천의 혼백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 자리에 구태여 왔다.

“왜. 싫으냐?”

“···싫지는 않다.”

패도천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놈이 주는 술을 마시다 보면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쩔 수 없게 알려줘서는 안 될 비밀들을 발설하게 되겠지.

“술은 좀 마시나?”

“본좌는 두주불사중의 두주불사였느니라.”

“그래. 무공 약한데 술이라도 세야지.”

“이 새끼가 진짜.”

“무공 약한놈이 화내서 뭐 하게?”

“크아아악!”

···다만. 그 비밀을 발설하는 것은 저놈이 깝죽거리는 것에 대한 화가 풀어진 다음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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