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천마-200화 (200/212)

44. 0003, 0005 (7)

패도라는 것은 무거움重과도, 빠름快와도 다르다. 혹자는 둘이 섞여 있는 것을 패도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패도가 가지고 있는 외견만을 바라보는 한 가지의 방식일 뿐이다.

패覇는 굳이 따지자면 모든 것을 부수어破 내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부수어낼 수 있을 정도의 힘은, 그 자체로 패도의 최고 경지라고 할 수 있다.

고오오오오!

패도천이 들고 있는 검에서 세상을 모두 으스러트릴 것만 같은 힘이 너울댔다.

보통의 무인이 방출하는 기운이라면 시청자들이 알아채기 힘들다. 그야 당연하다. ‘기운’이라는 것을 모니터 너머로 볼 수 없는 상태이니까.

하지만 그 ‘기운’이 물질 세계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끼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 지금 자세 잡는데 주변에 아지랑이 뭐임?

> 아지랑이가 아니라 공간이 휘는 거 아니냐?

> 저런 것도 된다고???

패도천이 발하는 패도적인 기운에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져 보였다. 마치 거대한 힘을 가진 별에 빛이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그 일그러짐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강함을 상기시킬 수 있다.

무지한 자라고 할 지라도 경외감이나 두려움을 느끼게 할 만한 장면이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보다 이러한 무학에 밝은 무인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맞상대를 피하고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을 만한 순간이다.

“본좌와 같은 영역에 발을 디딘 자들이라면. 백이면 백. 본좌의 준비를 방해했을 테지.”

패도천 자신의 마지막 한 수. 멸굉滅轟은 같은 경지에 들어선 자라고 해도 막아낼 만한 수준의 것이 아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천은 파천검을 쥔 손에 내공을 있는 대로 모조리 불어넣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내공의 양 차이는 꽤나 선연했다. 당연한 일이다. 단천 자신은 패도천의 공격을 배워내기 위해서 꽤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물러나거나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도망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겠지만.”

패도천마가 만들어낸 검기는 원래도 무식할 정도로 빨랐다. 그런 패도천마가 죽을 힘까지 다 짜 내서 만든 검기의 속도는 예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자신의 경공으로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공을 좀 더 열심히 배워 놓을 것을 그랬나.’

잠깐 생각을 하던 단천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피했을까?

그럴 리 없다. 도망치는 게 가능했어도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은 천마. 단천이니까.

단천은 검을 단단히 틀어쥔 다음 담담하게 말했다.

“와라.”

으드드드득! 패도천 또한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존재다. 그런 육체조차 감당하는 것이 힘들어져 근육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터져나온다.

끔찍한 소리지만 그리 잘 들리지는 않는다.

콰과과과과과과!

태초에 존재했을 것만 같은 폭발음과 함께 기운이 단천을 향해 날아들었다. 눈 깜빡이는 시간보다도 짧은 순간.

패도천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도 힘들 정도의 속도.

하지만 멸굉의 대단함은 속도가 아니다. 부딪히면 무엇이 됐건 반드시 부술 수 있는 거대한 힘.

그것이 바로 멸굉의 요체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아는 게 확실한 단천은 자신의 멸굉을 향해 검을 맞서 뻗었다.

‘이겼다!’

만약 공격이 맞지 않았다면 가능성은 존재한다. 하지만 자신의 공격이 적중했는데도 자신이 질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검과 맞부딪혀서 이기기 위해서는 놈이 가지고 있는 패覇에 대한 이해도가 자신보다 높아야만 했으니까.

승리를 직감한 패도천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패도천의 미소가 지워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콰드드드득!

‘멸굉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다?”

천하를 모두 지워버릴 수도 있는 기운이 멸굉에는 담겨 있다. 그러니 저깟 검 하나와 맞부딪힌다고 해서 멸굉의 크기가 작아지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

이어야 하는데.

드드득! 드드드득!

검과 맞부딪힌 멸굉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단천의 검에 맺혀 있는 검기의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검이. 내 멸굉을 먹어치우고 있다···?’

단천이 발출하는 기운이 멸굉의 기운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일이 자신의 눈 앞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다.

패도천마는 안력을 집중해 BJ천마의 검을 바라봤다. 놈의 검에 맺혀있는 것은 분명히 자신과 닮아있는 패覇의 기운이다.

거기까지는 확실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검과 검기가 맞닿아 있는 곳에서 계속해서 피어오르고 있는 저 기운의 폭풍.

‘서로의 기운을 맞부딪혀 부숴트리고. 그 기운을 다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패覇는 부순다. 그리고 부숴트린 곳에서는 잔해가 남기 마련이다. 그 잔해들을 흡수해 자신의 힘으로 다시 삼는다.

일종의 양의 되먹임(feedback)상태를 유지하는. 신묘하기 그지없는 묘리다.

명백하게. 패도천 자신보다 나아간 경지.

허허. 허허허.

패도천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저 BJ천마라는 미친놈은 자신의 무공을 배우는 동시에, 그것을 한 단계 더 나아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생사의 기로에서 수없이 싸우는 와중에 강해지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극히 희귀한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다.

이런 일이 단순히 우연으로만 빚어진 것일 수 없었다.

이유를 찾아내는 패도천은 오래 지나지 않아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웃고 있군.’

BJ천마의 몸은 만신창이다. 하지만 놈의 얼굴과 눈은 즐겁기 그지없다는 표정이 여전히 깃들어 있다.

아니.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다. 즐거워하는 감정이라기보다는.

경애하고 있는 것이다. 눈 앞의 무인이 도달한 경지를 경애하고, 그가 만들어낸 무를 경애하고, 그 깨달음을 경애한다.

그 경지에 도달한 패도천 자신보다 더.

“···적어도 백수십살은 쳐먹었을 새끼가. 저런 어린애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군.”

패도천 자신도 저럴 때가 있었을 것이다. 새로 보는 모든 것들을 경애하던 때가. 처음 하늘을 보고, 처음 검을 쥐고, 처음 수련을 하던 때에는 하루하루가 경애의 연속이였다.

하지만 인간은 순식간에 타성에 젖기 마련이다. 새롭게 만나는 상대의 검은 그 순간에만 쾌락을 줄 뿐. 경애의 감정을 가지게 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저 인간은 아직까지도 타인의 무에 경애를 가지고 있다.

경악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패도천의 눈과 단천의 눈이 마주쳤다.

피식. 하는 웃음을 단천이 터트렸다. 명백한 멸시의 표정.

“저 개새끼가!”

보통 둘 중 하나를 경애하면 나머지 하나도 경애하게 되지 않나?

어떻게 무는 경애하는데 그걸 이룩한 인간은 길 지나다니는 개미 수준으로 내리깔아본단 말인가.

패도천이 어처구니없어하는 와중에도 검격의 크기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뇌전 수만 개가 치는 것 같던 주변의 소리도 이제는 잦아들어서 세찬 바람소리 정도로 줄어들고.

이내 그마저도 줄어들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어때. 더 할 텐가?”

승패는 났다. 하지만 자신은 천마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자. 패배를 입에 담을

수는 없다.

패도천의 몸이 단천을 향해 부나방처럼 날아들었다. 내공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은 몸.

그러니 그 끝은 명확했다.

푸욱!

단천의 검이 패도천의 심장을 깔끔하게 뚫었다. 조롱따위는 없는 깔끔한 일격이다.

패도천은 자신을 꿰뚫어낸 검을 바라봤다. BJ천마의 검은 아직도 신화경의 초입에 머물러 있었다.

놈이 자신 너머에 있는 ‘괴물’을 이길 수 있을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패도천은 후련함을 느꼈다.

‘이 모든 일이 끝날지도 모르겠군.’

세상에 딱히 아쉬운 것은 없었다. 애초에 자신은 죽은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진한 여운이 남는다. 검을 나누면서 충분히 대화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놈과는 더욱 오래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는 감정이 맴돈다.

“시간 나면. 술 한 잔 하지.”

“되겠냐?”

“그냥. 바람이 그렇다는 거다.”

킥킥거리며 웃던 패도천의 몸이 축 늘어졌다.

[0003이 전투불능이 되었습니다.]

[전투 시뮬레이션을 종료합니다.]

[사용자의 신경 혹사가 과로합니다. 일시적으로 시스템을 종료합니다.]

***

“끄으으응.”

단천이 VR캡슐에서 겨우 기어나왔다. 머리와 척추 전체가 전기로 지지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그야 그럴 것이, VR게임 안에서의 단천의 움직임은 신화경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상태. 반면 지금 단천의 육체는 고작해야 겨우 환골탈태를 한 초보적인 수준의 신체에 불과하다.

그러니 신경줄이 아작이 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단천의 찡그린 표정은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강제로 게임을 꺼 버리는 게 어딨냐고.”

이제 삼대천마를 처치했을 뿐이다. 아직 오대천마가 남아 있는데, 누구 맘대로 게임을 맘대로 꺼 버린단 말인가.

단천은 밖으로 걸어나와 VR캡슐을 여러 번 켜려고 시도했지만 캡슐이 켜지지도 않는다.

[사용자의 신체가 과도한 신경 자극에 노출되었습니다. 기기 사용 가능시간까지 24시간 남았습니다.]

[과도한 신경 자극은 통증, 이명, 신경과민, PTSD및 사망까지 이를 수 있는 상태이므로 반드시 의사의···.]

줄줄이 이어지는 경고문을 본 단천의 눈이 불만스럽게 뜨여졌다.

과거에는 청소년에게 게임을 하지 못하도록 10시 게임 제한이 되어 있기도 했던 게 대한민국이다.

고작 게임하다가 사소한 PTSD가 생길 수 있다고 VR게임을 금지하다니.

그리고 사람이 죽는다고?

눈 앞의 오대천마가 중요한가. 아니면 목숨이 중요한가?

백 명에게 물으면 백 명이 다 똑같이 대답할 질문 아니던가.

“국회로 쳐들어갈까.”

단천은 중얼거렸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기는 하지만 지금 단천의 무력이라면 국회를 장악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그러면 사람을 묶어두는 쓸데없는 법들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

겸사겸사 침 놓는데 자격증이 필요하다거나, 약품 제조에 자격증이 필요하다거나 하는 자신을 구속하는 쓸데없는 법들도 겸사겸사 제거할 수 있고.

잠시 국회에 쳐들어가서 법을 바꿔버릴까 고민하던 단천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국회를 뒤집어엎고 국회를 장악한 뒤에 천마신국을 선포하려면 시간이 꽤 들어간다.

“적당하게 밸런싱을 잘 했군.”

24시간이 아니라 240시간 정도였다면 단천도 달리 마음을 먹었을 터. 만약 그랬다면 지금 국회는 난리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게임 휴식시간은 240시간이 아니라 24시간. 아무리 단천이라고 해도 법을 바꾸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다.

이 시간은 단천으로 하여금 국회에 쳐들어가서 천마신국을 선포하는 대신 얌전히 기다리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래서 게임에서 밸런스가 중요하다는 거군.”

단천은 일상에서 얻은 소소한 깨달음을 마음에 새기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

단천은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신경이 과도하게 혹사된 상태다. 국회 장악정도야 크게 무리를 하지 않아도 되니 괜찮겠지만, 수련을 하면 크게 다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수련도 못하고 꼼짝 없이 휴식을 해야 하는 상태.

잠깐 고민하던 단천은 몸을 일으켰다.

“심심한데. 하인라인에나 좀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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