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0003, 0005 (6)
콰과과과광! 쉴 새 없이 주변에 폭음이 터져나간다. 땅이 부서지고 천지가 뒤집어진다.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이 상황을 만들어내는 두 사람의 몸은 공중에서 쉼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상대가 막아내기 조금이라도 힘든 자리를 선점하기 위한 움직임이 끝없이 이어진다.
둘의 손에서 펼쳐지는 검격은 제대로 한 번만 먹혀도 그대로 죽을 수 있는 위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 순간에 수십 번의 공방이 오가고, 순간순간마다 우열이 뒤바뀐다.
생과 사의 간극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순간이건만. 이 줄타기를 이어나가는 두 명의 얼굴은 즐거움만이 가득했다.
“좋구나!”
패도천의 분노는 이미 사그라들어 있었다. 자신의 무학을 ‘따라한다’는 것이 주는 불쾌감따위는 결국 호적수가 주는 기쁨에 비해서는 미미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므로.
> 와
> 이거 실화냐?
> 한반도만한 전장 준비한 거 잘한 것 같음
제작자들뿐 아니라 시청자들까지도 한반도만한 크기의 전장을 만든 것이 과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둘이 만들어내는 파괴력을 눈으로 보고 있는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실로 눈이 호강하는 수준의 싸움이다.
> 저런 게임이 좀 있으면 나온다는 거지?
> 와 진짜 다음 시대 게임들 개쩔겠다 ㅋㅋㅋㅋ
> 저 정도 퍼포먼스 내려면 VR캡슐 얼마짜리 사야 되냐 급하다
>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또다시 늘어나다니···
보통 AI와 인간간에 벌어지는 싸움은 다음 시대의 게임 퍼포먼스와 연결된다고 봐야 했다. 지금 BJ천마와 패도천이 보여주는 싸움은 실로 산이 부서지고 땅이 수천 갈래로 갈라지는 전투.
동경과 호기심. 그리고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 기대감은 그대로 이 싸움을 주재한 게임사. ‘하인라인’에 가 닿았다.
> 하인라인 다음 게임 도대체 얼마나 쩔게 나오는 거냐
> 하인라인 주가 대폭등중 ㅋㅋㅋㅋㅋ
> 얼마 전에 팔았는데 다시 주워야 되나···
분명히 하인라인 쪽은 AI 퍼포먼스가 자신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어디 그런 말을 쉬이 믿는 법이던가.
그런 까닭에. 하인라인의 사무실의 전화기는 불타오르고 있었다.
“전화 받아! 이 대리!”
“다른 전화 받고 있어요!”
“···개판이군.”
이태흠은 중얼거렸다. 이런 상황이 발생할 것을 조금은 예상했지만. 상상 그 이상의 상태였다.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의 사무실 인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전 세계에서 밀려드는 전화들 때문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인 것이다.
“···어떡하죠? 여기저기서 지금 전투중인 AI 관련 협업하고 싶다는 연락 들어오고 있는데요.”
“어떡하긴 어떡해. 못 한다고 해. 저거 우리 AI 아니라고.”
“그럼 관련 회사라도 알려달래요.”
“모른다고 해.”
“믿어줄까요?”
···거야. 안 믿어주겠지. 자신이 똑같은 말을 들었다면 무슨 미친 소리 하는 거냐고 받아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 걸 어떡하라고.
“···안 믿어줘요. ‘우리랑만’ ‘몰래’ 하면 되고 ‘비밀 엄수’를 철저히 준수한다는 둥 헛소리만 하고.”
“솔직하게 말해.”
“안 믿어준다니까요?”
“······.”
“저희랑 독점 계약 안 한다던 AAA급 게임사들에서도 연락 오고 있어요. AI협업해 주면 차기작 독점계약을 하겠다고.”
눈이 돌아갈 만한 계약들이다. 하지만 지금 BJ천마와 싸우고 있는 AI는 하인라인의 기술이 아니다. 하다 못해 어느 정도 비슷하게라도 만들 수 있다면 저런 계약들을 해 보기라도 할 텐데.
“···끄응. 생전 처음 보는 보안장치만 아니었어도.”
이 모든 것들이 죄다 AI가 걸려 있는 칩에 걸려 있는 보안장치 때문이다.
“아직도 보안 해독은 안 되는 거지?”
“전혀 단서가 없습니다. 그. BJ천마가 말한 것처럼···.”
“부적이 보안 해독을 막고 있다. 그걸 믿으라고? 야. 이 새끼야. 지금 21세기야. 무슨 놈의 부적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 아닙니까?”
혹시 모르기는 개뿔이.
“야. 그럼 BJ천마 말이 다 맞으면 지금 BJ천마가 이기면, 그놈의 부적이 사라지니까. AI 프로그램 자체는 우리 게 될 수도 있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거냐?”
“···말하자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되겠냐?
이태흠은 앞으로 신입사원을 뽑을 때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믿는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문구라도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괴력난신을 믿는다고 해도 인력이 너무 부족해서 가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기는 했지만.
“BJ천마가 지금까지 보여 준 말도 안 되는 짓들을 생각한다면. 그 사람 말이 맞을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장난이야? 휴대폰으로 비행기 예매도 못하는 놈 말이 맞겠냐고!”
하지만 말을 하는 이태흠조차도 마음 속 어느 한 구석에서는 무언가 기대감이 있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BJ천마가 지금까지 한 짓들 가운데 말이 되는 게 하나라도 있었던가.
어쩌면. 정말 어쩌면. BJ천마가 이기고 보안 모듈이 해제된다는 것이 실제로 벌어지는 일일 수도 있는···.
“아니. 아니지.”
이태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자존심에 관한 문제였다. 이성과 비이성의 싸움이며, 물리학과 괴력난신의 싸움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겨라.”
왜인지 BJ천마가 반드시 이겨주기를 바라게 된다.
***
우드득!
패도천의 팔의 근육이 불쾌한 소리를 내며 살짝 뜯어졌다. 신화경에 도달한 몸은 몸의 상처를 순식간에 수복했다. 그러니 사실상의 데미지는 0이다.
그럼에도 패도천의 표정에는 기묘한 낭패감이 어려 있었다.
처음에 BJ천마가 자신처럼 검기를 날려댈 때에는 자신이 계속해서 유리했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무공을 선보이는 놈과 다르게 패도천 자신은 이 방식의 싸움법을 십수년은 수련을 했었으니까.
하지만 이 유리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합으로 따지자면 천여 합이 지나기도 전에 유리함은 유불리가 순식간에 바뀌는 동수의 싸움으로 변했고.
지금 처음으로 낭패다운 낭패를 봤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재능이로군.”
하늘 아래에서 수많은 천재라는 놈들을 봐 온 패도천이다. 수십만명의 무인들 가운데서 천재라는 놈들을 봐 왔지만 한 명도 자신의 눈에 차는 이는 없었다.
패도천 자신이 그들조차 굽어보는 수준의 천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패도천은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 앞의 ‘BJ천마’라는 인간이. 규격 외의 재능을 타고 났다는 것을.
“당연한 말을 하기 위해서 입이 뚫려 있는 것은 아닐 텐데.”
패도천은 눈 앞의 애송이를 바라봤다. 초장에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우위 덕분에 놈의 몸은 피투성이다. 팔다리가 몇 번이나 잘릴 뻔하고, 무한에 가까운 신화경의 내공조차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는 상태지만.
놈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주어진다면 그것은 사실이 될 터였다.
“그래서. 패배 선언이냐?”
“패배 선언? 본좌에게 지금 패배 선언을 하려는 것이냐고 물은 것이냐?”
“졌다고 울음을 터트려 봤자 봐 주지는 않을 테지만.”
“울음을 터트려? 본좌가? 상상 이상으로 미친 놈이로구나! 하하하하!”
패도천의 입에서 광소가 터져나왔다.
“좋다. 네놈이 그만큼 오만할만큼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마.”
“인정이 늦은 편이군. 바둑 둘 때도 끝까지 아둥바둥 버티는 편이지?”
“굳이 버틸 필요 있나? 상대방의 목을 잘라 버리면 본좌의 승리인데.”
“미친 놈인가?”
단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바둑 좀 진다고 상대의 목을 잘라 버리다니. 정도 이상의 잔혹함이다.
“바둑에 이기기 위해서라면 그저 상대의 팔을 꺾는다던가, 다리를 반대로 꺾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크큭. 순수하기 그지없구만. 본좌를 상대로 이겨보겠다는 마음 자체가 목을 잘리기에 충분한 불충인 것을.”
> ???
> 바둑 이야기하는 거 맞죠? 바둑 이야기하는데 왜 팔다리 꺾고 목을 자른다는 이야기가 나옴?
> 바둑을 잘 둬서 이길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인간 A와 인공지능 A의 대화
> 나는··· 이 대화 자체를 못 따라가겠어···
시청자들이 경악에 빠졌다. 둘 중 누가 이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어느 쪽이 이기건 이 승부의 승리자는 인간 비스무리한 무언가라는 것.
시청자들이 경악에 빠지거나 말거나 패도천은 검을 뽑아들었다. 재미있는 놈이었다. 재능은 하늘을 찢고, 그 무력또한 천마에 어울린다.
그런데도 기묘할 정도로 피냄새가 나지 않는다. 자신을 비롯한 여섯 천마는 모조리 다 인간을 벌레 보듯 죽여온 자들이다.
하지만 눈 앞의 단천은.
‘필요한 살생만을 해 온 놈 같은 느낌이란 말이지.’
여러 모로 독특한 놈이다. 아마 시간이 지난다면 자신은 패배하게 될 것이다.
“네놈이 언젠가는 나를 이기게 될 테지. 나와는 달리 네놈에게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으니까.”
“뭐래.”
단천은 몸에 붙은 피딱지를 떼어 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네놈이나 나나. 한 번 뒈지면 그걸로 끝이다.”
단천의 눈은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네놈이 여기서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 싸움 방식대로 싸운다면.”
단천은 패도천을 직시했다. 무림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실력의 삼 할은 숨기라는 말이.
단천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패를 숨겼던 것처럼. 놈도 숨겨두고 있는 마지막 한 수가 있다.
‘승산은 얼마나 되려나.’
단천은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내 승률 십 할. 그리고··· 패도천이 이길 가능성 십 할 정도쯤인가.’
산술을 조금이라도 하는 자가 봤다면 무슨 이십할같은 소리를 지껄이냐고 방방 뛰었을 기적의 산법을 마친 단천은 검을 고쳐든 채 자세를 바로했다.
“내가 숨기고 있는 수가 있다는 걸 알아챈 건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달려들지 않나? 숨기고 있는 한 수가 있다는 걸 알면 누구나가 죽자사자 달려들던데.”
“나중에 숨겨놓는 수가 있었다면서 진짜로 진 게 아니라느니. 진짜 승부는 모른다느니 하는 새끼들이 종종 있으니까.”
“본좌가 그런 찌질한 놈이라고 생각하는 게냐?”
“찌질이가 스스로 찌질이라고 하는 거 본 적 있냐?”
“······.”
패도천의 말문이 막혔다.
하긴, 찌질이가 스스로 찌질이라고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는 게 맞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찌질이라는 말을. 천마한테 직접적으로 하는 자가 있었던가?
“간이 배 밖에 나온 놈이로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린 패도천이 자신의 검을 움켜잡았다.
뭐가 됐건. 놈이 바라는 것은 서로가 전력을 다한 마지막 한 합의 일격뿐.
그리고 일격의 승부에서 패도覇道는 다른 그 어떤 무학보다 위에 존재한다.
“본좌를 상대로 일격 승부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게 해 주마!”
패도천의 몸에 퍼져나가던 모든 기운이 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네놈이 결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천외천이 있다는 것을. 네놈은 알게 될 거다!”
쩌저저저저적!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땅이 부서지고 공간이 일그러질 정도의 패도적인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