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0003, 0005 (2)
“세팅 완료되었습니다.”
“동기화는 완벽해?”
“전혀 문제 없습니다.”
“그래. 절대 지면 안 되니까 세팅 완벽하게 하라고.”
하인라인은 게임사답게 성능 좋은 수준의 부품이 질릴 정도로 많이 구비되어 있다. 보통은 게임 테스팅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부품들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근데, 이렇게 부품들을 많이 사용하는 건 반칙 아닌가요?”
“전쟁에서 반칙이 어딨냐? 내가 미사일 가지고 있는데 상대가 돌도끼 쓴다고 돌도끼로 싸워 줘야 돼?”
이태흠의 말이 백번 지당한 말이긴 하다.
아무리 그래도 저만한 칩 하나 상대하겠다고 건물 안에 있는 부품 다 들고 오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이걸로 이겨도 이겼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상대쪽 인공지능은 설정 완료됐나?”
“모델링, 성능, 무기, 근력을 비롯한 설정이 거의 다 돼 있더라고요.”
“그리고··· ‘내공’관련 설정도 있던데.”
“내공?”
“네. 요새 유행하는 방식의 신체 능력 증강 프로그램 말이에요.”
이태흠의 고개가 잠시 모로 돌아갔다. 이 칩 안에 있는 인공지능.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의 몸을 움직이는 프로그램 아닌가?
그런데 왜 내공이 필요한 거지?
“···뭐. 그리 큰 문제는 아니겠지. 다른 인공지능을 박아넣은 것일 수도 있고. 내공 사용 전투. 우리 DP고도 학습 완료됐지?”
“물론 있습니다.”
“그럼 그것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세팅이 거의 완료됐다. 이제는 전투를 붙여보기만 하면 되는 상황.
“넘버링 0003이랑 0005중에 뭘 먼저 써 볼까요?”
“···0003으로.”
3번과 5번. 둘 중 어느 쪽이건 크게 상관은 없지만 숫자가 적은 것이 조금 더 먼저 만들어진 프로그램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이길 확률이 높은 3번으로 간다!”
“진짜 이길 마음뿐이네요.”
“이기는 거야 맞는데. 져도 별 문제 없지 않나요?”
“이거 지면. BJ천마가 인공지능이랑 붙는 전투장소 모델링 해줘야 돼.”
“언제까지요?”
“그건 안 물어 봤는데.”
“······.”
직원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어, 어차피 이길 거니까! 괜찮아!”
자신들의 인공지능은 완벽하다. 그러니 질 리 없다! 질 확률이 없는 도박인데 풀베팅은 기본 아니겠는가!
하늘이 두쪽나지 않는 한 자신들이 질 리는 없다!
“그럼. 바로 실행하겠습니다.”
[인공지능 전투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시뮬레이션 화면 안에 서 있는 것은 백색의 옷을 입은 무인이었다. 여리여리한 몸이었지만 왜인지 풍겨져나오는 분위기만큼은 그 행색과 대비될 정도로 정돈되어 있다.
[我是第一次來這裡.]
중국어로 중얼거리는 남자.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자 남자의 말이 번역되어 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장소는 또한 처음이로군. 바깥에서 보고 있나?]
마치 자신들에게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물음이다.
“말 하는 건 진짜 인간같네요.”
“그거야 모든 인공지능이 요새는 다 그렇지. 튜링 테스트 통과 못 하는 인공지능이 요새 어딨다고.”
[본좌는 뭘 하면 되지?]
“스스로를 본좌라고 칭하네요.”
“말하는 건 BJ천마랑 비슷한 것 같은데.”
“에이. BJ천마가 자기 칭할 때는 저거 배는 오만하죠.”
“아무튼지간에 사람처럼 보이는 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강함이지.”
[DP고의 신체를 생성합니다.]
003호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DP고가 003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불쾌하군. 본좌와 같은 모습이라니.]
[003호.]
[본좌는 003호가 아니다.]
[그러면 뭐라고 부르면 되지?]
[패도천존님이라고 부르도록.]
[패도천존. 네 목표는 앞에 있는 DP고를 이기는 것···.]
채팅이 다 쳐지기도 전에 3호의 몸이 앞으로 빛살처럼 뻗어나갔다. DP고가 3호의 검격을 막기 위해 검을 들어올렸다.
실로 효율적이기 그지없는 완벽한 대응. 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쩌저저적!
분명히 같은 강도로 만들어진 무기인데도 DP고의 검이 3호의 검에 반으로 조각나버렸다.
조각난 것은 DP고의 검만이 아니었다. 검이 닿지도 않은 DP고의 몸까지도 반으로 갈라져내리기 시작했다.
털썩!
[DP고가 전투불능이 되었습니다.]
쪼개지는 적의 모습을 보지도 않은 채. 3호는 혀를 찰 뿐이었다.
[버러지같은 놈.]
“···미친.”
“뭐, 뭔가 오류가 발생한 거 아냐? 설정 조절 좀 해 봐!”
“데이터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
이태흠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설정 다시 해! DP고의 전술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몸과 무기를 줘!”
이태흠 자신도 남자다. 승부는 단 한 번 뿐. 이미 내기에 졌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
하지만 그건 내기의 결과. 저런 조그마한 칩에 있는 인공지능에게 진다는 것은 자존심 문제다.
“제대로 설정하고 붙여줘!”
하지만.
쩌저적!
몇 번은 반복해도 승패는 바뀌지 않았다. 그저 이곳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것 같은 표정의 남자가 묵묵히 DP고를 수십 번이고, 수백 번이고 일도양단할 뿐.
“······.”
“미친.”
“이거. 진짜 인공지능 맞아?”
“인공지능 아니면, 인간이겠냐?”
패도천존은 귀찮다는 듯 검을 집어넣은 다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랫동안 맞수를 찾지 못한 자만이 뱉어낼 수 있는 기나긴 한숨.
[질린다. 더 재미있는 승부는 없는 건가?]
***
“슬슬 연락 올 때가 됐는데.”
“무슨 연락?”
“패배 선언 연락.”
“왜. 또 누구 괴롭혔어?”
“내가 누굴 괴롭힐 사람으로 보여?”
“어.”
단지은의 단호한 말에 단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단천 자신은 어딜 가서도 공자의 도를 벗어난 적이 없건만, 주변 사람들을 보면 언제나 자신이 악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한다.
세상이란 것은 이토록 고독한 것이다.
공자라도 이 세상에 살아 있었다면 자신의 편이 되어 주었을 텐데.
“얼마 전에 기부도 했다니까.”
“기부는 금액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거야.”
“내 기부는 마음도 크고 금액도 커.”
“어련하시겠어요.”
단지은은 단천에게 핀잔을 줬다. 그래도 분위기로 봐서는 단천의 방송이 그리 나쁘지 않게 되어 가는 모양이었다.
‘언제 한 번 방송하는 거 봐야지.’
일 하는 게 바쁘기도 했고, 방송이 잘 되지 않는 것을 신경쓰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단천의 방송에는 의도적으로 관심을 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슬슬 방송이 자리는 잡아가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많이들 봐?”
“아니. 만족스러운 만큼은 아냐.”
물론 시청자수가 아직까지 그렇게 많지 않은 모양이긴 했다. 사람이 많다면 많다고 이야기했을 텐데 한 번도 시청자수가 만족스럽다는 말을 들어보질 못했으니까.
‘대충 백 명쯤 되려나.’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송에서 100명도 모으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100명이라도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보는 거다.
[하인라인 사장 이태흠]
“어디 전화야?”
“게임사.”
저것 보라. 게임사에도 아는 친구가 생기지 않았던가. ‘사장’이란 이름을 별명으로 달고 있는 것을 보아 단천처럼 꿈은 큰 친구인 모양이었다.
단천은 집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이태흠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시뮬레이션 결과는?”
[완패. 완패다.]
“그렇겠지.”
[1:1뿐 아니라 3:1, 100:1의 상황까지도··· 못 이겼다.]
사실 당연한 결과다. 인공지능의 능력이 아무리 높아졌다고 한들, 인간의 것을 초월한 천외천의 존재들을 꺾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단천이 건냈던 칩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그 괴물 중에서도 한 시대의 천하제일이라고 불리웠던 ‘천마’들 아니던가.
인공지능 따위가 천마를 이기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차피 정해져 있던 승패따위가 아니었다.
[대체 이 인공지능을 개발한 자들은 누구지? 중국에 이 정도 기술이 있었다고?]
“중국의 기술이 아니다.”
[중국 아니면 어디 기술인데?]
“무림?”
[뭔 개소···.]
입으로 욕을 뱉어내려던 이태흠이 아차했는지 말을 삼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은 내기에서 패한 입장이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BJ천마에게 험한 말을 해서 이득될 게 없다.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단천은 무덤덤했다. 자신을 향한 욕이야 경을 칠 일이지만. 그건 나중에 해도 될 일이고.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판돈은?”
단천 자신이 판돈으로 내걸었던 ‘경기장’이 언제쯤 완성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어느 정도의 규모를 원하지?]
단천은 손가락을 꼽았다. 생사경을 초월해 신화경에 들어간 무인 둘이 싸우는 공간.
“대충 서울 시 정도 크기면 될 것 같은데.”
[······농담하는 거지?]
“본좌가 농담하는 걸 본 적 있나?”
거야 없는데. 허무맹랑한 소리를 맨날 입에 달고 사니까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애초에 허무맹랑한 짓을 죄다 현실로 끌어와서 해내 버리니까 하는 말이지만.
[서울 시만한 크기의 공간에서 싸우겠다고? 그렇게 큰 규모의 싸움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할 수 있을 리가 없기는. 신화경이 아닌 생사경 수준에 불과한 하수들의 싸움에서도 산 한두 개쯤은 장난으로 날아간다.
그러니까 서울 정도 크기는 돼야 충분히···.
‘가만.’
생사경 두 명 붙어도 서울시 정도는 초토화되고도 남을 것 같은데?
그러면 서울보다 더 큰 범위의 전투장소가 필요한 것 아닌가?
“생각해 보니 좀 잘못 계산했군.”
[역시 그렇지? 그래. 1:1 싸움을 하는 데 서울만한 크기의 싸움판이 필요할 리가···.]
“한반도만한 크기의 공간을 준비하도록.”
[······.]
이태흠의 표정이 멍해졌다.
뭐지. 잘못 들은 건가. 한반도 크기면 서울의 몇십 배는 되는 크기잖아.
[그. 혹시 모르는 모양인데 한반도는 서울보다 크다네.]
“잘 알고 있다.”
[······.]
잘 알고 있으면 안 되지. 여기서는 아? 그런가? 하하! 그렇구만! 서울 크기가 아니라 울릉도 정도 크기로 만들어 주면 충분해! 같은 말이 나와야지!
역시 이 새끼랑은 뭔가 내기같은 것을 하는 게 아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인지한 이태흠의 눈이 부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괜찮다. 뭐 엄청 잘 만들 필요는 없고, 단순한 평지라도 크게 문제는 없을 테니까.”
[그거 참 다행이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로군.”
[그, 그래서 말인데. 이거 만드는 건 언제까지 만들면 되지?]
단천은 손가락을 다시 꼽았다. 아무리 그래도 전대 천마들과의 싸움을 하게 될 공간이다. 그러니 최대한 전투장소가 꼼꼼하게 잘 만들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흘 뒤.”
[···사흘 뒤?]
“왜. 부족한가?”
이태흠의 표정이 굳었다. 15초 전에 저 자식에게 한반도 크기가 너무 크다는 피드백을 넣고 나서 어떤 피드백이 돌아왔는지 넘칠 정도로 경험했다.
[충···분···하지··· 사흘이면··· 충분하고도 남지···.]
“충분하다니 다행이군.”
[일정을 충분하게 줘서···고오오오맙네···.]
“괜찮다. 자비란 것은 높은 자가 가져야 할 덕목인 법이니.”
이걸 뭐라더라. 노블리스 오블리주라고 하던가.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고마워하는 이태흠을 바라보며 단천은 이가 드러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