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0003, 0005 (1)
다키스트 에이지 이후에도 단천이 이전에 플레이했던 게임들의 플레이는 계속되었다.
“안돼에에에에!”
절벽 너머로 떨어지는 정유채의 목소리가 절벽 위로 메아리쳤다.
“흐흐흑. 이겼다···!”
런닝돌의 짧달막한 팔다리임에도 제로콜의 움직임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 근데 이거 마지막까지 달리는 게임 아니냐?
> 상대방 지옥으로 밀어 떨어트리는 게임이 아니라고 ㅋㅋㅋㅋ
> 요새 런닝돌 보면 죄다 BJ천마 메타로 절벽으로 사람들 밀어넘어트리려고만 함
> 천마가 게임에 독을 풀었다!!!
“독을 푼 게 아니라 제대로 즐기는 법을 전파한 것뿐이다.”
애초에 경공 싸움이라고 함은 경공으로 이겨야 할 상대의 다리를 부러트리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
발본색원만큼 왕도적인 해결법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 우리는 그걸 독을 풀었다고 하기로 약속했어요
> 근데 이렇게 훈련 면제권 뿌려도 됨?
“상관없다.”
단천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훈련 면제권을 쓰려면 면제권을 쓰는 날에 해야 할 훈련을 전날과 다음 날에 나눠서 해야 한다.”
훈련 면제권으로 하루 쉰다고 해서 총 훈련량은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다.
> ?
> 결국 쓰던말던 똑같네
> 그런 말은 없었잖아요
> 사기꾼이잖아 ㅋㅋㅋㅋ
“사기꾼이라니.”
본래 약관은 제대로 읽지 않은 자의 잘못이지 약관을 제시한 자의 잘못이 아닌 법.
“끼야호오오오!”
“그리고. 지금 제로콜의 기쁨은 진짜지. 저토록 환한 웃음이 거짓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비록 훈련권이 사실상 무의미하다고 해도 제로콜이 지금 느끼고 있는 기쁨만큼은 진짜인 것이다.
그거면 충분한 것 아니겠는가.
단천은 염화미소를 지어보였다.
> 훈훈하게 웃지마 ㅋㅋㅋㅋㅋ
> 급 교훈적인 척 하지 마세요
> 교훈적인 악마 등장
꽃을 들어보였건만 자신의 뜻을 알아채는 인간이 한 명도 없다는 것에 단천은 혀를 찼다. 이래서 평범한 인간들이란.
게임을 주욱 둘러보고 나서 다시금 단천이 한 생각은, 역시 게임은 무의 길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신체의 균형감각을 극한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하는 런닝돌, 다수와의 전장 경험을 할 수 있는 레일 서바이버. 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는 종말 생존자까지.’
아마도 단천이 해 보지 못한 게임들도 제각각 무학에 대한 의미들을 담고 있을 터.
구태여 노골적으로 내공을 사용하게 만들어져 있는 게임이 아니더라도. 그 안에 있는 무의 길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은 앞서서 보여주는 자가 있으면 더욱 잘 보여지게 된다.
“본좌가 제대로 게임을 하는 법을 보여준 런닝돌처럼 말이지.”
> 게임에 독 풀어놓고 왜 저렇게 뻔뻔함
> 이열;; 아메리카에 상륙한 콜럼버스가 지었을 표정;;
> 근데 저거 하면서 다른 게임 실력 많이 는 건 팩트임
단천은 다시금 왜 자신이 ‘게임 방송’이라는 것을 하고 싶었는지를 깨달았다.
방송을 시작하던 순간에는 단순히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게 모르게 자신의 궤적은 무학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꽤 기분 좋은 일이군.”
이 길은 더욱 커지고 깊어질 것이다.
중원에서는 단천 자신의 실력을 직접 보여줄 수 있는 길이 한정적이었다. 다시 보여주는 것도 불가능하고, 볼 수 있는 사람의 수도 제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스트리밍은 어떠한가. 단천 자신이 보여준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무한하며. 바라는 사람이 원하는 장소, 원하는 때에 볼 수 있다.
강자가 세상에 넘쳐나게 될 것이다.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그리고 강자가 계속해서 늘어난다면···.
“내 마지막 꿈이 이뤄질지도.”
천하제일인. 고금제일인. 영원제일인.
그리고 단천 자신의 별호였던 마지막 꿈이 이뤄지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것이다.
단천의 입꼬리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천마 형 웃는데?”
“냅둬. 좋은 꿈이라도 꾸는가보지.”
“우리들 괴롭히는 꿈 꾸는 거야?”
“아마 그런가 본데.”
사람이 간만에 훈훈한 표정을 짓는데 저런 반응이라니. 이래서 검은머리 짐승은 거둬서는 안 된다는 거다.
***
며칠 뒤. 이태흠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프로그램 복호화 완료됐어.]
짧은 문자를 확인한 단천은 바로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연결했다.
한 번의 연결음이 끝나기도 전에 영상통화가 연결됐다.
영상통화가 연결되자 다크서클이 볼의 끝까지 내려가고 있는 이태흠의 얼굴이 보였다.
[거지같이 어려운 암호들이었어. 양자컴퓨터가 상용화되거 나서는 웬만큼 높은 수준의 암호라도 하루이틀이면 풀어낼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이 정도 수준의 암호라니.]
이태흠은 단천이 놀랍도록 관심없는 말을 계속해서 쭝얼거렸다.
가만히 놔 뒀다가는 수십 시간은 더 이야기를 할 것 같기에 단천은 말을 끊었다.
“그래. 내용은?”
[인공지능 프로그램.]
“인공지능?”
[ 장치를 뇌에 가까운 신경에 삽입하면, 이 인공지능의 움직임에 따라 신체가 움직이게 되지. 일종의 조종 칩이랄까. 이런 연구는 금지되어 있을 텐데. 어디서 난 거지?]
“중국.”
[···그건 나도 옆에서 봤으니 아는 거고. 어느 회사에서 나온 거냐고.]
“모르겠는데.”
이태흠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안에 있는 인공지능의 종류는?”
[이름은 없고, 넘버링으로 돼 있어. 0003. 그리고 0005.]
삼대천마와 오대천마의 무공이니. 3과 5인 모양이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름 방식이다.
딱히 중요한 일도 아니고.
“그 외에는 별 것 없나?”
[···흐음. 특별한 것은 아닌데, 칩의 안에 들어가 있는 모델링 중에 특이한 게 있어서.]
“특이한 것?”
이태흠이 휴대폰 화면을 모니터로 전환했다. 모니터 안에 보이는 것은 금색의 바탕 안에 붉은 색의 인주로 쓰여진 형형색색의 문양.
저런 형태의 문양을 가진 부적을. 단천은 이미 알고 있다.
[부적 같은데. 이걸 왜 굳이 이 안에 넣어 놨는지 모르겠다.]
“초혼부라고 하는 부적이다.”
영을 불러 고정시키는 형태의 부적. 인간의 몸이 아닌 다른 곳에 영을 만들어 고정시키는 부적이 바로 저 초혼부다.
보통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된 강시의 몸에 부착하는 물건인데. 이런 방식으로도 사용을 할 수 있을 줄이야.
그리고 저 초혼부가 프로그램 안에 있다는 것은. 삼대와 오대의 ‘인공지능’이 아닌 진짜 ‘영혼’이 있다는 뜻.
“그 인공지능을 실행할 수도 있나?”
[가능은 할 것 같은데. 왜? 인공지능이랑 싸워 보려고?]
“그래.”
[이 인공지능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지만. 이 좁쌀만한 칩에 담겨 있는 인공지능의 성능은 한계가 있을 텐데?]
“한계가 있다고?”
[그럴 거면, 우리 회사에서 개발중인 DP고라는 인공지능 있는데. 이거랑 붙어 보는 건 어때?]
단천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노골적인 영업이다. 하긴. 지금 BJ천마의 인지도는 상상 이상이다. 과거에 딥 블루가 체스로 카스파로프를 이겼을 때. 그리고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을 때. 그 광고효과는 실로 어마어마했었다.
물론 이태흠도 인공지능이 단천을 이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초대형 스트리머와 인공지능의 대결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광고가 되는 이벤트.
이태흠 입장에서도 자사의 인공지능을 광고하고 싶은 것이 당연지사인 것이다.
“그럼. 한 번 해 봐.”
[뭘?]
“그 자그마한 칩에 있는 인공지능이랑, DP고인가 뭔가 하는 인공지능을 붙여 보라고.”
[붙어서 이기면?]
“DP고인기 뭔가가 이기면 붙어 주지.”
[···두말하는 일 없겠지?]
“본좌는 한 입으로 두말을 해 본 역사가 없다.”
이태흠의 표정은 전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냐 그 표정은.”
[···아니. 아니다.]
“다만.”
[다만?]
“너희가 진다면, 본좌가 인공지능과 싸울 장소를 너희가 만들어주는 걸로.”
[우리가 무조건 이길 텐데? 인공지능의 강함은 결국 컴퓨터의 성능···.]
“그건 네 생각이고.”
[무르기 없기다.]
이태흠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그리고 이태흠의 것보다 더 큰 미소가 단천의 입꼬리에 걸려 있었다.
***
딸깍. 이태흠은 휴대폰을 닫고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BJ천마 관련해서 엄청 대박인 건이 생길 것 같아서.”
BJ천마. 라는 말에 주변에 있는 직원들 모두가 움찔거렸다. BJ천마 관련되어 일어난 일들은 모두 회사 입장에서 초대박을 쳤다는 것을 하인라인 내부자라면 모두가 알았다.
하지만 그건 공식적인 회사의 입장이고. 그 초대박이라는 게 별 헤는 밤의 별처럼이나 많은 수의 야근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얼마 전에 회사 차원에서 수면실이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최상급의 침대와 개별 인원들의 수면의 질을 보장하는 기구들이 완비되어 있지만. 그 누구도 기뻐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수면실의 존재 이유 자체가 ‘잠을 여기서 자고 일하라’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
“그, 그래도 돈은 많이 버, 벌잖아?”
직원들의 눈초리에 변명하듯 이태흠이 중얼거렸다.
이태흠의 경영철학은 단순했다. 모든 직원들이 파트너다. 일을 한 만큼의 보상이 따르는 것이 바로 하인라인의 경영철학인 것이다.
그러니 과로의 선봉에는 언제나 이태흠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따지자면 이상적인 리더상이랄까.
애초에 뒤에서 채찍질만 하는 사람이 이태흠이었다면 저 창밖으로 던져진 지 오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BJ천마랑 내기했는데. 이거 완전 대박 건수야.”
“그. 뭔진 몰라도 안 하면 안 됩니까?”
“야. 우리 인공지능 성능 못 믿어?”
인공지능 개발에 있어서 하인라인은 선두에 서 있는 기업이다. 여러 테스팅에서도 우수한 성과를 보이고 있고, 실제로 전투능력도 말도 안 될 정도로 우수하다.
하지만···.
“상대가 그, 그 새끼잖아요.”
BJ천마라는 이름 자체를 부르려던 직원이 ‘그 새끼’라고 이름을 바꿨다. BJ천마라는 이름을 듣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는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탓이다.
자신들이 만든 인공지능의 성능. 잘 안다.
하지만 그 상대가 BJ천마라면.
‘싸우기 싫어.’
‘무조건 질 것 같은데.’
‘퇴사하고 싶다··· 얼마 전에 받은 스톡옵션만 아니었어도···.’
뭐가 됐건 손해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진하게 드는 것이다.
“그. 지금이라도 무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야. 근데 우리가 BJ천마랑 직접적으로 붙는 건 아니야. 괜찮다고.”
직원들의 자신에 대한 불신의 눈빛을 깨달은 이태흠이 헛기침을 하며 자신을 변호했다.
이태흠도 BJ천마와 직접적으로 엮이는 것이라면 단박에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 자그마한 칩에 있는 인공지능만 이기면 돼!”
“칩에 들어 있는 인공지능이요?”
“이 칩에 있는 인공지능이면 매커니즘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가 이길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야기를 들은 직원들의 눈이 희망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희망 수준이 아니었다. 인공지능의 성능은 매커니즘에 좌우되는 부분도 있지만 매커니즘이 고도화된 지금은 매커니즘보다는 인공지능을 돌리는 컴퓨터의 성능에 좌우되는 경향이 강하다.
저 조그마한 칩셋의 인공지능 매커니즘이 아무리 뛰어나도 성능 좋은 양자컴퓨터에서 실행되는 인공지능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 정도면 해 볼 만할지도?”
“야. 우리가 당연히 이기지. BJ천마도 아니고 그냥 인공지능이라며?”
“우리가 무조건 이겨. 사장님. 그냥 바로 붙여볼까요?”
“아니.”
당연히 이길 승부. 하지만 그렇다고 이태흠은 방심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서버랑 그래픽 칩셋 가능한 한 다 공수해 와. 인공지능 관련 직원들 싹 모으고.”
반드시 이긴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