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천마-193화 (193/212)

43. 돌아보기 (5)

단천은 여유롭게 하늘에 선 채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뭐야 이게!”

“말이라도 좀 해 줘야 될 거 아니에요!”

바닥에 떨어진 풀창고들이 거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지하세계로 떨어져내렸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보다 어떻게 공중에 서 있는 거야?”

“핵 아니야?”

“본좌는 핵보다도 훨씬 강력한 존재다.”

>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잖아 ㅋㅋㅋㅋ

> 핵(nuclear)

> 근데 진짜 어떻게 서 있는 거임?

“그냥 공기중에 내공을 발출하고, 만들어진 난류 위에 서 있으면 되는 것이다. 어렵지 않지?”

‘충분히 어려워 보이는데.’

[다에뉴비 님이 30,000원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오! 저것도 해볼만할지도?]

> 뉴비(뉴비아님)

> 제발 뉴비면 뉴비답게 살아주세요···

“어렵다면 쉽게 배우는 방법도 있다. 본좌가 이걸로 여러 명에게 허공답보를 가르쳤지.”

“어떻게 하면 되는데?”

“될 때까지 절벽에서 떨어지면 된다.”

그게 되겠냐? 라는 반응이 바로 되돌아왔지만 단천의 고개는 숙여지지 않았다.

실제로 서윤학이 허공답보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이 방식을 통해서였으니까.

화경에 든 고수가 절벽에서 죽기 직전까지 반복해서 떨어지는 경험을 해야 했다는 점이 사소한 문제지만.

이곳은 VR세계. 절벽에서 좀 떨어지는 것으로는 죽지 않는다.

“그. 형. 아무리 게임이라도 통각은 느낄 수 있다고. 절벽에서 떨어지면 고무망치로 맞은 정도로는 아파.”

“그 정도면 평생 떨어져도 괜찮겠군.”

뭔가 설득을 하려던 풀창고는 그제서야 자신이 대화하고 있는 존재가 누구인가를 다시금 자각했다.

단천은 생긴 게 사람처럼 생겨서 문득문득 대화를 시도해보려고 하게 된다는 점이 문제였다.

차라리 외계 괴물처럼 생겼으면 아예 대화를 해 볼 생각도 하지 않을 텐데.

“···아무튼. 여기서 뭘 하면 돼?”

풀창고들이 주변을 돌아봤다. 떨어진 곳이 지하라서 어두침침한 장소를 생각했는데. 조금도 어둡지 않은 공간이었다.

저 멀리에서 태양의 역할을 하는 것 같은 광구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바닥에는 냇물도 흐르고, 여러 식물들도 자생하고 있다.

“여기서 해야 하는 것은 하나. 살아남는 것이다.”

“···살아남는 것?”

“그거면 되는 거야?”

“여기서 그냥 사는 거면 백 년도 살겠다.”

“심심해서 어떻게 백년을 사냐. 바보야?”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

평화로운 주변의 분위기에 네 명의 표정이 여유로워졌다. 하긴. 인간이라는 게 다른 인간을 마냥 악랄하게 괴롭히는 것만이 가능한 일은 아니다.

소위 채찍이 있으면 당근을 주는 것도 인지상정. 이렇게 평화로운 장소에서 힐링하는 시간도 만들어주는 게 인간이라면 당연한 도리···.

그르르륵!

근데, 왜 저 멀리서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거지.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넷씩이나.

“인피니티 보어?”

자신들을 쏘아보는 사람 몸만한 눈동자와 코에서 뿜어져나오는 숨결을 뿜어내는 거대한 해골 멧돼지.

그 강력함과 까다로움으로는 손가락에 들어가는 인피니티 보어가 네 마리나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튜토리얼 스테이지 : 인피니티 보어]

“이게 튜토리얼 스테이지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풀창고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풀창고의 말이 모두 끝나기도 전에 인피니티 보어들이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르르르르륵!

“피해! 구석으로!”

풀창고의 말에 나머지 세 명이 일사불란하게 피했다. 하지만 풀창고 자신은 피하는 것이 한 발 늦었다.

퍼어어엉!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풀창고의 몸이 너울거리며 날아갔다.

“끼에엑!”

> 본인이 피하라고 해 놓고 본인이 못 피하는 건 뭐 어쩌라는 거임 ㅋㅋㅋㅋ

> 고인물이라는 이름이 운다 울어

> ㄹㅇ ㅋㅋㅋㅋ

본래라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풀창고는 죽지 않았다.

풀썩.

“끄하아아악!”

그저 죽을만큼 아파할 뿐.

“왜 안 죽는 거야!”

“이곳은 영혼과 물질의 중간에 있는 세계다. 신체적인 데미지를 아무리 받아도 죽지 않지.”

“···안 죽으면 막 해도 되는 거 아니야?”

“팔이 부러지고, 다리가 뜯어지고, 몸이 코끼리에 밟혀서 조각조각이 나도 죽지 않는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꼴을 당한다면 말랑튜브에 박제되겠지.”

“그리고 영상은 수억 번 재생될 테고.”

“죽지도 못하고 끊임없는 죽음을 반복하는 꼴이 되겠지.”

“······.”

하이라이트 매드무비에서 죽는 역할을 하는 플레이어가 수십억 번은 넘게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곳에 한 명도 없었다.

안 죽으니까 막 해도 된다는 말. 취소다.

절대 다쳐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는 네 명이었다.

그 와중 바닥을 굴러다니던 풀창고가 정신을 차렸다.

“형. 이거 통각 센서 최대값 얼마로 돼 있어? 너무 아픈데?”

“적당한 수준으로 켜져 있으니 걱정 말도록.”

풀창고는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면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건 지금 통각 센서에 문제가 있는게 확실했다.

“엄살부리지 마요 형.”

“진짜 아프다니까! 레고 밟은 것 같은 고통이라고! 천마 형! 설정 좀 만져줘!”

“엄살하고는. 설정에는 아무 문제 없다.”

“한번 확인이라도 해 줄 수 있잖아!”

징징거리는 게 짜증난 단천은 바로 설정창을 켰다.

“설정.”

[통각 센서 : 30%(최대치입니다)]

“아무 문제도 없다.”

“3% 맞아? 절대 아닌 것 같은데?”

“삼. ···퍼센트다.”

> 통각 센서 30프로로 하고 있었음??

> 미쳤다 진짜 ㅋㅋㅋㅋㅋ

> 30프로면 아플만한데

> 근데 BJ천마는 애초에 다칠 일이 없는데 통각 센서 별로 안 중요한 거 아님?

> 그러게 ㅋㅋㅋㅋㅋ

> 다치는 사람에게나 의미있는 설정이긴 하지

채팅창을 봤다면 풀창고가 기함을 하며 당장 게임종료 버튼을 눌렀을 테지만. 일행 중 그 누구도 채팅창을 볼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눈앞에서 집채만한 해골 멧돼지가 달려들고 있는 상태에서 채팅창을 볼 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이 이상한 거다.

‘운이 좋군.’

고통 센서가 적당히 작으면 수련에 방해가 된다. 결국 수련이라는 것은 현장감이 높으면 높을수록 좋은 법이다.

고작 3%의 고통이라면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허술함은 바로 무공 수련의 방해가 된다.

“가능하다면 100%로 끌어올리고 싶은데. 아쉽군.”

> 100% 통각점 상태에서 죽지도 못하는 곳에 사람들을 던져놓겠다고요?

“바로 그렇다.”

> 악마세요??

> 악마도 기겁할 만한 발상

[현직악마 님이 90,000원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현직 악마입니다. 저희는 저런 끔찍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만···.]

> 현직 악마도 거르는 악랄함 ㄷㄷㄷ

“끄아악!”

“피해! 구석으로!”

퍼어엉!

***

“허억. 허억. 허억.”

“해, 해냈다.”

“살았다! 나는 살아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던가. 처음에는 도망치기에 바빴던 천마신교 교도들은 플레이시간 1시간여만에 네 마리의 인피니티 보어를 처리하는 데 성공했다.

고통을 더 이상 당하지 않기 위해서 발휘한 어마어마한 집중력이 만들어낸 성과였다.

“역시. 가르치는 자가 능력이 있으니 빨리 배우는군.”

“무슨 인정이야! 우리가 잘 한 거라고!”

“우우! 쓰레기!”

> 대체 뭘 가르쳤는데 ㅋㅋㅋㅋㅋ

> ㄹㅇ 이번건 저 네 명이 잘한거지 가르쳐준 건 아무것도 없잖아 ㅋㅋㅋㅋ

채팅창과 아래쪽, 양 쪽에서 동시에 난리가 났다.

“에펠탑을 지을 때에도 모든 프랑스의 언론, 정치인, 시민들이 반대했었지.”

하지만 결과물은 어떠한가. 에펠탑은 파리를 넘어 프랑스 전체를 상징하는 구조물이 되지 않았던가.

중요한 것은 정말로 잘 아는 한 사람의 판단이지, 알못들의 판단이 아닌 것이다.

단천은 알못들의 아우성을 무시한 채 몸을 움직이는 네 명을 바라봤다.

“와. 그래도 이게 하니까 느네.”

“이 신성력이라는 거, 쓸 때마다 느끼는데. 꽤 익숙하지 않아?”

“그러게.”

> 신성력 시스템이 진짜 잘 만들어진 게임이긴 함

> 이 시스템 비슷한 게임도 꽤 많이 나오는 추세던데?

> ㅇㅇ 이번에 런칭하는 AAA게임 3개정도가 몸에 전류 흘려주는 시스템임

‘다키스트 에이지의 경우에는 내공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어진 게임이지.’

이 내공 ‘매커니즘’자체는 다키스트 에이지 뿐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한 상태였다.

다키스트 에이지를 하면 할수록 실제 내공을 사용하는 방식에 익숙해지고, 무학을 조금 더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

내공의 흐름이라는 것은 결국 무학의 길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내공을 운용하는 것만으로도 알게 모르게 무학에 대해서 몸과 정신이 익숙해지는 결과가 생겨난다.

아마. 그렇게 익숙해진 자들은 이 전뇌세계에서 더욱더 빠르게 강해질 수 있겠지.

“잘 만들어졌단 말이지.”

이 길을 따라가면 착실하게 고수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

뒤에서 물러나서 보니 조금 더 확실해진다. 이 모든 것을 뒤에서 조종하는 자. 육도천의 목표는 이 세상에 무공의 고수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 그럼 다음 게임으로 가는 거죠?”

“누구 맘대로.”

“···?”

“이제 튜토리얼이 끝난 거다.”

맞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 메시지로 나왔었지. 이게 ‘튜토리얼’이라고.

그러니까 저 멀리에서 번쩍거리는 게 조명이 아니라, 몬스터 눈알이었구나.

“이 심연의 지옥은 몬스터를 처리하면 바로 다음 몬스터와 싸울 수 있지. 실로 싸움만을 계속할 수 있는 천국이랄까.”

> 천?국?

> 대체 그딴 천국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데요??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싸울 수 있는 곳이 아니면 대체 어디가 천국이란 말이지?”

> 죽을 때까지 싸움하는 사람 구경하면서 팝콘 뜯을 수 있는 곳?

거긴 지옥이고. 단천은 천국과 지옥도 구별하지 못하는 21세기의 참담한 문화에 개탄을 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들 모여!”

“힘을 합치면 해낼 수 있어!”

천국에 대해 단천이 강연을 하려고 준비하는 사이. 파티원 네 명은 똘똘 뭉쳐서 바로 다음 싸움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합공이라는 거. 그리 좋지 않다. 합공은 애초에 약자들을 위한 무공. 천마신교의 교도라면 당연히 강자의 자리에 서는 게 합당한 법.

“이 심연의 지옥에서 가장 오래 버틴 자는. 상품을 주지.”

“필요 없어!”

“내분을 일으키려고 하지 마!”

“우리는 하나다! 이 악마!”

> 악마라니 말을

> 착하게 하네

> 입에 착한말 필터 있는듯

> 저 정도로 말 착하게 해야 스트리머 하는구나

네 명의 결속력은 대단해 보였다. 서로 등과 등을 맞대고 전의를 불태우는 모습은 실로 한 사람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가장 오래 버틴 자에게는. 하루 훈련을 쉴 수 있는 훈련 면제권을 주지.”

“···훈련 면제권?”

“자유 훈련권 말고? 훈련 면제권?”

“그래. 훈련 면제권. 그리고 자유 훈련권도 3장을 주지.”

“···소, 소용없어! 천마 형이 아무리 그렇게 충동질을 해도 우리의 결속은 무적···!”

퍼억!

제로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앞으로 튕겨져나왔다. 정유채, 토끼가면, 풀창고가 힘을 모아 제로콜을 바깥으로 튕겨낸 것이다.

“······.”

순식간에 배신당한 제로콜이 어미사자에게 절벽에서 밀려 떨어진 새끼사자의 눈을 해 보였지만. 세 명의 반응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생존의 문제 앞에서, 인간은 끝없이 비겁해질 수 있는 생물인 것이다.

제로콜은 먼 하늘을 바라봤다.

‘다시는. 인간을 믿지 않아야지.’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교훈을 얻은 제로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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