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돌아보기 (2)
[리드미컬 세이버를 실행합니다.]
리드미컬 세이버는 추억의 게임의 목록에 들어가는 게임이다. 과거에 PC에 존재했던 지뢰찾기와 같은 느낌의 게임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만큼 여러 게임들을 시작하는 시작점으로는 안성맞춤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리드미컬 세이버야?”
“몸풀기 게임으로 지난번에 했던 것 같은데.”
“리드미컬 세이버면 뭐 그냥 쉬엄쉬엄 할 수 있겠지?”
애초에 현재의 천마신교도들은 죄다 최상급 반응속도에 다다른 실력자가 되어있는 상태다.
VR게임 안에서만 따지자면 일류고수를 넘어서 초절정 고수와 비슷한 정도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 과거의 게임인 리드미컬 세이버 정도야 쉬엄쉬엄 할 수 있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정 부분 사실이다. 아마 ‘평범한’ 리드미컬 세이버 난이도였다면 실제로 이들은 어렵잖게 클리어할 수 있을 터니까.
> 리드미컬 세이버?
> 이 겜 별로 안 어렵잖아 ㅡㅡ
> 뭐 몸풀기 게임으로 이 정도면 좋지 않냐?
얼마 전부터 BJ천마의 방송을 보기 시작한 시청자들, 특히 종말 생존자로 유입된 시청자들의 반응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천마신교 예비단원 뱃지를 달고 있는 고인물 시청자들의 반응은 정 반대였다.
> 리드미컬 세이버면 사람 죽는 소리 나겠네 ㅋㅋㅋㅋ
> 네 명 중 클리어 몇 명 할 것 같냐?
> 내 생각엔 4명중에 3명
> 3명이나 통과할 것 같다고?
> 아니. 3명이 겜 하다가 울 것 같음
리드미컬 세이버라고 하면 BJ천마가 종종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플레이하는 몸풀기 게임이다.
어쩌면 고작 ‘몸풀기 게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몸풀기 게임’이 아니라 ‘BJ천마가 하는’ 이 중요한 것이다.
“에이. 리드미컬 세이버가 그래봐야 리드미컬 세이버죠.”
“우리 편집자가 만들어 준 난이도 플레이를
해 볼까 하는데.”
“뭐, 그것들도 그렇게까지 어려워보이지는 않던데?”
풀창고가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고 말을 내뱉었다.
“그러면 간단하게 내기 하나 할까.”
“내기?”
“여기서 플레이하는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나오면···.”
“나오면?”
“훈련을 평생 면제해주지.”
‘훈련 평생 면제’. 라는 말에 네 명의 눈이 돌아갔다.
“방금 한 말 진짜야?”
“진짜 면제라고?”
“물론 원할 때에 요청하면 훈련에 참가할 수 있는 권리도 포함이다.”
““필요없어 그딴 권리.””
제로콜과 풀창고가 동시에 대답했다.
> 단호함 실화냐
> 죽어도 BJ천마 훈련같은 건 안 한다는 마인드
> 솔직히 천마님이랑 운동하면서 건강해진 건 사실 아니냐?
> ㅇㅈ 근데 지들만 싫어함
“시청자 여러분들이 한 번 경험을 해 봐야 합니다.”
“솔직히 건강해져서 얻은 수명보다 훈련하면서 생사의 기로를 오가면서 줄어든 수명이 더 많을 거라고요.”
“근거 없는 비방은 밴 사유다.”
밴(ban)이 단순히 방에서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물리적으로 지워질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제로콜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BJ천마의 입에서 훈련을 면제해 준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BJ천마는 이러나저러나 자신이 뱉은 말은 지키는 인간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클리어는 한다.’
굳이 리드미컬 세이버를 퍼펙트로 깰 필요는 없다. 다행인 것은 리드미컬 세이버의 판정은 꽤나 후한 편이라는 것.
웬만치 어려운 난이도라도 클리어 자체를 못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먼저 할 사람 있나?”
누구도 선뜻 나서지는 않았다. 난이도가 어떤지는 몰라도 걸려 있는 상품이 어마어마하다. 그러니 최대한 늦게 하는 게 이득인 상태.
“먼저 하면 라이프 포인트 10개를 추가해 주도록 하지.”
“제가 하겠습니다!”
“1등은 내 거야!”
“비켜! 비키라고!”
라이프 포인트 10개에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우정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아웅다웅하는 싸움의 최초 승자는 제로콜이었다. 딱히 무력이 강해서 그런 건 아니였고 뽑기에 승리한 덕분에 얻어낸 성과였다.
제로콜의 얼굴은 엄청나게 밝아져 있었다. 그야 안 그래도 그리 어렵지 않은 난이도에 라이프 포인트가 10개 추가되기까지 했다.
그러니 못 깰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좋아! 이제 이 더럽고 아니꼽고 거지같고 사람 죽일듯이 굴리는 훈련에서 영원히 아웃이다!”
“···네가 본좌의 훈련을 평소에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겠군.”
“천마 형이 그렇게 말해봤자야! 나는 앞으로는 영영 형의 훈련을 빙자한 고문을 받지 않을 테니까! 오늘이 바로 노예 해방의 날이다! 끼요오오!”
“확인.”
> 지금 저래도 되냐 ㅋㅋㅋㅋ
> 아니 근데 라이프포인트 10개 추가해줬는데ㅋㅋㅋ깨겠지 ㅋㅋㅋㅋ
> ㅋㅋ 보기나 해라 ㅋㅋㅋㅋ
“아. 무기는 총으로 해도 되지? 검보다는 총이 익숙해서.”
“검을 쓰지 않는다면 후회할 텐데.”
“거야 천마 형이나 검을 그렇게 좋아하는 거고. 나야 FPS의 고인물이니까. 남자는 뭐니뭐니해도 총이잖아.”
단천은 이 자리에서 제로콜의 목을 치지 않기 위해서 꽤나 노력을 해야만 했다.
“······꼭 클리어하도록.”
“안 그래도 그럴 거야!”
─ 이 곡. 진짜 잘 만든 것 같아요.
이 곡은 서유나가 얼마 전에 만든 곡이었다.
무제無題. 아직까지는 이름이 붙지 않은 곡이었지만.
이름은 크게 문제될 게 없었다.
“플레이 스타트.”
[곡- 제목 없음의 플레이가 시작됩니다!]
띠링.
기계음이 끝나자 가야금 선율이 울려퍼졌다. 서유나의 곡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악기가 바로 가야금이다.
그리고.
푹!
[Hp -1]
시작하자마자 한 칸 줄어드는 제로콜의 라이프 포인트.
“한 대. 맞았군.”
“뭐, 뭐야!”
“방금 한 대 맞았다.”
“아니! 눈에 보이게는 해 줘야지!”
> 눈에 보이게 날아왔잖아
> 뭐해 ㅋㅋㅋㅋㅋ
> 본인이 집중안하고 남탓하는 스트리머가 있다?
“뭐라고요?”
“방금 니 얼굴쪽으로 날아왔잖아.”
“그러게. 뻔히 보이는데 못 피해 놓고.”
여기저기서 나오는 말에 제로콜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하지만 반박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음률이 빨라지면서 본격적으로 노트들이 날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와.”
“저게 뭐야.”
“예쁘다.”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많은 노트들이 제로콜을 향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단순히 ‘쏟아져 내리는’것뿐만이 아니었다. 제각각의 노트들이 모여서 하나의 군집을 이루고, 이 군집체들이 연이어 날아오고 부서지고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는 광경은.
실로 유성우가 떨어지는 것만큼의 시각적 황홀경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 미쳤다 ㅋㅋㅋㅋㅋㅋ
> 이게···게임···?
> 구닥다리 게임에서 이렇게까지 퀄리티가 나온다고???
> 와 근데 제로콜도 잘 막네 ㅋㅋㅋㅋ
콰과과과과! 한없이 쏟어져내리는 절경은 옆에서 보는 사람의 입장일 뿐. 제로콜 입장에서는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제로콜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눈 앞의 날아오는 노트들을 그져 계속해서 쳐내는 것 뿐!
“저렇게 암기들을 쳐내면 안 된다. 암기를 부술 때에는 언제나 날아오는 방향의 직각 방향으로 쳐 내야 하지.”
“···그, 그래요?”
“그렇다. 실전에선 저렇게 꼼수를 쳐서 쳐냈다간 이미 쪼개진 암기들이 몸에 날아와서 이미 고슴도치가 돼 버렸을 거다.”
도대체 실전이 뭔데! 이게 실전이 아니면 대체 뭐가 실전이란 말인가!
환장할 것 같은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제로콜은 자신의 동체시력과 에임을 통해서 날아오는 노트들을 거의 다 쳐내는 데 성공했다.
“근데 오늘 컨디션 엄청 좋아보이는데?”
“그러게. 저 정도로 노트들이 쏟아지는데도 흘린 노트가 하나밖에 없어.”
“아마 살기 위한 본능이겠지.”
> 살기 위한 본능?
“천마 사부를 봐.”
토끼가면이 BJ천마를 가리켰다.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제로콜을 바라보고 있는 단천의 눈에는 그득한 살기가 끼어 있었다.
‘이 스테이지 클리어 못하면. 진짜 저 인간한테 죽는다.’
난생 처음 게임하면서 느껴보는 생명의 위협을 제로콜은 느끼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최대한도까지 도발을 했는데. 클리어에 실패한다?
그리고 훈련에 끌려간다?
그 뒤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은 생명의 위협에서 자신의 실력보다 아득히 높은 차원의 성취를 해 내게 되는 법.
“눈물겹네.”
“그러게 도발은 왜 해서.”
“그러게.”
비슷한 도발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던 세 사람은 동시에 비슷한 생각을 했다.
자신이 처음이 아니라서 정말로, 정말로 다행이라고.
“후. 그, 그래도. 잘 막은 것 같은데?”
노트들이 별처럼 쏟아지는 순간이 지나가고. 짧은 휴지기가 찾아오자 제로콜은 입을 열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실력발휘를 지금 하고 있었으니까.
이런 추세라면 저 악마의 손에서 영원히 탈출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후. 어때. 천마 형. 노예 한 명이 사라지는 걸 실시간으로 보는 느낌은?”
> ? 와 이 시점에도 도발을 하네 ㅋㅋㅋㅋ
> ㄹㅇ 참스트리머 ㅋㅋㅋㅋㅋㅋ
“참스트리머가 아니라 정신이 나간 거지.”
“그러게. 이미 쏟아진 물. 한계까지 다 쏟아버리자. 뭐 대충 그런 거겠지.”
“노래는 얼마나 남았지?”
“이제 거의 끝인 것 같은데?”
“와. 진짜 클리어하는 거 아냐?”
노래의 대부분이 끝나고 마지막 하이라이트 부분만 남은 상태. 제로콜의 체력은 아직도 1만 줄어들어 있는 상태다.
조금 맞더라도 클리어는 충분히 노려볼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단천의 표정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못 깨. 그 정도 실력으로는.”
단천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듣기만 해도 몸이 전율할 것 같은 가야금의 속주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눈부시게 쏟아져내리는 한 뭉치의 노트들.
“뭐야? 노트 별로 없는데?”
> 이 정도면 쌉가능 아니냐?
> ㅇㅈ;
> 에이 클리어 각이네
> 좀 맞는다치고 떨어트리면 클리어네
노트들의 갯수는 적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무리武理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촤라라라락!
쏟아져내리는 노트들을 제로콜이 쳐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Hp -1]
[Hp -1]
[Hp -1]
“뭐, 뭐야?!”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노트들을 쳐 내던 제로콜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다 쳐냈잖아!”
> 뭘 다 쳐내
> 다 맞고 있잖아 ㅋㅋㅋㅋ
제로콜의 당황한 음성과 달리 수없이 많은 노트들이 제로콜의 몸을 계속해서 두들겨나갔다.
콰드드드득!
“으아아아아!”
당황한 제로콜의 몸을 두들기는 수백 개의 노트들.
“으, 으아, 으아아악!”
“이 곡의 이름을 말해줄 때가 슬슬 된 것 같군.”
서유나는 무제라고 말했지만, 이 무공에 담겨 있는 무학에는 엄연히 이름이 존재한다. 암기술을 한낱 잡기라고 무시하는 그 어떤 무림인도 무시하지 못하는 지고의 무학.
안다고 해도 막아내는 것이 불가능한 하늘을 뒤덮는 꽃비.
“이 곡의 이름은. 만천화우滿天花雨다.”
하늘을 뒤덮는 꽃의 비가 제로콜의 몸에 떨어져내렸다.
[체력이 모두 소모되었습니다.]
[GAME O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