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돌아보기 (1)
“흐으음.”
“즐거워 보이시네요.”
“나쁘지 않다.”
얼마 전에 말을 튼 서유나의 질문에 단천은 가볍게 대답했다. 단천이 달고 사는 사슴과 인삼이 그려져있는 플라스틱 약포 안에 있는 액체가 오늘따라 더더욱 검어 보였다.
“···오늘따라 약이 좀 더 까매 보이는 것 같은데요.”
“그거야 어렵사리 구한 독물들을 집어넣었으니까.”
“독물이요? 그럼 몸에 안 좋은거 아닌가요?”
“서로 상충할 수 있는 자재들을 사용하면 독의 효과는 사라진 채 더욱 좋은 효과를 받을 수 있지. 이런 좋은 물건을 금지하다니. 한국의 법이란.”
쯧쯧. 하고 한숨을 쉬는 단천을 바라보며 서유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먹고 죽는 것도 아니고. 단천이 몸에 좋다는 걸 시간이 머다하고 먹어대는 것도 특이할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말로는 식약처의 허가와는 동떨어진 것 같은 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나름대로 식약처의 허가가 떨어진 물건만을 챙겨먹는 것일 터다. 정말로 독이 들어 있다면 저렇게 쫍쫍거리며 먹다가 병원에 실려갔겠지.
그러니 아마도 식약처에게 허가를 받은 물건일 거다. 보라. 저 멀쩡하게 약을 마시는 모습을.
쪼옵쪼옵!
치이이익!
“앗. 아깝게 한 방울이 튀었군.”
···서유나는 그냥 생각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보다. 다음 게임은 어떤 걸 하실 거에요? 오랜만에 개인방송 복귀인데.”
기부행사가 끝난 지금 시점. BJ천마의 현재 이미지는 최고조를 달리고 있었다.
초대형 기업의 표절논란을 정면으로 맞선 열사!
기부행사에 걸맞는 게임 플레이!
지금까지의 최고액 기부금액의 몇 배를 갈아치운 스트리머!
BJ천마의 플레이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임팩트를 가지고 있었지만, 단순히 게임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시청자들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컨텐츠. 그리고 이미지다.
이런 점에서 비추어볼때 BJ천마의 방송은 최고가를 내달리고 있었다.
“게임사들에서 광고 컨택 온 것만 1000건이 넘어요. 다들 리베이트 금액을 엄청 제시했고요.”
서유나가 화면을 켜 보여줬다. 1000건이라고 했던 게임 광고 요청은 어느새 1500건으로 불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게 좋지?”
“음··· 저는 천마님의 방송의 애청자잖아요.”
“그렇지.”
애초에 서유나는 단천의 방송의 가장 커다란 팬 중 한 명이었다. 보통 좋아하는 일이 일이 되면 싫어지는 경우도 많지만, 서유나는 그 반대였다.
어마어마한 수준의 일을 혼자서 해내고 있는 것이 바로 서유나였으니까.
그 업무량은 지금 옆에서 다크서클이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는 강한솔과 김진표보다도 많을 지경.
즉, 서유나보다 BJ천마의 방송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했다.
“따지자면 장자방이라고 할 수 있겠지.”
“감사합니다.”
“그래서. 장자방의 의견은?”
“애청자의 생각으로는··· 천마님은 그냥 자기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결국 ‘광고’라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건 광고주의 영향력의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다. 작은 광고라면 그래도 괜찮은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스트리머의 자율성을 많이 보장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소규모 광고다.
하지만 금액이 많이 걸려 있는 광고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마어마한 금액을 광고료로 지급하는 만큼 광고주들의 요청도 그만큼 많아진다.
포즈는 이렇게 해 주세요.
캐릭터는 이걸 골라 주세요.
광고 어필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세요.
이런 수없이 많은 요청들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요청들은 그대로 방송의 제약이 된다.
“···그러니 인게임 광고들은 괜찮지만. ‘게임’을 광고로 받는 것은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BJ천마가 가지고 있는 모습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자유로움이다. 원하지도 않는 게임을 광고라는 이유로 하는 것은 방송의 테마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물론 광고를 하면 돈을 엄청 벌 수 있기는 하지만···.”
“거기까지. 모두 이해했다.”
광고금액을 바라보던 단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광고금으로 들어오는 금액은 눈이 아득해지는 금액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금액들을 포기하는 것을 권한다는 것은.
“천하를 발 아래에 둘 자신이 있다는 거지.”
“···그럴 생각 아니셨어요?”
그야 그럴 생각이긴 했다. 눈 앞의 장자방은 마음에 든다. 천하통일 같은 거 너무 오래 걸리니까 천천히 하자고 했던 서윤학보다도 훨씬 더.
“그러면 하고 싶은 걸 하시면 되겠네요. 하고 싶은 게임 컨텐츠 있으세요?”
단천은 짧게 고민했다. 하고싶은 ‘컨텐츠’는 존재한다. 이태흠에게 던져준 칩 안을 보는 것.
하지만 이것을 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가?
‘게임이라고 해도 별 상관없겠지.’
“있다. 하고 싶은 게임.”
“어떤 게임인가요?”
“어떤 형식인지는 안 정해졌다.”
“게임사는요?”
“없다.”
“게임 이름이 뭔가요?”
“아직 안 정해졌다.”
“···농담하는 거 아니죠?”
곧이곧대로 말을 해 줬는데도 농담 취급이라니. 장자방이라고 했던 거. 취소다.
“대충 일주일쯤 후에 게임을 할 수 있을 거다.”
“일주일이요? 그러면 그 사이에 시간이 너무 많이 비는데. 당장 오늘 할 게임도 못 정했는데.”
단천은 대답 대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주일간을 할 컨텐츠정도야 얼마든지 있는 까닭이다.
***
[BJ천마 on air]
> 천하
> 천마 하이
> 천마를 보려고 한국에 왔습니다! 그의 방송을 끊김없이 볼 수 있습니다!
> ㅊㅎㅊㅎㅊㅎ
> 天魔의 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방송을 시작하자마자 실로 어마어마한 양의 채팅이 몰려들었다. 최신식의 캡슐을 사용하고 있는 단천인데도 일시적으로 채팅만으로 렉이 걸릴 정도였다.
[시청자 수 : 1백만 명]
[시청자 수가 매우 많습니다! 시청자 수가 부정확할 수 있습니다.]
“···백만이라.”
단천은 방송을 시작하며 백만이나 되는 시청자들이 들어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트인낭의 연말 기부 이벤트는 트인낭 공식 계정으로 이뤄지는 탓에 BJ천마의 방송을 찾아오기 위해서는 검색과 즐겨찾기를 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토록 많은 시청자가 순식간에 메워졌다.
> 지금 인화사 ㅈ됐더라 ㅋㅋㅋㅋㅋ
> 베끼는 거 당한 기업들 모여서 줄소송 박아넣고 있는 중 ㅋㅋㅋㅋㅋ
> 중국 당국에서도 버린 것 같던데?
> 그와중 하인라인 주가 장대상승중ㅋㅋㅋㅋ
> 상승 안하게 생겼냐 이미지 제대로 챙겨먹었는데
> 직원들은 살판났을듯
> 친구가 직원인데 하루종일 일하고 있더라··· 죽기 일보직전임
채팅창에서 인화에 대한 즐거운 소식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오래 지속되어서는 좋을 것이 없다. 본디 방송이라는 것은 즐겁기 위한 것이지 남을 헐뜯고 남이 망한 것을 구경하는 것이 메인 컨텐츠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상황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무슨 게임을 할 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군.”
> 광고겜은 아니지?
> 광고겜이지 않을까
> 후원 광고들 줄 서는거 못 봤냐 ㅋㅋㅋ 100% 광고겜임
“오늘은 오랜만에 합방을 하면서. 예전 게임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볼까 한다.”
[「풀창고」가 방송에 참가했습니다.]
[「제로콜」이 방송에 참가했습니다.]
[「정유채」가 방송에 참가했습니다.]
[「토끼가면」이 방송에 참가했습니다.]
> 오
> 하긴 합방 오래 안하기는 했지
> 와 예전 겜을 다시 한다고??
> 거야 새로 온 시청자들도 많으니까
> 승리의 다에단은 개추 ㅋㅋㅋㅋ
> 다뒤졌다 오늘 밤새서 방송본다 ㅋㅋㅋㅋ
단천이 선택한 것은 ‘합방’과 ‘예전 게임 돌아보기’라는 선택지였다.
새로운 게임을 하는 것도 나름대로의 맛이 있지만. 때때로 과거의 게임들을 돌아보는 것도 방송에 있어서는 좋다.
기존 시청자들에게는 팬 서비스가 되고, 새 시청자들에게는 원래 시청자와의 공감대 형성이 되니까.
“반갑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풀창고입니다!”
“와. 시청자 진짜 실화냐.”
“백만? 시청자수 백만 맞아?”
“후···. 겨우 백만 명의 시청자로 쫄아붙다니. 그릇의 차이라는 건가.”
이제는 그래도 BJ천마의 시청자수에 놀라는 것에 익숙해진 천마신교 일원들이었다.
수많은 시청자수에 얼어붙어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BJ천마의 방송 자체의 규모가 커지면서 천마신교의 다른 방송들도 꽤나 커다란 방송이 되어가는 중.
물론 백만명이라는 수가 어마어마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형 스트리머들이 된 입장에서 시청자수가 백만이 됐다고 해서 얼어붙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백만 명··· 나는 백 명도 안 되는데.”
“토끼가면 방송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 아니 방송이 완전 랜덤인데 방송이 어케 크냐고 ㅋㅋㅋ
“대회 일정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 또 월클인척한다 ㅋㅋㅋㅋㅋㅋ
토끼가면의 눈에 살기가 생겨났다. 방금 채팅을 친 사람이 있었다면 VR챗 캐릭터의 손에 쥐여진 글록으로 쏘아도 이상하지 않을 살기다.
토끼가면이야 아직 시청자수가 적은 하꼬 방송이긴 하지만 한수아야 원래 수억 명이 보는 올림픽도 나가는 선수이니 새가슴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잘 왔다.”
“오늘 컨텐츠는 뭐에요?”
“이전 게임들 돌아보기.”
“오. 오늘은 꽤 할만해 보이는데?”
풀창고가 밝게 대답했다. 언제나 BJ천마가 합방을 요청하는 날이면 그만한 ‘고통스러운 일정’이 뒤이어서 왔기 때문이다.
레일 서바이버 특훈을 할 때도 그랬고, 천공을 할 때도 그랬고.
물론 그만큼의 시청자 유입과 후원이 뒤따라 오긴 했지만···.
‘그래도 그런 게 없는 게 낫지.’
후원이고 돈이고 시청자고. 인간이 살아남아야만 하는 것 아니겠는가. VR게임이라는 것을 아득히 넘어갈 정도로 사람을 굴리는 BJ천마의 방송이라 걱정했는데.
“에이. 아무리 그래도 이전에 했던 게임들 하는데. 그렇게까지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겠어?”
“그렇지.”
“그리고 레일 서바이버 같은 경우엔 나도 고인물이라고. 이제 천마 형이랑 붙어도 안 질 걸?”
고오오오!
“···다시 생각해보니까 질 것 같다.”
BJ천마의 패기에 순식간에 말을 바꾼 제로콜이었다.
> 태세변환 우디르네
> 천마는 사람을 찢어
> 누울 자리를 봐 가면서 누워야지 ㅋㅋㅋㅋ
> 그래도 광선검만 없으면 해 볼만하지 않냐?
> 광선검이 있든 없든 천마는 사람을 찢어
아무튼 시청자나, 천마신교 교도들이나. 전반적인 여론은 ‘이전 게임을 하는 만큼 하하호호 웃으면서 즐겁게 할 수 있는 방송’이 될 거라는 여론이 극히 우세인 상황이었다.
그렇게 하하호호 모두 웃고 있는 와중에. 제로콜은 무언가 등 뒤가 찌릿한 느낌을 받았다.
‘···불길한데.’
가장 BJ천마에게 많이 굴려진 것이 바로 제로콜이다. 이미 다 해 본 게임들. 그리고 클리어한 게임들에 다시 들어가본다는 상황이니. 힘들 수가 없는 상황인데.
‘왜 이렇게 불길한거야.’
불길함의 원천은 물론 저기에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BJ천마’라는 악마였다.
‘그냥. 지금이라도 배 아프다고 하고 튈까?’
제로콜은 잠시간 고민했다. 하지만 스트리머로서 100만명의 시청자를 앞에 두고 방송을 내팽개친다는 것은 제로콜의 이성이 허락하지 않았다.
‘뭐. 별 일 없겠지.’
제로콜이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가볍게 날려먹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