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큰 거 한 발 (7)
“이제 돌아가봐도 되나?”
“아직은 아니다.”
“바빠 죽겠는데. 왜?”
“올 사람이 있다.”
“올 사람 누구?”
“그건 아직은 모르겠다.”
이태흠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이태흠이 보기에는 이곳에서의 일이 거의 마무리된 것으로 보일 테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머리를 지릿할 정도로 울리는 위협을 예고하고 있는 상단전.
게임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보여온 무공의 흔적들은 자신 말고도 중원에서 온 누군가가 이 세계에 있다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중원에서 온 자라면 중국에서 뿌리를 틀어먹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중국에 와 보길 잘했군.’
곧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놈들이 찾아올 것이다. 놈들에게서 정보를 얻고 나면. ‘육도천’이란 놈들이 무얼 하는 놈인지에 대해서 더 알게 될 터였다.
“저 골목으로 들어가지.”
“왜 계속 으슥한 골목으로 가려는 거지?”
“만나야 할 사람이 이곳에 있어서.”
노골적으로 풍겨져오는 살기에 단천은 비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선택지 두 가지가 있다.”
“선택지?”
“바닥이 좋나. 아니면 벽이 좋나?”
“바닥이랑 벽?”
“대답이나 하도록.”
“굳이 따지자면 바닥이 좋지. 온돌이 돌면 따뜻해지잖아.”
“알았다.”
“근데 그게 무슨 생뚱맞은 소···.”
이태흠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단천이 혼혈을 짚은 탓이다. 혼혈을 짚자마자 이태흠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축 늘어졌다.
굳이 하자면 다른 곳에 이태흠을 두고 혼자만 빠져나오는 방식도 있었지만. 이태흠이 납치라도 되면 상황이 귀찮아진다.
그러니 데려온 다음 정신을 잃게 만드는 것이 최선이다.
단천은 정신을 잃은 이태흠의 몸을 이태흠이 바라는 대로 바닥에 방치한 다음 입을 열었다.
“나오도록.”
단천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골목 위의 건물에서 아래로 두 개의 신형이 단천을 향해 떨어져내렸다.
떨어져내리는 두 명이 들고 있는 한 자루의 검과 도. 단천은 내기를 끌어올렸다.
고오오!
단천의 양 손에서 아지랑이같은 기운이 피어났다. 단천은 양 손을 검과 도를 향해 뻗어냈다.
카아앙!
손과 병장기가 맞부딪히는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소리가 골목을 울려퍼졌다.
그리고.
쩌저적! 카아앙!
손과 맞부딪힌 검과 도에 균열이 일어났다.
“역시 검강이야. 성능 확실하구만.”
단천의 내력의 양은 숱한 방송과 수련을 통해 진일보해있었다. 본래라면 막대한 양의 내공을 써야만 발현할 수 있는 검강조차 자유롭게 쓸 수 있을 정도의 능력에 도달한 것이다.
‘대충 중원에서의 경지의 1할 정도는 회복했나.’
물론 신체적인 능력으로는 1할은커녕 1푼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상단전이 주는 능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신체도 내공도 중원에서에 비하면 미진한데도 이 정도의 능력이라니. 상단전을 갈고닦으면 신선이나 부처가 된다는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단천은 여유롭게 목을 좌우로 꺾으며 입을 열었다.
“자. 입을 열고 싶은 놈 있나?”
“···강하군.”
“중원에서 본좌더러 ‘강하다’는 말만으로 수식을 끝냈다면 경을 쳤을 텐데.”
부러진 병장기를 바라보던 두 남자는 대답 대신 검을 다시금 단천에게 겨눴다.
문답무용이라는 뜻.
단천또한 허리에 차고 있던 허리띠를 꺼내들었다.
촤악!
허리띠를 한 번 휘두르자 순식간에 허리띠가 검劍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공방에서 얼마 전에 받아낸 ‘다른 나라에 여행할 때 귀찮은 일이 안 생기는, 충분히 강하며 충분히 길고 휴대하기 편하고 멋까지 있는 검’ 이었다.
줄여서 천마검을 뽑아든 단천은 검에 내력을 집어넣었다.
검에서 피어오르는 강기.
“강기 쓸 줄 아나?”
“······.”
대답은 없었다. 쓸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단천은 두 명이 쥐고 있는 검을 바라봤다. 검에서 피어오르는 흐릿한 기운.
“고작 검기인가. 좋다.”
단천의 검에서 피어오르던 찬연한 색채가 잦아들었다. 검강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검을 두 명이 당혹스럽다는 듯이 바라봤다.
“원래라면 이런 패널티를 안고 싸우는 게 싫지만. 무인과 현실에서 싸우는 것이 꽤 오랜만이거든.”
“······.”
“그래서 조금 즐기고 싶다.”
“오만하군. 역시 천마라는 건가.”
“천마라서 오만한 것이 아니다. 본좌가 친대천마. 단천이라 오만한 것이니라.”
단천의 입꼬리가 하늘로 치켜올라갔다.
쉬익!
검과 도가 단천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무기를 피해내는 단천의 눈이 반짝였다.
‘재미있군.’
패도적이어야 할 도가 천변만화의 변화를 담고 있고, 변화를 중심으로 해야 할 검이 우직한 패도를 담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깨달음의 경지가 높다. 그것도 상당히.’
단천이 느끼기에 검과 도를 휘두르고 있는 두 명이 가지고 있는 ‘깨달음’의 수준은 최소한 탈마脫魔. 혹은 탈각의 경지에 이른 자들의 것이다.
최소로 따져도 화경 말미, 혹은 현경에 든 자들이나 깨달았을 법한 고강한 움직임이다.
“그런데. 몸은 버러지같이 움직이니. 이상하단 말이지.”
카가가강!
단천의 검이 검기가 둘러져 있는 도와 검을 튕겨냈다. 검기가 흐르지 않는 부분들을 골라 쳐낸 것이다.
“그 정도 경지가 머릿속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검강조차 쓰지 못하고.”
“······.”
“뭐. 족치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둘은 대답하는 대신 단천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수백 자루로 불어나는 것 같은 환각을 자아내는 도격. 그리고 태산이라도 쪼갤 듯이 날아드는 검격.
실로 고강한 깨달음이 깃들어 있는 합공이었지만.
“상대가 나빴다.”
단천의 천마검이 휘둘러졌다. 한 번의 휘두름이었지만 검이 수천 자루로 불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환격.
거기에 더해지는 압도적인 패도적인 검의 움직임.
양 쪽의 공격의 장점만을 취해 터져나온 한 수에. 두 명이 펼친 무공이 삼켜져 버렸다.
쩌저저저적!
금이 갔던 검과 도가 순식간에 부서져내렸다.
푸화아악!
그리고. 두 명의 몸에서 피분수가 터져나왔다.
“크허어억.”
“허억.”
두 명의 입에서 그제서야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나왔다.
“너희는 바닥이 좋나. 벽이 좋나?”
두 명의 눈이 길바닥에 뺨을 대고 있는 이태흠의 모습을 바라보다 떨어졌다.
“벽···이 좋다.”
“나 또한.”
요구하는 것 많은 놈들이로군. 단천은 두 명의 몸을 차 벽에 몸을 기댈 수 있게 세워올렸다.
“자. 이제 이야기를 좀 해 볼까?”
“······.”
물론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다. 방금 단천이 던진 질문은 자신 스스로의 머릿속에 하는 질문이었다.
패도적이기 그지없는 검과 천변만화하는 도. 사실 이러한 기괴한 무공이 중원천지에 꽤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공이 특이할수록 경지에 오르는 것은 갈수록 힘들어진다.
그러니. 두 명의 무공만으로도 놈들의 무공이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다.
“한 놈이 쓰는 무공은 패황검. 나머지 한 놈은 무한환영도.”
무공을 추측하는 것은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이 ‘무공’의 소유자들이 결코 가벼운 자들이 아니라는 데 있다.
“너희들. 뭔데 삼대三代와 오대五代의 무공을 쓰는 거지?”
패황검은 삼대천마 패도천마 맹경주의 독문절기. 그리고 무한환영도는 오대천마 멸겁천마 무형원의 절기다.
“두 무공 다 그 형태만 전해져올 뿐 그 안에 담겨 있는 무학은 소실된 지 오래일 텐데.”
놈들은 무공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온전히. 이전에도 이런 상황이 있기는 했었다. 백건의 경우가 그러했고, 뇌명검의 경우가 그랬다.
“하지만 백건은 자신의 의지가 확고한 상태였지. 너희들과는 다르게 말이야.”
굳이 따지자면 이전의 뇌명검을 사용하던 파일로드와 비슷한 상태다.
극도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던 파일로드와는 달리 놈들의 모습은 굉장히 안정되어 보인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
“뭐. 질문에 대답할 생각은 있나?”
“없다.”
“네 쪽은?”
“내 쪽도.”
쯧. 단천은 짧게 혀를 찼다. 그래도 상황이 최악은 아니다. 한 명보다는 두 명에게서 정보를 캐어내는 게 쉽다.
“거기에 적당한 약재들도 있지.”
단천이 지고 온 약재들의 대부분은 독물들이다.
정보를 빼어내기에 이만한 좋은 환경은 다시 없는 것이다.
***
“으음.”
정신을 차린 이태흠은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은 카페테리아의 한 의자 위였다.
“뭐야. 무슨 일이야!”
“네놈이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
“갑자기?”
“그래. 갑자기.”
이태흠이 눈살을 찌푸렸다. 근래 과로가 심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질 정도라니.
원래라면 자고 있었을 시간부터 단천에게 끌려나와서 중국까지 왔으니. 갑자기 쓰러져도 이상하지는 않다.
“본좌가 건강에 좋은 혈도를 꽤 많이 아는데.”
“···그런 건 필요없어. 한의학을 안 믿거든.”
한의학을 안 믿는다는 말에 BJ천마의 몸에서 실로 무시무시한 살기가 피어오른 것 같았지만. 착각일 터였다.
BJ천마가 무슨 한의사도 아니고, 한의학 안 믿는다는 말에 저렇게 살기를 뿜어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BJ천마가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벨트에 손을 가져다대는 것도 별 의미없는 행동일 터였다.
“그래. 아무튼 일어났으면 돌아갈 비행기를 예약하도록.”
“···예약 안 했나?”
“본좌가 왜 예약같은 일을 해야 하지?”
“······.”
이태흠은 BJ천마와 눈싸움을 하다가 얌전히 휴대폰을 들어올렸다. 어떻게 대기업 사장인 자신보다 더욱 오만하게 남에게 시키는 게 몸에 배여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무슨 황제나 황제 이상의 권력이라도 있었던 인간처럼 행동하지 않는가.
‘천마’라는 캐릭터가 애초에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존재이긴 하지만. 스트리밍에서의 모습이 그렇다고 실제 행동거지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 않나?
‘···그만두자.’
BJ천마가 오늘 벌어들여준 돈만 해도 실로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갑을을 따지자면 BJ천마는 사실상 자신의 슈퍼 갑인 셈인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도 못해줄 것은 없다.
이태흠이 휴대폰으로 비행기표 예매를 끝낸 것을 확인한 단천은 툭. 하고 무언가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건 뭐지?”
“본좌가 묻고 싶은 게 바로 그거다. 이게 뭐에 쓰는 물건인지.”
이태흠의 눈이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반도체 칩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생긴 걸로 봐서는 몸 안에 장착하는 물건 같은데.”
“그걸 보자마자 알 수 있나?”
“나를 뭘로 보는 거냐.”
“하긴. 비행기 표 예약도 가능하니. 이 정도쯤은 당연히 알 수 있겠지.”
자신을 무시하는 건지 인정하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단천을 노려보던 이태흠은 계속해서 물건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동력 공급을 해야하는 배터리가 없으니 몸 안에 장착하는 칩이라고 생각한 거다. 혈류의 맥동으로 동력 공급을 받으면 따로 배터리가 필요없으니까.”
“그렇군. 완전히 이해했다.”
전혀 못한 표정인데.
“그래. 아무튼 형태로 보건데 목이나 뇌 주변에 장착하는 물건 같다.”
“그 또한 정확하다.”
“···물건에 대해서 모르는 거 맞냐?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직접 뺐으니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 칩의 내용물이다. 확인할 수 있나?”
“못 해.”
이태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건의 상태로 보건데 꽤 값나가는 물건으로 보인다. 안에 있는 정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암호화가 되어있는 칩을 복호화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굳이 해야 한다면 알고 있는 해커들과 하인라인사의 인력을 동원하면 가능은 하겠지만.
인력을 합계시간으로 수천시간을 들여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수수료. 25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깎아 주지.”
“1주일. 1주일 안에 안에 들어있는 내용을 내어놓도록 하지.”
이태흠은 단천이 딴말을 할세라 얼른 칩을 품 안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