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큰 거 한 발 (5)
인화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단천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저, 누구십니까?”
어설픈 영어로 물음을 던지는 시큐리티에게 단천은 유창한 중국어로 대답했다.
“BJ천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인화의 CEO. 리 창퐁을 만나러 왔다.”
“죄송하지만 약속은 잡으셨습···.”
사혈을 제압하거나 아혈을 제압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중국의 관官을 모두 상대해야 할 터.
언젠가는 싸우더라도 지금은 조용하게 처리함이 옳다.
파박! 단천의 품에서 침 하나가 빛을 발하며 시큐리티의 혈도에 꽂혀들었다.
단천이 침을 꽂아놓은 혈도는 천주혈이었다. 깊게 찌른다면 사혈이 되지만 적당한 힘으로 꽂아넣는다면 상대를 몽롱하게 만들어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 수 있다.
“약속은 잡았다. 문을 열도록.”
“···하지만···.”
“문을 열어라.”
“알겠습니다.”
몽롱한 상태일수록 단호하게 말하면 상대가 순순히 따라올 확률이 높아진다.
단호한 단천의 말에 시큐리티가 문을 열었다. 단천은 시큐리티의 혈도에 꽂혀든 두랄루민 침을 뽑아들었다.
침을 뽑고 나서의 효과가 길게 가지는 않으나 상관없었다.
“어떻게 한 거지?”
“별 것 아니다.”
뒤를 쫓아오는 이태흠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이런 모든 것들을 설명하기는 귀찮았다.
“그냥. 본좌의 인지도라고 해 두지.”
“······.”
설명을 요구하려던 이태흠은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물론 인지도만으로 사무실 접견이 가능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BJ천마가 보여주는 특이한 행보가 하나둘이었던가.
‘그러려니 해야지.’
세상은 그러려니 해야 편한 것들이 많은 법이다. 그렇게 둘은 사무실의 가장 높은 곳. 리 창퐁이 있는 사무실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혼자서 사용하는 커다란 사무실 안에 리 창퐁이 있었다.
단천은 손을 들어 멀리 보이는 리 창퐁을 향해 흔들었다.
당황한 리 창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BJ천마?”
“반갑다.”
“저 인간이 어떻게 여길 들어온 거야!”
리 창퐁이 옆에 서 있던 비서를 닦달했지만 답이 나올 리 없었다.
“답은 단순하다. 본좌가 오고 싶어했으니까.”
천하에 단천이 가고자하면 못갈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1층에서 오는 길이 막혔다면 창을 타고 올라서라도 여기에 도착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쪽이 더 편했겠군.’
굳이 시큐리티의 천주혈을 누른다는 선택지보다 100층 남짓한 야트막한 수직벽을 오르는 게 편했을 텐데.
과거를 복기하며 더 나은 무인이 된 단천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기부금에 관해서 잠시 대화를 하고 싶은데.”
기부금이라는 말에 리 창퐁의 눈살이 파르르 떨렸다.
“그 말도 안 되는 기부금 말인가?”
“따지자면 본좌가 정당하게 번 기부금이지.”
“그건 사기야! 게다가 우리 게임도 아니었다고! 그러니 낼 필요도 없는 돈이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란 말이 있다.”
천금이라고 한다면 금자 천 냥. 현대로 환산한다면 천금은 1억원이나 되는 큰 돈···.
근데, 1억원이면 지금 상황에서는 작은 거 아닌가?
“···정정하지. 남아일언 중억금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한 번 뱉은 말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지.”
인플레이션을 감안해 고사성어를 정정한 단천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딴 돈을 내가 내 줄 법적인 이유는 하나도 없다.”
실제로도 그랬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실제로 리 창퐁, 그러니까 인화가 BJ천마와 한 내기는 댓글로 적은 구두계약에 불과하다.
말을 손 뒤집듯이 뒤집어도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다.
“후회할 텐데.”
“흥! 인지도 문제를 생각하는 건가? 어차피 우리 게임의 세계 판매량은 높지 않다! 게다가, 그깟 돈 좀 안 낸 것을 사람들이 얼마나 기억할까? 기껏해야 1년?”
세상에서 논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다. 어떤 사람은 논란 하나로도 영원히 사라진다. 그러나 돈과 인맥이 있는 인간은 다르다.
자신의 돈과 인맥을 발판으로 삼아 어지간한 논란따위는 비웃듯이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인 것이다.
그리고 리 창퐁은 이 ‘돈’과 ‘인맥’을 모두 가진 인간이다.
“똑똑하군.”
실제로 돈을 써서 기사를 덮는 것은 끽해봐야 몇억 단위의 손실에서 끝날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기부를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돈다고 해도 그 파급이 영원할 수는 없다.
리 창퐁은 평생 저런 방식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니 게임을 도적질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거지.”
“게임을 도둑질했다는 증거 있나?”
증거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종말 생존자」를 꼬리가 잡히지 않도록 내부수정을 충분히 해서 만든 것이 바로 인화의 「생존투쟁」이었으니까.
세간에서 도작이라는 인식이 조금 있더라도 법적으로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도록 만들어낸 것이 바로 생존투쟁이었다.
그리고, 이런 법적인 논쟁까지 가지 않더라도 단천이 증거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실제로 단천은 게임 개발에 있어서는 문외한이었으니까.
단천은 옆에 있던 이태흠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더럽다고 생각한다.”
휴대폰의 번역기를 통해 리 창퐁의 말을 들은 이태흠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또한 마냥 깨끗하게 살아온 사람은 아니었다. 큰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다소 잘못을 저질러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그렇다고 해서 선을 넘어본 적은 없어. 그건 사람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나도 깨끗하게 산 건 아니지만.”
“소위 사파가 말하는 인의仁義라는 것이지.”
“인의? 그게 뭐지?”
“인의란 건···.”
사파가 정파들에게 욕을 들어먹기는 한다. 실제로도 평판이 좋지 않고. 하지만 사파라고 해서 마냥 사람들을 죽이는 무뢰배들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선이 있는 것이다.
약자는 건드리지 않는다. 흉년에는 구휼미를 푼다. 되도록이면 민간인은 건드리지 않는다. 같은 것들.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선 내에서의 법도가 사파에게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을 넘은 자들은, 사파조차 아닌 무림공적이 된다.
단천은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 귀찮았기에 깊디깊은 의미를 담은 눈빛을 이태흠에게 전달했다.
째릿.
“뭘 그렇게 봐?”
“그런 거다.”
‘뭐가 그런 건데.’
물론 단천의 깊은 뜻이 담긴 눈빛의 의미가 전달될리는 만무했다.
그렇다고 단천이 설명을 다시 하거나 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지금부터가 마지막 기회다. 그러니 신중하게 대답하도록.”
“일개 스트리머따위가 나를 내려다보기라도 하는 듯한 말투를 쓰지 마라.”
단천은 개가 짖거나 말거나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결국 요는 돈을 안 쓰겠다는 거. 맞나?”
“그렇다.”
“게임을 도둑질했다는 걸 사과할 생각도 없고.”
“도둑질한 적이 없으니까.”
“이번에 나올 라쿤의 신작을 훔쳐간 것도···.”
“우리가 먼저 런칭했는데. 사과할 이유가 있나? 런칭을 한다면 놈이 우리 게임을 도둑질한 게 되겠지.”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태도지만 단천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중원에서 저런 탐욕스러운 자들을 많이 봐 온 탓이다. 단천은 보통 무력을 동원해서 놈이 잘못을 알게 될 때까지 가르침을 내리는 편이었지만. 뿌리부터 썩어빠진 인간을 계도하는 데까지 시간을 사용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뿌리가 썩은 나무는 그 어떤 수로도 살릴 수 없는 법이지.”
“이야기 끝났으면 꺼져.”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당장 꺼져!”
단천은 몸을 돌려 CEO실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가는 건가?”
“그러면.”
“칼부림을 한다거나, 옥상에 매달아놓고 떨어트리겠다고 협박을 한다거나. 그럴 줄 알았지.”
“그런 거야 사람을 상대로나 의미가 있는 일이지.”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기 위해서 친히 여기까지 왔는데.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과거의 단천이었다면 거절당하는 즉시 리 창퐁을 베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단천은 계도의 여지가 아주 조금도 없는 인간을 상대로 자신의 검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굳이 검을 더럽히지 않고 처리할 방법이 있기도 했고.
“리 창퐁이 당신 정도만 됐어도 창문 밖에 매달아놨을 텐데.”
이태흠은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들은 이태흠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칭찬인 거지?”
“인간에게 인간이라고 하는 게 칭찬이라면.”
“······.”
“아무튼. 원 권리자가 저렇다는데. 투자할 생각은 있나?”
“투자할 생각?”
단천은 ‘어쩌겠냐’는 표정으로 이태흠을 바라봤다. 단천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는 짧막한 녹음 파일이 떠올라 있었다.
“방금 대화. 녹음도 했는데.”
“···중국에서 도청은 불법이다. 실토해 봤자 법정에서는 아무 의미없어.”
“물론 법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녹음이다. 하지만 그것은 ‘법적’으로만 그렇지.”
이태흠은 그제서야 단천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천억’이라는 투자금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저 파일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터져나왔을 때의 파급력이 얼마나 클지까지.
“천억이라고 했나?”
“그래. 정확한 금액은 모르겠지만. 그 정도다.”
이태흠은 천억이라는 돈과 이 모든 상황에 하인라인이 개입했을 때의 이득을 저울질했다.
저울질을 길게 할 필요도 없었다.
천억이라는 커다란 돈보다도 훨씬 더 커다란 가치를 갖는 투자처가 눈 앞에 있었다.
“싸군. 그것도 아주.”
“역시 그렇게 결정할 줄 알았다.”
“크흐. 크하하하. 이런 남는 장사를 하게 될 줄이야.”
이태흠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울려퍼졌다.
길게 이어질 것 같았던 이태흠의 웃음소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웃음을 길게 터트리기도 전에 단천이 다음 말을 꺼낸 탓이다.
“자. 이제 수수료를 내도록.”
수수료?
“뭔 수수료?”
“이런 투자기회를 줬는데. 공짜로 먹을 생각을 했나?”
“지금 천억이 수수료 아니었나?”
“그건 계약 수수료고. 이번 투자의 기회비용 수수료는 따로지.”
수수료에 다시 수수료를 매기는 미친 놈이 이 세상에 어딨어!
이태흠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천은 냉정하게 수수료에 대해서 말할 뿐이었지만.
“요율은 20%.”
“안 해! 안 한다고 미친 놈아! 날강도 자식아! 수수료에 다시 수수료를 왜 붙여! 이중과세잖아!”
“꼬우면 다른 게임사에게 이 기회를 양도하도록 하지. 이 파일이 있으면 어느 게임사고 너나할 것 없이 투자하려고 할 테니까.”
“이. 이이익.”
시뻘겋게 달아오르던 이태흠의 얼굴이 빠르게 식었다. 단천의 행동거지가 열받을 뿐이지 몇년에 한 번 올까말까할 투자기회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끄윽. 조, 좋아. 투자하도록 하지.”
“그래. 이토록 좋은 기회를 요율 25%로 계약하다니. 땡 잡은 거다.”
“25%라니? 방금까진 20%라며! 이 망할 자식아!”
“잠깐 사이에 환율이 올랐다.”
대체 여기서 환율이 왜 튀어나오는데? 환율은 전혀 관계없잖아!
타당하기 그지없는 반론은 이태흠의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했다.
그 반론이 나오는 순간 25%이던 요율이 30%로 올라갈 것이 너무나도 뻔해 보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