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큰 거 한 발 (4)
이태흠은 잔뜩 골이 난 상태였다. 그야 당연했다.
대형 게임사의 CEO라는 것은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인간이다. 안 그래도 처리할 일이 많고 할 일도 많고 제대로 일이 굴러가는지도 확인할 거리가 많은데 갑작스럽게 중국에 끌려온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인 것이다.
“내 팔자야. 바빠 죽겠는데 지금 뭐 하는 짓인지.”
“그만 징징거리도록.”
BJ천마에게 아침부터 연락이 와서 중국에 가자는 말을 들었을 때는 농담인가 했다.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하는 것이 어려우니 대신 예약하라는 말은 덤이었다.
“지금 안 그래도 게임 수급을 하느라 힘들어 죽겠다고.”
하인라인은 게임 개발사인 동시에 게임 런칭을 맡고 있는 회사이기도 했다. 게임 개발사들이 춘추전국시대를 벌이고 있는 것처럼 게임 런칭 경쟁또한 그만큼 치열해져 있는 상태다.
하인라인이 독자 개발한 게임 판매 플랫폼인 H-Line이 한국 내에서는 굉장히 높은 점유율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한국 내에서만의 이야기. 세계적으로 본다면 미미하기 그지없는 점유율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점유율 부족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물론 하나였다.
독점 타이틀의 부족.
“지금 나는 명작 독점 타이틀을 따내야 한단 말이다! 이렇게 중국에 와서 놀고 있을 시간이 없어!”
“본좌도 한창 운동을 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빠트리고 온 것이니 불평은 거기까지 하도록. 내 운동하는 시간과 너의 영업시간 중, 대체 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당연히 내 영업 시간이지 이 미친놈아.’
이태흠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눈 앞의 인간이 천공을 흥행시킨 1등 공신만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신발을 벗어 놈의 머리통을 후려갈겼을 것이다.
바빠 죽겠는데 이 인간은 무슨놈의 약재를 하루종일 사고 앉아있지를 않나. 지금은 상하이의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다.
‘바빠 죽겠는데 돌겠네 진짜.’
이태흠은 초조한 안색으로 휴대폰을 계속 바라봤다. 걸어가는 순간에도 하인라인 본사에서 오고 있는 메시지들을 쉴 새 없이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예 타국의 점유율이 바닥을 기고 있는 얼마 전까지의 상태였다면 플랫폼의 점유율이 밑바닥을 빌빌 기건 말건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천공」의 초대박 흥행이라는 변수 때문이다.
천공은 H-Line의 독점 판매 게임이다. 천공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이 증가한 만큼 H-Line을 설치한 사람의 수도 전세계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5천만 언저리에서 바닥을 기던 가입자 수가 얼마 전에 3억을 돌파했다.
물이 들어오는 것을 넘어서서 해일처럼 몰아닥치고 있는 상황에 손을 놓고 있을 정도로 이태흠은 멍청한 인간이 아니었다.
‘H-Line에 유저들을 최대한 묶어놔야 된다!’
결국 영원한 게임은 없다. 게임 하나의 생명은 영원할 수 없는 법. 하지만 플랫폼은 게임보다도 그 생명이 훨씬 길다.
플랫폼에 유저들을 묶어놓기 위해서는 H-Line에서만 나올 수 있는 독점작을 빠르게 런칭해야만 했다.
문제는, 하인라인이 계약할만한 특급 독점 게임이라는 게 하늘에서 떨어질 리가 없다는 거다.
어딘가에 묻혀 있을 보석을 찾아 하인라인은 지금 밤을 새 가면서 게임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한, 중, 미, 유럽은 물론이고 어제는 인도를 넘어서 게임 개발 불모지라고 불리는 아프리카에서 개발하는 게임들까지 훑어보고 있을 지경이었다.
물론 성과는 없었다.
하지만 성과가 없다고 해서 포기한다면 기업의 총수가 될 수 없는 법.
“조금만 더 파면 뭐가 나올 수도 있단 말이다.”
“가끔은 파는 것으로는 무가지보를 찾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어쩌면 하늘에서 툭하고 보물이 떨어질지도 모르지.”
“꼭 세상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 인간이 그딴 소리를 하지. 인생이라는 것은 치열하게 노력하는 자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법이다.”
“혹시 모르지. 본좌는 운이 좋은 편이거든.”
아무리 운이 좋아도 하늘에서 떡하니 최상급 신작이 떨어지겠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보다. 만날 사람이라는 건?”
“저기 보이는군.”
BJ천마가 손가락을 가리킨 곳에 서양인 한 명이 불안한 눈을 한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이태흠의 눈이 샐쭉해졌다. 저 멀리 보이는 서양인의 얼굴이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탓이다.
그렇게 이태흠이 저 멀리 보이는 서양인이 누군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에 BJ천마가 그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건냈다.
잠시 BJ천마와 이야기를 하던 서양인이 깜짝 놀라면서 자신을 향해 소리쳤다.
“하인라인의 CEO. 이태흠?”
“맞습니다만.”
“예전에 멀리서 한 번 뵌 적이 있었다. 내 이름은 폴 레인이다.”
···폴 레인?
“···폴 레인이라고? 당신이 그 「종말 생존자」의?”
“맞다.”
그러니까. 지금 솔로 게임 판매량 1위를 먹고 있는 「종말 생존자」의 개발자?
니가 왜 여기서 나와?
***
폴 레인과 이태흠의 대화는 그 뒤로도 한참 이어졌다. 처음 왔을때는 죽겠다 싶었던 둘의 표정은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지 모를 정도로 밝아져 있었다.
둘은 주변에서 종이를 몇 장 얻어오더니 본격적으로 계약서를 적어나갔다.
“이야. 이런 일로 온 거면 이런 일로 불렀다고 말을 하지 그랬나!”
“그냥 오라고 했을 때는 무슨 미친 인간인 줄 알았다.”
“나도 똑같이 생각했었지. 이런 계획이 있었을 줄이야.”
“물론 본좌는 언제나 계획이 있다.”
하인라인이 독점 ip확보에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폴 레인이 신작 게임을 판매할 곳이 마땅히 없다는 것을 들은 하인라인에서 폴 레인의 신작 게임을 판매할 계획까지 세운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면서 이태흠에게 비행기표를 예매시킨다는 주 목적까지 달성했으니. 실로 꿩 먹고 알 먹고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 꿩은 비행기표 예매다.
“이런 기회를 만들어주다니. BJ천마. 당신에게 감사한다.”
폴 레인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냥 게임 실력만 좋은 크레이지 보이인 줄 알았는데. 이런 인맥이 있었을 줄이야.”
“원래 인덕과 능력이 있는 자 주변에는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는 법이지. 유비와 항우를 생각해보도록.”
하나의 예시가 심각하게 극단적인 것 같기는 하지만 폴 레인은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이제 다시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해 보이는군.”
“게임을 만드는 것을 사랑하니까.”
단천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신이 무武의 길을 걷는 것처럼 폴 레인도 게임의 길을 걷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의 앞길이 어떨지를 예지하는 데에는 상단전의 힘을 사용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잘 될 거다.”
“아. 일이 다 끝났으면 가 봐야겠군. 게임 개발을 마무리해야 하거든. 팀원들도 다시 모으고, 사무실도 새로 마련하고. 할 일이 갑자기 불어나 버렸어.”
“빨리 가 보도록.”
폴 레인은 함박웃음을 지은 채로 단천을 떠나갔다. 폴 레인이 완전히 사라져간 후 단천은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겠나? 인화쪽과 척을 지게 될 텐데.”
“어차피 그 새끼들이랑은 이미 척 질 만큼 진 사이다. 라쿤 사의 신작을 독점런칭하는 거다. 다른 플랫폼이야 잃을 게 많지만 우리는 물 들어오는 입장이라 이것저것 따질 게재가 아니지.”
“계약금은 얼마지?”
“2천억. 관련된 대출이 꽤나 있는 모양이더군. 망하기 직전의 회사였으니 계약금이 우선적으로 필요했지. 덕분에 비율은 말도 안 될 정도로 우리 쪽에 유리하게 받을 수 있었다.”
“2천억을 회수할 수는 있나?”
“초반부 플레이 영상 정도는 볼 수 있었어. 내 직감이지만 회수할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히 회수를 못 해도 상관없지만.”
게임 플랫폼들이 자신들의 파이를 늘리기 위해서 특급 게임들을 손해를 감수하면서 독점권을 사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현재 최고 주가를 갱신하고 있는 게임의 차기작을, 그것도 독점 계약을 맺은 채 런칭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또다른 급류急流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급류가 2천억이면 싸게 먹히는 거지. 그것도 매우.”
과거의 PC시절의 게임도 개발비가 심심하면 천억을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의 VR게임들의 개발비는 실로 천문학적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주목도가 최상위권에 있는 게임의 독점권을 2천억에 샀다면 실로 헐값이나 다름없는 금액인 것이다.
이태흠은 싱글벙글 웃음을 터트렸다. 이 소식을 당장이라도 회사에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났다.
옆에 있는 BJ천마. 마냥 사람 귀찮게 구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이토록 사람을 마음에 들게 하는 일도 할 줄 알다니.
지금 마음같아서는 BJ천마를 어부바 한 채로 한국까지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보다. 왜 2천억이지?”
“계약서에 그렇게 썼으니까 2천억이지. 아, 환율 계산에 따라 조금 달라지는 걸 말하는 건가?”
“아니. 수수료를 이야기하는 거다.”
“수수료? 무슨 수수료? 아. 환전 수수료? 아, 거 참. 그런 거야 법무팀이 다 알아서 하는 거지. 그런 수수료는 다 해 봐야 그렇게까지 안 들어가. 노 프라블럼이라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 이태흠을 바라보던 단천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본좌는 지금 중개 수수료를 말하는 거다.”
“···중개 수수료? 무슨 중개 수수수료? 에이전트를 통해서 계약을 한 것도 아닌···.”
말을 이어나가던 이태흠의 얼굴이 불길함으로 물들었다.
“그. 설마. 이번 계약의 중계수수료를 받겠다는 건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
이태흠이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돈을 그렇게 밝히는 것 같은 느낌이 안 드는데도 뒤돌아보면 알뜰살뜰하게도 돈을 긁어모으는 것이 BJ천마였으니까.
“그래서. 중개 수수료는 어느 정도를 생각하나?”
“1천억.”
“···뭐?”
“1천억.”
이태흠의 눈썹이 파르르르, 떨렸다.
중개 수수료가 50%라니. 대동강물을 팔아먹던 봉이 김선달도 안 할 요율이지 않은가.
“그, 이런 수수료를 처음 받는 것이라 잘 모르나 본데. 보통 중개의 요율은 잘 해야 20%정도야.”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고오오오!
더 말을 지껄이면 베어버리겠다는 기세가 BJ천마의 몸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맞다. 이 인간. 설득이라고는 절대 안 통하는 인간이었지.
“······그래도 천억은 좀···.”
“본좌가 천억을 날로 먹겠다는 건 아니다. 본좌는 타인에게서 의미 없는 약탈을 자행하는 무도한 자가 아니다.”
당신 나한테서 주식을 있는대로 약탈해갔잖아. 하는 말을 이태흠은 꺼낼 수 없었다.
대화란 것은 언어가 통하는 사회적 합의. 사회적인 합의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미친놈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기에.
“······.”
파르르 눈살만 떨어대는 이태흠을 바라보던 단천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보아하니 이태흠은 천억을 단순히 단천 자신이 ‘먹는’ 돈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단순히 본좌에게 천억을 달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면.”
“일종의 투자를 해 보라는 말이지.”
“투자?”
“그냥, 본좌를 믿고 투자해 보도록. 절대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말을 마친 단천은 인화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