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큰 거 한 발 (3)
다음 날 새벽.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단천은 와이파이가 확인되자마자 휴대폰을 열어 인터넷에 접속했다.
[트인낭 연말 기부 이벤트 종료! 기부 총액 4천억 돌파해.]
[종말 생존자. VR게임 판매량 역주행으로 1위!]
[(특집) BJ천마가 지금까지 플레이한 게임들 전격해부!]
인터넷 기사란은 트인낭의 연말 기부 이벤트로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단순히 인터넷 방송란뿐만 아니라 메인 페이지에서도 절반 정도가 연말 기부 이벤트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기부 이벤트인 동시에 플레이되고 있는 게임의 쇼케이스나 다름없는 이벤트가 바로 연말 기부 이벤트였으니까.
그리고 지금 기사란에서 가장 핫한 게임은 「종말 생존자」. 그리고 가장 주목받는 스트리머는 BJ천마였다.
“생각보다도 효과가 더 좋군.”
엔딩 파트에서의 시청자수는 무려 100만.
자동 번역기가 아무리 활성화되었다고는 하나 문화적인 부분의 차이는 시청에 장벽을 만들기 마련이다.
문화가 공유되는 영미권 스트리머나 자체적인 인구가 엄청난 중국, 인도 스트리머가 아닌 비주류권 언어 스트리머가 실시간 시청자수 100만을 돌파하는 것은 유래가 없을 정도의 일이었지만.
단천의 표정은 무심했다.
애초에 단천에게 있어서 100만이라는 숫자는 지나가는 숫자일 뿐이었으므로.
‘전 세계 인구가 몇 명이었더라.’
세계 인구가 80억명정도쯤이었던가. 이 중에서 게임 시청이 불가능한 4세 이하의 인구를 걸러내면 대충 70억명쯤 될 터다.
천마로 태어났다면 동시 시청자수 70억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 법.
100만에서부터 70억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렇게 단천은 계속 인터넷창을 뒤적였다.
“역시 없군.”
인화에서 기부금을 1000억이나 지출했어야 하는 상황. 좋든 싫든 간에 기부를 한다고 마음먹었다면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고, 인터뷰를 했을 상황이다.
자연스럽게 기사화도 됐을 테고.
하지만 인터넷 기사에는 전혀 인화쪽의 기부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역시 어물쩡 넘어갈 속셈인 것일 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사를 다시 돌아보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폴 레인]
“무슨 일이지?”
[···반응이 날카롭군. 한국 시간으로는 아침일 텐데.]
“아침 맞다. 본좌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비무를 통해 본좌를 꺾으면 된다.”
[비무? 가 무엇이지? 제대로 번역이 되지 않는군.]
“1:1로 하는 데스매치로 나를 이기면 된다.”
[······그래. 당신에게서 뭔가 제대로 된 반응을 바란 것이 내 잘못이다.]
단천은 자신의 탓을 하는 못돼먹은 코쟁이의 코를 잡아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쉽게도 이곳은 중원이 아니라 21세기의 지구였고, 단천의 무위는 아직까지 대륙을 가로지를 수 있을 정도에는 닿지 못했다.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벨에게 감사하도록. 너는 운이 좋다.”
[실제로 운이 좋지. 당신 덕분에 우리 회사가 가지고 있던 빚을 모두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빚이 해결됐나?”
[그래. 이번에 「종말 생존자」의 매출이 엄청나게 나왔거든. 바로 입금은 되지 않지만 매출을 보여주고 투자자들을 설득했네.]
“매출이 상상 이상으로 나왔나 보군.”
[···사실. 그렇지는 않아. 매출액이 입금된다고 해도 대출받은 돈의 절반 정도밖에 되갚을 수 없거든.]
절반밖에 갚을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폴 레인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그런데도 투자자들이 설득되던가?”
[거야, 게임 회사라는 게 탈탈 털어가도 별로 돈 될 만한 게 없거든. 그러니 투자자들을 설득할 ‘인질’이 있다면 투자자들 입장에서도 속아 줄 수밖에 없지.]
“신작을. 출시하기로 마음먹은 거군.”
폴 레인이 인화에 유출당하면서 출시를 주저하던 신작. 「심해의 위협」을 출시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내기에 졌으니 어쩔 수 없지.]
지난 번과 이번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종말 생존자의 경우에는 출시일도 개발시작도 폴 레인 쪽이 앞섰지만. 지금은 그 상황이 완전히 반대다. 개발 시작은 라쿤 사가 앞서지만 런칭일은 빼도박도 못하는 인화 쪽에 있다.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몰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만든 게임을 세상에 선보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잘 생각했다.”
[물론 문제는 많아. 게임을 런칭해 줄 런칭사를 찾지 못하고 있어. 표면적으로는 인화의 「아틀란티스 데스티니」의 표절을 이야기하지만.]
이유는 뻔했다. 인화 쪽이 손을 쓴 것이다. 거대 게임사간의 알력 다툼이라면 게임 런칭사 입장에서도 부정적일 수 있지만.
폴 레인의 게임사인 라쿤은 인디 게임사다.
구태여 라쿤의 편을 들어줬다가 초대형 게임사인 인화쪽의 심기를 거스를 이유는 없는 것이다.
거기에 실제로 인화 쪽의 게임과의 유사성도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으니.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방법을 찾아보고 있는 중이야.]
“중국 상해上海로 오도록.”
[뭐? 그게 무슨 말···.]
뚝.
단천은 폴 레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할 말은 다 했기 때문이다.
“중원에는 꽤 오랜만에 발을 디뎌보겠군.”
단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천아. 뭘 또 아침부터 그렇게 음험하게 웃고 있어. 그렇게 웃지 마라니까.”
“내가 어떻게 웃건. 내 마음이야.”
지나가던 단지은의 타박에도 단천은 꿋꿋하게 웃음을 견지했다.
“그보다. 휴대폰으로도 비행기 예약을 할 수 있지?”
“거야 그렇지. 어디 가게? 부산? 제주도?”
“중원.”
“중원이 어디래.”
단천은 휴대폰으로도 비행기 예약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휴대폰을 번개처럼 두드리기 시작했다.
“ㅂ···ㅣ···ㅎ···ㅐ···ㅇㄱ..ㅣ··· ㅇ···ㅖ··· 오타. 백스페이스··· 백스페이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휴대폰을 두드리는 속도의 반의 반의 반 속도로 휴대폰 자판을 두드리는 단천을 바라보던 단지은이 한심하다는 듯이 단천의 손에서 휴대폰을 뺏어들었다.
타다다닥! 단지은의 손이 만기일 얼마 남지 않은 서류를 해치우는 서윤학의 손처럼 휴대폰 위에서 춤을 췄다.
“오.”
“오가 아니라. 니가 느린 거야. 언제쯤 휴대폰에 익숙해질래? 인기 스트리머가 되려면 전자기기도 잘 다뤄야지.”
“만검慢劍이라고 해서 무조건 약하다는 것은 편견이다.”
‘만검이 뭔데.’
저거 또 지만 아는 이야기하고 있네. 단지은의 눈이 실눈이 됐다. 저래서야 시청자들은 고사하고 친구라도 사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이미 친구는 사귄 거겠지. 그러니까 비행기를 타고 어디 가겠다고 하는 것일 테고.
“여자야?”
“뭐가.”
“만나러 가는 사람.”
“아니. 남자인데.”
“실망이야.”
‘뭐가 실망인데.’
단지은이 실망하는 모습을 본 단천의 표정에 의문이 떠올랐다. 맘에 안 드는 놈 줘패러 가는 건데 남자이고 여자이고가 무슨 관계란 말인가.
그리고 보통 관계가 있더라도 남자를 줘패는 것이 좀더 도덕적으로 지탄을 덜 받지 않나?
“자. 가입 끝났어. 알아서 비행기 표 끊어서 가면 돼.”
“알았어.”
“재밌게 놀고 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단천의 입꼬리에 살벌한 미소가 걸렸다. 단천의 미소를 본 단지은이 타박했다.
“그렇게 웃지 마라니까.”
누가 보면 사람 죽이러 가는 줄 알겠네.
***
상하이上海시. 중국 최대의 금융도시인 상하이에는 수없이 많은 대기업들의 본사가 즐비하다.
그리고 근래에 가장 많이 늘어난 기업들의 건물은 역시나 게임사들이다. 공격적인 투자와 인수합병을 통해서 몸집을 불린 게임사들이 밀집되어 있는 량서우兩手골목은 내로라하는 중국의 게임사들이 밀집되어 있는 골목이다.
그리고 이 골목의 가장 높은 건물의 로얄 층에 인화게임즈가 자리해 있다.
“···왜 내가 여기에 와 있는 거지.”
폴 레인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지금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게임에 산적해 있는 버그들도 잡아야 하고, 나갔던 직원들에게 연락을 해서 돌아와 달라고 부탁해야 하고, 인력 충원도 해야 하고, 결정적으로 자신들의 게임을 런칭해 줄 회사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지금 한가롭게 상하이에 놀러오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말이다.
왜인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BJ천마의 한 마디에 여기까지 날아오고 말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뭐, 구태여 생각하자면 자신의 게임의 매출을 폭발적으로 올려준 스트리머가 불렀으니 한 번쯤 만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이 사람은. 언제쯤 오는 거지.”
자신보고 상하이로 오라고 해 놓고는 감감무소식이다. 대한민국이면 자신보다 훨씬 더 가까운 거리를 날아왔을 터인데.
심지어 연락도 ‘곧 간다’는 문자를 끝으로 뚝 끊겼다.
“사람을 불러 놓고도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게 말이나 되는 건지.”
그렇게 폴 레인이 투덜거리는 찰나. 저 멀리에서 거다란 덩어리가 보였다.
“저게 뭐지?”
“엄청 큰데?”
주변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거나 말거나 사람 네다섯 명을 겹쳐놓은 크기의 덩어리는 꿈틀거리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저게 그 뭐냐. 기어오는 혼돈인가 뭔가 그건가.’
종말 게임을 오래 만들다보면 기묘한 상상력이 늘어나게 되는 것은 일종의 직업병이다.
폴 레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에 있는 소화기의 위치를 확인했다. 여차파면 소화기를 저 기묘한 괴물에게 발사한 다음 도망칠 셈이었다.
하지만 폴 레인이 소화기를 발사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서 다가오는 덩어리의 앞에 달려 있는 것이 낯이 익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BJ천마?”
BJ천마의 등 뒤에는 커다란 보따리가 매어져 있었다. 자신의 몸보다 더 큰 보따리를 대체 무슨 수로 공깃돌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고 다니는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건 뭔가?”
“약재들.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약재들이 좀 있거든. 독재毒材들은 유통도 힘들고, 파는 쪽도 사는 쪽도 자격증이 필요하니까. 여기는 그런 게 없어서 좋군.”
문명이나 법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말하는 BJ천마의 말을 들은 폴 레인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걱정 마라. 가기 전에 다 먹고 갈 테니.”
다 먹는다고. 저 덩어리를? 언제? 혹시 나한테도 먹으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폴 레인은 불안하게 거대한 보따리를 바라봤다.
“보지 말도록. 그렇게 쳐다봐도 안 나눠준다.”
‘줘도 안 먹어.’
떡 먹을 생각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다. 폴 레인은 저놈의 약재인지 뭔지 하는 물건을 자신이 먹지 않아도 된다는 데 안도했다.
그리고 그렇게 안도를 하고 나자 시야가 조금 넓어졌다.
BJ천마의 거대한 보따리 뒤에 한 사람이 더 있었던 것이다.
중년을 갓 넘긴 것으로 보이는 남자의 표정은 보는 것만으로도 귀찮음과 힘듦이 뚝뚝 묻어나오고 있었다.
표정으로 추측컨데 BJ천마가 데려온 것이 분명했다. 내기를 한다면 지금 자신이 개발한 「심해의 위협」을 제외한 모든 것을 걸 수도 있었다.
“뒤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아. 소개가 늦었군. 이 사람은 이태흠.”
“이태흠?”
“그래. 이태흠.”
이태흠이 누군데. 뭔가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BJ천마를 노려봤지만 저 인간이 제대로 된 설명을 입에 담을 리가 없다는 것을 폴 레인도 이제는 슬슬 깨달아가고 있었다.
‘이태흠. 이태흠이라.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이름인데. 어디서였지.’
곰곰히 생각을 이어나가던 폴 레인의 생각이 멈췄다. 이태흠. 이 게임판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름이다.
“설마. 하인라인의 CEO. 이태흠?”
지금 저 피곤한 얼굴을 한 채 BJ천마를 죽이는 상상을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인간이.
한국의 초대형 게임사이자 게임 런칭회사인 하인라인의 CEO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