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천마-171화 (171/212)

39. 낙진이 끝나고 (4)

“으어. 추워.”

두꺼운 옷을 겹겹이 입었는데도 몸에 새겨지는 한기에 일행 전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몸을 떨지 않는 것은 추위에 익숙한 단천뿐이었다.

“이런 추위가 계속되는 걸까요?”

“아마 그렇겠죠. 최소한 몇 년 단위로는 추위가 지속될 겁니다.”

이전에는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음울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다소 담담했다.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인 것이다.

“종말이 얼마나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그만 생각하도록. 눈 앞에 있는 것에 집중해도 모자라다.”

“감독님은 옳은 말을 재수없게 하는 경향이 있는 거. 알고 계세요?”

이중한과 김용태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맞는 말이군

> 반박할 수가 없다

“하지만 맞는 말이지.”

> 맞는 말인 동시에 물리적으로 맞아야 되는 말이기도 함

> 근데 천마님을 누가 때림?

> 때릴 사람이 없으니 재수없게 말해도 괜찮은 거 아닐까?

트럭이 움직이고 있는 곳은 ‘종말 생존자’에서 만들어져 있는 가상의 도시. 성원시였다. 꽤나 큰 규모의 도시인 데다가 이중한과 김용태의 말로는 연구시설도 꽤 많기 때문에 연구에 안성맞춤인 장소라고 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연구를 할 생각이 있다는 것은 대단하다고 해야 할 지. 현실감각이 없는 것이라고 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여기저기 부서져내려 있는 바닥을 질주한 지 얼마나 됐을까. 일행의 눈 앞에 다리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다리만 건너면 성원시입니다.”

성원시로 넘어간다면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을 꽤 보급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시작한 ‘학교’는 도시와 꽤 떨어져 있는 장소였기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학교와 하나의 도시는 보급받을 수 있는 물품들에 차이가 난다.

그렇게 버스가 교량을 거의 다 건넜을 때.

[정지! 정지!]

우렁찬 스피커음이 단천의 귀에 들려왔다.

“뭐죠?”

“군인들 같은데요?”

무장한 군인들이 다리를 점거한 채 총을 겨누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성원시로 가는 길은 통제중입니다.”

“빌어먹을! 세상이 망했는데 무슨 통제야!”

“저희는 맡은 바 임무를 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아무래도 이곳을 지나가려면 대화를 꽤 오래 해야 될 것으로 보였다. 이중한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

단천이 트럭에서 내렸다.

“뭐 하는 겁니까?”

“길을 막길래. 원래 길을 막는다면 해야 할 것은 하나뿐이지.”

“멈춰서는 거요?”

“놈들을 베어 내고 계속 갈 길을 가는 거.”

“상식이라는 게 세상에 있다는 거. 알고 계시나요? 저기 총 들고 있잖아요!”

“상관없다.”

청연이 황당해하거나 말거나 단천이 언월도를 든 채 앞을 향해 달려나갔다.

“머, 멈추십시오! 제 자리에 멈춰!”

당황한 군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는 군인들을 상대로 창 한 자루 든 채 달려든다고 생각하겠는가.

군인들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단천과 바리케이트 간의 거리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있었다.

> 아니 왜 발포안함?

> 너같으면 미친놈이 창 들고 달려오고 있는데 바로 대응할 수 있겠냐?

> 못하지;;

“쏴, 쏴!”

“저, 정말 쏩니까? 민간인인데요? 좀비도 아니고!”

“그럼 저대로 놔 두냐! 쏴!”

정신을 차린 군인 한 명이 발포 명령을 내렸다.

타다다다당!

빗발치는 총알들. 하지만 단천은 여유로웠다. 과거였다면 저런 총알들을 막아내고 피해내고 쳐 내는 데 꽤 집중력을 소모해야 됐을 테지만. 단천의 상단전은 꽤 많이 열려 있었다.

단천의 눈에 보일 듯이 총알이 앞으로 날아올 궤적이 보였다.

단천이 해야 할 일은 그 사이로 몸을 밀어넣는 것 뿐.

타다다다당!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단천의 몸이 빗발치는 총알 사이를 파고들었다.

“왜, 왜 안 맞아!”

“계속 쏴!”

> ?? 뭐임

> 무빙으로 피하는 것 같은데?

> 그게 된다고?

> 총알도 자르는 피지컬인데 무빙으로 피하는 것 정도도 못 하겠냐?

> 듣고 보니 설득력이···있어!

채팅창도, 일행도, 군인들도 경악 일색인 상태. 홍해를 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가서는 BJ천마의 몸은 점점 바리케이트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10보. 5보. 그리고 0보.

턱!

단천의 손이 바리케이트를 넘어 군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총을 든 군인들 십수 명에 포위된 상태였는데도 단천은 놀러오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BJ천마가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본 다음. 짧게 입을 열렸다.

“항복하도록.”

‘미친 놈인가.’

창 한 자루 꼬나쥐고 총을 든 군인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저토록 여유롭게 항복을 권유하다니.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었다.

“쏴, 쏴!”

“괜찮나? 지금 쏘면 오발탄에 아군이 맞을 위험성이 있는데.”

“···!”

정면에서 다가오고 있을 때와는 다르게 지금 BJ천마는 적진 한복판에 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에 총을 쐈다가는 오사의 위험성이 너무나도 크다.

“사, 상관없어! 쏴!”

“머저리같기는.”

촤좌좌좍!

단천의 말이 끝나자마자 언월도가 주변을 휩쓸어나가기 시작했다.

투두두둑!

한 번 언월도가 주변을 스쳐지나갈 때마다 총이 반동강이 나 바닥에 떨어져내렸다.

“마. 말도 안 돼.”

“그러게 항복을 했으면 무기라도 남았을 것 아니더냐.”

> ㄹㅇ 빨리 항복했으면 총이라도 건졌는데

> 천마님을 보고도 항복하지 않은 죄!! 너희들의 총!! 절대 안 돌려준닼ㅋㅋㅋㅋㅋ

> 나였으면 천마님 용안 뵈자마자 항복했다

BJ천마가 총을 상대로 보여준 퍼포먼스는 수없이 많은 영상을 통해 알려져 있었다. 그런 까닭에 채팅창의 패닉은 금방 가라앉았다.

물론 그건 지금까지 수없이 BJ천마의 플레이를 봐 온 채팅창의 이야기였고. 군인들은 지금 처음 보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당황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단천은 반동강이 난 총들을 천천히 둘러본 다음 입을 열었다.

“꿇어.”

***

“다음 번에는 미친 짓 하지 마세요!”

상황이 정리되자 건너온 청연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단천 입장에서야 무조건 피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움직인 것이지만 청연을 비롯한 일행들이 보기에는 그저 빗발치는 총알 사이로 몸을 들이밀었는데 운 좋게 총에 맞지 않은 것으로만 보였기 때문이었다.

“거 참. 더럽게 빽빽거리네.”

“인간이 목숨을 소중하게 여겨야지!”

“아니었으면 여기서 한참을 시간을 소요했을 거다. 이 자식들이 우리를 들여보내주지도 않았을 거고.”

단천이 턱으로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군인들을 가리켰다.

“그거야 그렇지만.”

“그보다 저런 상태로 놔 둬도 되는 겁니까?”

“그러면?”

“포박을 한다거나···.”

“어차피 놈들이 뭔 짓을 해 봤자 본좌 앞에서는 의미없다.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라고 할 수 있지.”

적을 구속한다는 것은 구속하지 않았을 때 당할 가능성이 있을 때에나 하는 짓이다.

그렇기에 단천 입장에서는 구속을 구태여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 포박을 할 필요가 없다면 왜 무릎은 꿇게 하신 겁니까? 어차피 상대할 수 있다면 무릎을 꿇게 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꼬라보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

> 납 득

> 인 정

> 감히 탑솔러를 꼬라봐?

> 꼬라보는 게 마음에 안 들면 어쩔 수 없지 ㅋㅋㅋㅋ

“뭐. 어쨌거나. 상황은 정리된 것 같군. 그보다 왜

군인들이 여기서 길을 막고 있는거지?”

“말할 수 없습니다. 군사작전입니다. 민간인에게 알려줄 수는 없습니다.”

군인 한 명이 호기롭게 말했다. 평범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군인으로서의 직업정신에 감동할 것이 분명하기 그지없는 단호함이었다.

하지만 입을 연 군인에게는 불행하게도. 그의 앞에 있는 인간은 평범한 인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빠악!

언월도가 입을 연 군인의 목젖을 후려갈겼다. 그리고 이어지는 일방적인 매타작.

뻑! 빡! 빡! 빡!

“윽! 악! 아악! 켁! 마, 말하겠습니다! 말하겠습니다!”

“필요 없어.”

“말하겠습니다! 제발 말하게 해 주십시오!”

“필요 없다니까. 너 말고도 말할 사람 많아.”

단천의 매타작은 호기로움을 보여준 군인이 바닥에 늘러붙은 껌딱지가 될 때까지 이어졌다.

“자. 또 대답하기 싫은 사람 있나?”

군인들의 눈에 공포가 어렸다. 보통 패더라도 중간에 한 번쯤은 말할 기회는 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던가. 그런데 자신들의 눈 앞에 있는 미친놈은 말을 할 수 없다는 말에 인간을 곤죽이 될 때까지 후려팼다.

“그, 근데 정보를 얻어야 하는데 저렇게 만들어 놔도 되는 겁니까?”

“원래는 안 되지.”

“그, 그런데 왜 저렇게 팬 겁니까?”

“꼬라보길래.”

> 꼬라보는 건 어쩔 수 없지

> 분노조절에 문제 있으세요??

> 문제 있으면 어쩔 거냐고 아 ㅋㅋㅋㅋㅋ

“본좌는 심문을 하는 데 있어서 길게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설명 제대로 할 에이스. 있나?”

“제, 제가 말하겠습니다!”

“제가 말하게 해 주십시오!”

여기에서 바리케이트를 지키는 군인들은 사명감으로 투철한 사람들이었다. 세상이 망하고 핵이 터지고 핵겨울이 온 와중에도 충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 아니겠는가.

그러니 평범한 적이 상대였다면 정보를 불겠다고 나불거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위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도 할 수 없는 것이 때로는 존재한다.

단천은 쭉 사람들을 훑어본 다음 개중 가장 계급이 높은 군인을 가리켰다.

“거기. 똘똘해 보이는 너.”

“네! 중사 이호진!”

이호진은 방금 막 전입받은 이등병이나 보여줄 법한 관등성명을 외치며 벌떡 일어섰다.

“설명해 보도록.”

“이게 좀비들이 창궐한 이후 북한에서 핵 발포가 시작됐습니다. 자국민들을 학살하기 위한 미사일 발포였죠. 핵무기 발사가 연이은 핵 발사로 이어졌고, 온 세계가 핵무기의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추운 거지.”

“다른 지역은 어덯게 됐을지 모르지만, 성원시는 좀비들이 창궐이 늦은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운 좋게 핵무기가 좀비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에 딱 맞게 떨어졌죠.”

“그래서 거의 다 해결됐다?”

“그렇습니다. 내부에 좀비들이 아직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좀비들이 섬멸되었습니다. 물론 다 섬멸이 된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성원시는 다리로만 육지와 연결되어 있는 장소입니다. 내부적으로 좀비들이 다 섬멸됐으니, 시 전체를 생존 거점으로 하자는 판단이 내려졌죠.”

“그래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오는 인간들을 봉쇄한 거구만.”

“···그렇습니다. 다가오는 사람들 중에 감염자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대의를 위한 옳은 결정이다. 하지만 동의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들을 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감염되지 않은 민간인들을 오지 못하게 한다는 말과 동치였으므로.

“오는 사람들을 죄다 막아서 우리들처럼 전혀 수상하지 않은 사람들조차 막는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그, 죄송하지만 저 트럭에는 뭐가 있습니까?”

“바이러스 샘플, 종자, 연구일지, 식량 조금. 아, 그리고 새끼곰 한 마리.”

‘충분히 수상한 것 같은데.’라는 표정이 모든 사람의 얼굴에 스쳐지나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