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천마-168화 (168/212)

39. 낙진이 끝나고 (1)

“누나. 나 죽으면···.”

꽁.

단지은은 단천이 ‘죽는다’ 비스무리한 소리만 해도 단천의 머리를 때렸다. 떨어진다, 내려간다는 소리를 해도 그랬다.

사실 정말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입장에서는 사소한 말실수라도 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긴 하다.

그 잣대가 왜 단천 자신에게까지 미치는지는 아직까지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래서 귀식대법이 싫은 건데.”

단천은 과거의 자신을 보고 있는 어딘가에서 중얼거렸다.

귀식대법은 몸을 강제적으로 얕은 수면상태에 빠져드는 것이다. 자연스레 꿈과 현실의 사이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렇다는 것은 과거의 기억들을 강제로 보게 된다는 뜻이다.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했던 일, 치료를 위해서 병원에서 살아야만 했던 일, 수치가 급격하게 나빠져서 응급실로 실려갔던 날의 밤.

그리고 그 다음의 기억은 중원에서의 기억이다. 기나긴 기억들 가운데 하나의 편린이 또다시 눈 앞에 나타났다.

서 있는 것은 서윤학과 단천 자신이었다. 서윤학은 자주 단천에게 물었다.

“지존.”

“왜.”

“지존은 그렇게 강해져 놓고도, 왜 더 강해지려고 하십니까?”

“영원제일인이 되려고.”

“어차피 영원제일이라고 해 봤자 실제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적들과 싸워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차피···.”

“영원제일인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 말인가?”

“솔직히 그렇습니다.”

천하제이인인 서윤학과도 그 거리가 영원만큼 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단천은 계속해서 수련을 반복했다.

서윤학의 논지는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는데 슬슬 쉬어도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개수작은.”

딱!

“아악! 왜 때리십니까!”

“이 새끼야. 너 내가 수련 멈추고 쉬면 남몰래 수련해서 내 모가지 따려고 그러지.”

“지존! 제가 반만년을 수련해도 지존의 실력을 못 따라잡으실 걸 알지 않습니까!”

“그래도 격차는 줄어들겠지. 천 대 맞을 거 구백구십구대 맞고. 안 그래?”

“천 대나 구백구십구대나! 그게 그거잖아!”

“오냐. 그러면 오늘 천 한대 맞아라.”

감히 천마교주에게 수련을 방만하게 하라는 되도 않는 헛소리를 하다 쳐맞는 서윤학을 바라보며 단천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시 생각해도 자신의 처벌은 공명정대하기 그지없다.

그보다.

“왜 영원제일인인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정상을 노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대답은 아니었다. 단천이 영원제일인을 노리는 다른 이유는···.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귀식대법을 취했음에도 몸이 영양분을 요구하고 있었다.

단천은 눈을 뜨고 호흡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렸다.

[종말으로부터 닷새가 지났습니다.]

닷새라. 꽤 일찍 일어났다. 무공이 탈마의 경지에 접어들었을 때에는 두세 달은 그냥 버틸 수 있었는데.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게임의 안이니만큼 어느 정도는 감수를 해야 하는 일이기는 했지만.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좌우를 가득 뒤덮고 있는 채팅창이었다.

> 와 ㅅㅂ 저거 어케 하는거임?

> 저런게 가능하다고?

> VR캡슐이 맥박, 호흡같은 거 실제로 다 체크하니까 가능한거임 실제로 잠수나 운동하는 사람이 이런 게임에 유리한 게 그래서 그런 거고

> 게임하려고 운동까지 해야 하는 사회라니 ㅠㅠ

> 눈 떴다

> 드디어ㅓㅓㅓㅓㅓ

채팅창에서는 단천이 호흡을 줄여서 귀식대법에 들어선 것을 보고 감탄하는 채팅들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꽤 지루하게 만들었군.”

시청자들은 다이나믹한 무언가를 바란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고 있는’상태다.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그다지 볼만한 거리가 되지 않는 것이다.

[시청자 수 : 654,474명]

“···그런 것 치고는 시청자가 그리 많이 빠지지 않았군.”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마지막의 시청자수가 80만명이었다. 15만명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수가 자신의 방송을 보고 있었다.

> 시간 그렇게 많이 안 지났습니다

> ㄱㅊ 어차피 현실이랑 시간감각 좀 다름

> 밥 차려 오니 정신 차린 정도임

단천은 몸을 일으킨 다음 가수면에 빠진 일행을 체크했다.

“죽은 사람은 없군.”

> 다행이네 죽었으면 죄책감 가질뻔

“죄책감은 무슨. 죽으면 시체를 치워야 하니 귀찮다는 뜻이다.”

> 상상도 못한 이유 ㄷㄷㄷ;

> 당신에게 인간의 감정은 없으신 겁니까?

> 극한의 생존마;;

밀폐된 공간이라 시체가 썩으면 상당히 까다로워진다. 아무튼 죽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단천은 식당으로 가 음식들을 가져왔다.

맛은 없을지언정 보존을 생각한 전투식량들이다. 지금 일행을 깨운다면 먹는 데에는 크게 문제가 없을 테지만, 먹자마자 다시 가수면 상태에 빠지게 된다면 그만큼의 영양 손실이 난다.

잠깐 고민하던 단천은 식량을 곱게 갈아 물에 타 미음을 만들어 일행의 입 안에 흘려넣었다. 곱게 갈아놓은 탓에 소화기도 놀라지 않고 영양분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일행의 영양보급을 끝낸 단천은 상태창을 띄웠다.

[‘방사능 낙진’이 끝나기까지 22일 남았습니다.]

[재해 ‘방사능 낙진’이 진행중입니다.]

방사능 낙진은 지금 상태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종말들이다.

[남은 종말]

[혹한]

[해일]

[운석 충돌]

[폭설]

···

“다른 종말도 대비해 놔야겠지.”

> 근데 이 안에서 어떻게 다음 종말을 대비함?

>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지 않나?

아포칼립스류 게임에서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을 모은다.

하지만 지금은 실시간으로 방사능 낙진이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상황.

파밍이나 대비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자원소모를 최소화해서 버티는 것 뿐.

> 살아남기는 했는데 뭐 어쩔건데?

> 세상이 망했는데 대피소 안에서 뭘 더 할 수 있는데 ㅋㅋㅋㅋㅋㅋ

> 이 상황에서 뭘 할 수 있냐고 ㅋㅋㅋㅋ

“그거야 너희의 생각이고. 가벼운 운동 정도는 할 수 있다.”

이 안에서도 할 수 있는 것들은 있다. 단천은 몸을 일으켰다. 신체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운동이 필요하다.

지금 단천의 몸은 게임 내에서의 몸이다. 원래 하던대로의 운동을 해서는 버틸 수 없다.

‘가볍게 하자. 무리하지 말고.’

단천은 가장 먼저 바닥에 물구나무를 짚고 서서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주어진 신체의 근력은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열 손가락으로 하던 팔굽혀펴기가 점점 손가락이 줄어들었다.

> ???

> 가볍게 한대매 ㅋㅋㅋ

> 아니 이 사람 수행능력 무엇;;

종말 생존자에서 주어지는 플레이어 캐릭터의 신체능력은 꽤 좋은 편이다. 하지만 신체능력이 좋은 것과 균형 감각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물구나무를 서서 팔굽혀펴기를 한다는 것은 높은 균형감각을 필요로 한다.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체에 제대로 적응하지도 않은 상태로 할 수 있는 기예가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이런 반응은 BJ천마의 방송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한정되는 일이었다.

> 뭐 별 것도 아니구만

> 뉴비들ㅋㅋㅋ천마님 처음 보냐 ㅋㅋㅋㅋ

BJ천마의 방송을 오래 봐 온 예비 천마신교도들 입장에서는 BJ천마의 저런 컨트롤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BJ천마의 컨트롤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으니까.

[근력 능력치가 올라갑니다.]

[건강이 유지됩니다.]

“별 것 아니다. 너희도 연습만 하면 충분히 다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단천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단천은 그 이후로도 벽의 부스러기들을 잡고 움직이는 클라이밍, 방공호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파쿠르 등을 한참 한 후에야 운동을 멈췄다.

[스테미너가 소진되었습니다.]

[운동능력이 급격히 저하됩니다.]

“···고작 이 정도로 헉헉거리다니. 몸뚱아리하고는.”

> 누가 들으면 실제로는 저렇게 운동할 수 있는줄 알겠어요;

“고작 이 정도도 할 줄 모르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 저런 걸 해야 살 수 있는 세상이 있다면··· 그냥 죽겠습니다···.

단천이 지금까지 한 운동들은 실제의 단천 입장에서는 몸풀기도 되지 않는 운동이었다. 물론 시청자들이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었지만.

운동을 끝낸 단천은 땀을 가볍게 닦아냈다.

“운동도 끝났으니. 이제 짐을 싸야 한다.”

> 근데 여기서 그냥 존버하면 안 됨?

> 안 돼

> 왜?

“한파가 오니까.”

지금 단천이 있는 대학은 서울 어딘가에 있는 가상의 대학이었다.

한파가 오면 서울 지역은 극한의 추위에 몰리게 된다. 자연스레 먹을거리가 부족해질 가능성도 크다.

그러니 남쪽으로 이동할 수 있는 채비를 갖춰야 한다.

단천은 가방을 찾아 능숙하게 짐을 꾸렸다. 음식들을 꾸려 넣고, 침낭 등을 네 명의 짐에 나누어 담는 단천의 움직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런 짐을 꾸리는 일은 혈귀대 시절에도 수없이 해 왔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 이사람 이 겜 처음인 거 맞음?

> 왜케 짐 잘 싸;;

> 군필인가보지

> 아니 군필이고 말고간에 저 공간활용이 말이 되냐?

> ㄹㅇ 군장 싸는게 특전사급인데

> 현직 특전사입니다. 저희 에이스들도 저정도론 못 쌉니다;;

보급받기가 비교적 수월한 데다가 현대화된 물품들이 넘쳐나는 특전사들이 군장을 싸는 것과 거지같은 물건들을 어떻게든 구겨넣어야 하는 중원에서의 군장능력이 같을 리가 없었다.

실제 특전사들조차도 혀를 내두를만한 공간창줄을 통해 단천은 물건을 하나하나 싸 넣었다.

“이 정도면 되겠군.”

실로 군장의 극의이라고 할만한 군장능력을 보여준 단천은 짐을 직각으로 만들기까지 한 다음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근데 구태여 짐을 직각으로 싸는 이유는 뭐임?

> 몰?루

짐을 싸고나서는 할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바닥에서 수면을 취하는 일행들의 몸에 욕창이 생기지 않게 뒤집어주고, 운동을 하고, 수련을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26일차입니다.]

[방사선 낙진이 잦아들었습니다.]

“그보다. 판하오 쪽은 잘 살아남아 있나?”

> 지금 파밍 겁나하는중임

> 후원금 50만달러 돌파했더라;

> 미쳤음 성장세

단천의 기부금은 여전히 만 달러 단위에서 멈춰 있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기초 생존배율은 BJ천마쪽이 압도적으로 높다.

하지만 생존 포인트의 대부분은 대외활동에서 생겨난다. 실내에서 버틸 수밖에 없는 BJ천마와는 달리 판하오쪽은 바깥을 돌아다니면서 파밍과 생존을 계속하고 있다.

게다가 후원금에서도 차이가 난다. 운동을 할 때에는 어느 정도 후원이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결국 그래 봤자 실내 활동이다. 나올 수 있는 후원금에는 한계가 있다.

5배가 넘는 수치의 기부금 차이. 어쩌면 승부가 결정됐다고 봐도 될 만한 차이였다.

하지만. 단천은 포기한 표정이 아니었다. 멀리 떨어진 경쟁자를 보는 시선이 아닌, 사냥할 만한 사냥감을 발견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을 뿐.

“뭐. 이 정도는 돼야 쫓는 맛이 나지.”

[목소리뭐야 님이 $100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표정 뭐야···.]

그리고 핵폭탄이 떨어지고 28일차.

[28일차.]

[방사능 낙진이 종료되었습니다.]

[다음 종말을 대비하십시오.]

기기긱!

굳게 닫혔던 방공호의 문이 한 달만에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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