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천마-167화 (167/212)

38. 종말 선물 세트 (4)

[‘핵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방사선이 세계를 뒤덮고 있습니다.]

핵전쟁이 시작됐다는 메시지와 함께 방공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으아앗!”

바닥에 엎드리는 두 명과 달리 단천의 몸은 평온했다. 우보牛步를 사용해서 무게중심을 똑바로 잡은 탓이다.

“바닥이 흔들린다고 쉬이 엎드리면 상대방의 기습에 당하기 쉽다.”

> 아니 세상이 멸망하고 있는데 기습이고 자시고가 어디 있어요

> 갈!! 모든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 무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더냐!!

단천은 바닥에 엎어진 두 명을 붙잡은 다음 방공호의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입구는 차폐막이 하나뿐이기 때문에 방사선에 노출될 확률이 올라간다. 할 수 있는 최대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최선이다.

안까지 들어서자 청연이 머리에 모포를 덮고 책상 아래에 숨어들어가 있었다.

일반인이 봤다면 완벽하기 그지없는 대비라고 했겠지만. BJ천마는 일반인이 아니었다.

“무인의 마음가짐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만.”

“애초에 저는 대학생이지 무인이 아니에요.”

“그건 네 생각이고.”

단천은 겹겹이 쌓인 문을 걸어잠궜다. 흔들림이 멎고 나자 그제서야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방공호에 들어온 두 사람은 40줄에 들어선 남자 두 명이었다.

둘은 꾸벅 인사를 한 다음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들여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한국대 바이러스 항체 연구소의 소장인 이중한입니다.”

“부소장인 김용태입니다.”

“저는 청연이에요. 검도부 부장이었고, 체대 출신입니다.”

“천마다.”

연구자 두 명에 검도부 주장 한 명에 천마 한 명이라. 두서없는 조합이다.

> 천마님만 없어도 그냥 평범한 종말 파티인데?

> 천마가 끼어 있으니까 파티가 이상해지지 ㅡㅡ

> 천마님이 거기서 왜 튀어나옴?

“핵폭발로 인한 흔들림은 다소 멎은 것 같은데. 이제 나가 봐도 되는 건가?”

“일단 방사능 낙진이 가라앉을 때까지는 4주 정도가 걸립니다.”

4주라는 말에 단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4주?”

“대충 그 정도는 됩니다. 되도록이면 더 오래 버티는 게 좋긴 하지만 영원히 이 안에서 살 수는 없으니까요.”

“식료품의 양은 얼마나 있지?”

“네 명이서 1주일 정도 끼니를 떼울 정도뿐입니다.”

> 버티기 조졌네

> 2명이면 대충 버틸 수 있었을 것 같은데

> 4명 되니까 식료품이 절반이지 뭐

> 아껴 먹으면 되지 않음?

> 아껴 먹으면 그만큼 체력이나 행동능력 패널티를 받으니까.

> 그냥 핵전쟁만 있으면 버티기만 하면 되는데; 다음 종말도 대비해야 되잖아

[피로도가 높습니다.]

[수면을 취해야 합니다.]

채팅창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보다는 자야 할 때다.

“일단 어떻게 버텨야 할 지에 대한 내용은 자고 난 뒤에 이야기하도록 하지.”

반론은 없었다. 청연은 BJ천마의 리더십을 본 상태고, 들어온 두 연구소 직원은 단천이 들여보내 준 덕분에 살아남았으니까.

은연중에 리더로 인정받은 것이다.

물론 인정을 못 받았다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결정권을 받았을 테지만.

수면실에 들어가서 눕자 선택지가 떠올랐다.

[매우 안전한 장소에서 수면합니다. 불침번을 불필요합니다.]

[수면하시겠습니까?]

“수면한다.”

[수면 상태에 접어듭니다.]

[첫 날의 포인트를 정산합니다.]

수면을 취하자마자 떠오르는 포인트 정산.

[난이도 - 최악의 난이도 선택으로 포인트 지급량이 상승합니다.]

[첫 날 - 첫 번째 날을 생존했습니다. 날짜가 지날수록 포인트가 가산됩니다.]

[생존자 수 4명 - 추가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좀비 도살자 - 100마리 이상의 좀비를 처치했으므로 추가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포인트 결산 : $43,223]

[$43,223이 기부금에 가산됩니다.]

> 와 하루로 4만3천달러나 기부금이 들어감?

> 진짜 화끈하게 쏘긴 하네;

> ㄹㅇ 마지막날까지 살아남으면 기부금 다 쓸어먹겠는데??

> 되겠냐 ㅋㅋㅋㅋ 종말이 몇 개나 남았는데

기부금의 높은 수치에 시청자들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기부금은 마음이 중요하다. 하지만 마음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기부금액이다. 어쨌거나 연말 기부 이벤트도 하나의 이벤트고, 기부금액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4만달러라. 나쁘지 않군.”

[현재까지 누적 기부금 : $50,073]

> 하루로 5만달러 실화냐 ㄷㄷㄷㄷ

> 판하오 쪽은 기부금 얼마 쌓임?

> 3만달러 겨우 쌓았던데?

> ㄷㄷㄷ 미쳤네

판하오는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의 시청자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 알게 모르게 인화 측의 지원도 있을 터.

그런데도 2만달러나 앞서는 수치의 기부금을 기록했다.

물론 이 수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뒤집어질 가능성이 충분히 컸다. 방사능 낙진이 꽤나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종말 생존자와는 달리 생존투쟁은 방사능 낙진이 거의 묘사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부금의 수치가 벌어졌다는 것은 ‘충분히 해 볼 만하다’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사람들이 가지게 만들었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

[종말 두 번째 날.]

[기상했습니다. 피로도 수치가 내려갑니다.]

[방사능에 소량 피폭되었습니다. 체력이 다소 내려갑니다.]

방사능에 소량 피폭되었다는 이야기에 단천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어제 피한다고 피했는데도 소량의 방사능이 몸을 스친 모양이다.

“뭐, 어쩔 수 없지.”

무공 수련이 가능하다면 상단전을 개방하고 환골탈태를 거치면서 신체를 재활성화할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이 게임에 그런 부분이 만들어져 있을 리 만무했다.

그나마 소량 피폭되어서 다소간 체력 수치가 낮아졌다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전부다.

몸을 일으킨 단천은 수면실을 둘러봤다. 수면실에는 단천 혼자뿐이었다.

“쯧. 남들보다 기상이 느리다니. 나태한 몸뚱아리 같으니라고.”

자신이 플레이하고 있는 몸뚱아리에 대한 디스를 한 단천은 몸을 일으켰다.

대피소 중앙에는 이미 세 명이 모두 모여 있었다.

“다들 몸 상태는?”

“괜찮습니다.”

“코피가 살짝 나긴 했지만···. 괜찮습니다.”

“식량 이야기를 다시 해 봐야겠군”

“식량 말씀이시군요. 방금 확인해 봤는데. 보관 상태가 좋지 않은 식량이 꽤 많이 섞여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지?”

“아껴 먹어도 나흘, 닷새 정도면 바닥날 것 같습니다.”

닷새라. 방공호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인 4주에는 턱없이 모자란 수치다.

“제 생각으로는 최대한 버티다가 한 명이 방호복을 입고 나가서 식량을 구해오는 쪽이···.”

세 명이 대화를 나누거나 말거나 단천은 방공호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음식을 제외하고도 이런저런 생존에 필요한 물건들이 갖춰져 있다.

“말도 안 돼요. 그냥 기다리면서 구조를···.”

“구조가 어디서 온다는 겁니까? 세상 전체에 핵이 쏟아졌을 겁니다! 구조같은 건 오지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방사선이 있는 곳에 사람을 내보낸다는 건 말도 안 돼요!”

“나가야 된다면 제가 나갈게요.”

단천이 돌아보고 있는 사이에도 언성은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었다.

“쯧.”

어차피 지금 있는 식량의 양은 턱없이 부족하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최악의 선택지뿐이다.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단천은 수색을 계속해 나갔다. 방호복도, 옷도 싸구려일지언정 구비돼 있다.

그리고 옷이 구비돼 있다면 당연히 있을 물건.

“···여기 있군.”

단천은 옷 사이에 끼어 있는 봉재용 키트를 찾아냈다.

“감독님. 딴짓 하지 말고 여기 와서 이야기 좀 해요. 거길 뒤진다고 먹는 게 나오기라도 해요?”

“해결법은 종종 다른 곳에서 나오는 법이지.”

“손에 들린 건 뭡니까?”

“지금 문제에 대한 해답.”

단천은 봉재용 키트에서 ‘답’을 꺼내들었다.

“바늘이 지금 상황에 어떻게 도움이 된단 거에요?”

단천은 바늘을 바라봤다. 이 정도면 충분히 혈도를 찌를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소독할 만한 거 있나?”

“알코올 솜이 있긴 합니다만.”

부소장인 김용태가 알코올 솜을 찾아 꺼냈다. 단천은 솜 키트를 뜯어서 바늘을 깨끗하게 닦았다. 이 정도면 감염 확률은 없을 것이다.

“근데 바늘이 어떻게 지금 상황에서의 해답이 된다는 겁니까?”

“목을 왼쪽으로 젖혀 보도록.”

“갑자기요?”

김용태는 별 의심 없이 고개를 왼쪽으로 젖혔다. 단천은 바늘을 들어 김용태의 목에 바늘을 조준했다.

“가만히 있도록.”

“침을 놓으려는 겁니까?”

“그렇다.”

“하. 침술이라는 것은 전형적인 플라시보 효과입니다. 그런 바늘같은 걸 찌른다고 무슨 일이 벌어질 리가 없···.”

푹!

풀썩!

폴라리스 효과인지 뭔지를 재잘거리던 김용태가 바닥으로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져내렸다.

“뭐, 뭐야!”

“침술.”

지금 찍은 혼절혈은 단천이 개발한 혈도 중 하나다. 처음 이 혈도의 필요성을 체감했던 것은 혈귀단 시절 포위당해서 먹을 음식이 남아나지 않았던 때였다.

당시 혈도를 공부하고 있었던 단천이 찾아낸 혈자리.

─ 단주. 먹을 것이 거의 바닥났소. 이제는 죽든 살든 나가서 한 판을 붙을 수밖에 없을 것 같소. ···뭐. 이 빌어먹을 동료놈들과 함께라면 지옥에 가도 후회는 없겠···.

─ 새로 개발한 혈도가 있다니? 지난 번에 남혁이 단주의 혈도를 맞고 일주일간 사경을 헤멘 걸 잊었단 말이오? 단주에게는 의학의 재능이 없···! 끄아아악! 놔! 놔라! 놔아아아! 차라리 전장에서 죽게 해 줘!

─ 아악! 여기가 아닌 것 같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아아아악! 대체 어딜 찌른 거야! 빌어먹을 자식아! 놔라! 놔! 놔아아아아!

서윤학을 붙들고 대략 백여 번의 실수를 반복한 끝에 찾아낸 것이 바로 이 ‘혼절혈’이었다.

혼절혈을 개발하는 중에 단천에게 시침을 맞지 않겠다는 필사즉생의 각오로 뛰쳐나간 혈귀단 때문에 많은 생체실험은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결국 생체실험으로 남은 지식이 이렇게 쓰이게 됐다. 역시 사람 일은 모를 것이다.

‘아마 저 하늘의 별이 된 서윤학도 만족스러워하겠지.’

단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윤학의 희생에 잠시 묵념했다.

“자. 다음 사람. 나오도록.”

바닥에 쓰러진 김용태는 벌써부터 안색이 창백했다. 마치 겨울잠에 빠진 개구리와 같은 모습이다.

“주, 죽었어!”

“죽은 게 아니다. 그렇게 보일 뿐이지. 혼절혈은 인간을 강제적으로 가수면으로 들게 만드는 혈도다. 사흘에 한 번 정도 최소한의 식생을 통해서 버틸 수 있지.”

이중한이 김용태의 호흡을 확인한 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심장이 뛴다. 느리기는 하지만. 호흡도··· 옅지만 하고는 있고.”

“안심이 된다니 다행이군.”

“그보다 이거. 부작용은 없는 겁니까?”

“잘 모른다. 본좌가 스스로 당해본 적은 없거든.”

“잘 모른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

이중한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단천이 이중한의 몸을 향해 덮쳐들었기 때문이다.

“아, 안 돼!”

“돼.”

일평생 연구실에서 연구만 해 온 중년의 남성이 VR게임에서 독보적인 피지컬을 가지고 있는 인간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푹!

풀썩!

순식간에 바닥에 쓰러진 두 명. 단천은 마지막으로 남은 청연을 바라봤다.

“······.”

청연은 잠시 쓰러진 두 명을 바라보더니 얌전히 목을 내놓았다.

“현명하군.”

“뭐. 감독님을 믿으니까요.”

“그래. 본좌만 믿으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다.”

단천은 마지막으로 청연의 목을 찔렀다.

풀썩.

단천은 바닥에 쓰러진 시체 비스무리한 세 명의 남녀를 질질 끌어다 수면실에 넣었다.

> 암만 그래도 짐짝 취급은 너무하지 않냐?

> 새삼 짐짝 취급이 아니라 처음부터 짐짝 취급 아니었음?

> 그건 맞지;;

세 명은 가수면상태에 들어섰다. 주기적으로 음식을 준다면 최소한의 영양 섭취만으로 버텨낼 수 있다.

이 영양섭취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한 명이 호법을 설 필요가 있었다.

혈도를 주기적으로 누르고 음식을 줄 수 있는 사람.

거기에 자신의 식생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

“···결국 본좌가 호법을 설 수밖에 없다는 거지.”

단천은 가부좌를 튼 채 호흡을 시작했다.

‘귀식대법은 영 하기 싫은데.’

귀식대법.

호흡조절과 의식조절로 몸의 신진대사를 최소화하는 호흡법이 단천의 몸에서 이루어졌다.

서서히 맥박과 호흡이 느려졌다. 거의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있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호흡과 맥박이 느려졌을 즈음. 단천의 의식도 반쯤 수마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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