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종말 선물 세트 (2)
그어어!
해동관에서는 좀비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척 봐도 꽤 많은 숫자의 좀비들이 몰려들어 있다.
[종말 ‘핵전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 좀비들 너무 많지 않냐?
> ㄹㅇ
> 아니 별 거 없다는데 대피소로 가지?
> 빨리 대피소 안 가면 죽어요;;
핵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리에 채팅창이 다급해졌다. 학교에 존재하는 대피소까지의 거리가 꽤나 먼 까닭이다.
“어차피 시간도 얼마 안 걸린다.”
단천은 청룡언월도를 꺼내들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공을 쓸 수 없는 다수대 1의 상황에서는 검보다는 창이 더 편하다.
괜히 여포나 관우가 창을 쓴 것이 아니다. 둘은 방천화극과 청룡언월도를 쓴 덕분에 내공 없는 일반인에 불과한데도 꽤 짭짤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단천의 언월도가 해동관의 입구에 있는 좀비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좌에서 우로 그어지는 깔끔한 일격.
슈팍!
단 일격에 입구를 막고 있는 좀비들의 목이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 뭔데 이거
> 저게 저렇게 쉽게 되냐?
> ㅁㅊㄷ;;
> 어케 한거임? 이게 된다고??
종말 생존자를 플레이해본 시청자들 사이에서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 터져나왔다. 그들도 위험한 상황에 창을 사용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목뼈는 생각보다 단단하다. 일반인의 근력으로는 여러 명의 목을 한 번에 갈라낼 수 있는 힘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쉽다. 목 뼈의 사이를 노리면 간단하다. 상식이지.”
> ?
“뭐가 물음표냐. 뼈를 가르려고 하면 그만큼 힘들지만 그 사이는 연골과 살뿐. 가르기가 훨씬 쉽다. 요령만 알면 간단한 일이지.”
> 전혀 안 간단해 보이는데요
> 오랜만에 밥 아저씨 출격했네
> 간단해요 ^^(하나도 안 간단함)
자신들의 노력 부족을 실력 탓을 하는 시청자들을 무시한 채 단천은 바로 달려올 좀비들을 대비했다.
하지만 좀비들이 몰려들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더 달려드는 좀비들은 없었다.
“이상하군.”
> 이상할 거 없음
> 소리 안 나고 조용하게 처치해서 그럼
> 좀비가 소리에 반응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만?
“그런 상식이 어디 있는데.”
애초에 좀비라는 것은 가상의 존재들이다. 놈들이 소리에 반응하는지 안하는지는 상식이 될 수 없는 것이다.
> 천마님이 평소에 말하는 상식들보다는 훨씬 상식같은데요
> ㅇㅈ
> ㅇㅈ합니다
[인정맨 님이 $3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ㅇㅈ합니다.]
수없이 이어지는 ‘ㅇㅈ’의 향연에 단천은 실눈을 뜬 채 놈들의 아이디를 하나하나 기억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좀비 놈들이 소리에만 반응한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간단하겠군.”
단천은 소리가 나지 않게 걸으며 해동관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워어어!
덜컹. 덜컹.
덜컹거리는 소리는 지하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소리 방향으로 눈에 띄게 몰려있는 좀비들.
> 저쪽은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 파밍 할 거면 좀비 적은데서 하셈
채팅창에서는 아직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다른 곳으로 가라고 아우성이다.
BJ천마의 몸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향해 일정한 걸음걸이로 움직였다.
그리고, 발걸음 한 걸음마다 청룡언월도가 빛을 내뿜었다.
서걱!
서걱!
한 번의 공격마다 낙엽처럼 쏟아지는 좀비들의 머리통.
푸화악!
털썩!
피분수가 튀어오르고 좀비들의 몸이 쓰러져내린다.
하지만 좀비들은 단 하나도 BJ천마를 공격하지 않았다.
BJ천마의 창이 쓰러지는 좀비들의 몸이 벽을 향하도록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왜 굳이 벽으로 쓰러지게 하는 거임?
“아무래도 바닥에 쓰러지는 것보다는 벽에 미끄러져 쓰러지는 쪽이 소리가 덜 나겠지. 이 또한 상식이다.”
> 대체 어느 세계 상식인데.
> 무협에서는 상식입니다만??
> 역시 천마님이시다 이말이야;;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도 모르는 21세기인들을 보며 단천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단천이 수십 마리의 좀비를 처치했는데도 좀비들은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좀비들이 반응하기 위한 최소역치인 소리가 나지 않은 까닭이다.
> 좀비들이 걍 반응 안 하는데?
> 버그 아니냐?
> 아니 그냥 하는 짓 보고 눈 피하는 거 같은데?
> 야 ㅋㅋㅋ쫄았냐?? 눈 보라고 ㅋㅋㅋㅋㅋ
> 창 날리는 거 보면 눈 피할만도 하지 ㅋㅋㅋㅋ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좀비가 몰려드는 매커니즘은 거의 비슷하다.
좀비와의 전투를 하면 소리가 나고, 이 소리가 다른 좀비를 부른다.
그러니 좀비를 처치하는 대신 도망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는 게임 디자인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BJ천마의 창놀림은 이런 게임 디자인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좀비를 처리하면 도망칠 필요가 없다.”
[개발자오열 님이 $500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이딴 식으로 게임하면 개발자는 뭐 먹고 사냐?]
[하인라인개발자 님이 $ 400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BJ천마님 제발 다른 게임사 게임만 해 주세요···.]
> 게임사 최고의 적 BJ천마
> 하인라인에 친구 있는데 BJ천마라면 학을 떼던데
> ? 하인라인은 왜? 주가 엄청 올라갔잖아;;
> 생명을 빨아가고 주가 올려줬다고 그러더라
> 배가 불렀네 ㅉㅉ
하인라인사의 개발자들이 얼마나 배가 불렀는지에 대한 억울하기 그지없는 성토가 이어지고 있는 사이에 BJ천마는 소리의 진원지에 거의 다가가 있었다.
촤아아악!
마지막으로 소리가 나는 곳 앞에 있던 좀비들을 베어내자 주변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그저 소리가 나는 것은 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문 뿐.
덜컹. 덜컹.
단천은 덜컹거리는 지하실의 문을 바라봤다. 바깥에서의 빗장은 걸려 있지 않다.
그렇다는 건 저 쪽에서 문을 걸어잠궜다는 뜻이다.
“문 열어라.”
문 너머에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구태여 시간을 더 끌고 싶지 않았기에 단천은 검을 뽑아들고 문 사이를 베어갈랐다.
카가가각!
불꽃이 튀어오르며 문 사이에 작은 틈새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틈새 사이로 언월도가 들어갔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말도 안 돼.”
문 너머에 있는 것은 대학생쯤 되는 나이로 보이는 여자였다. 몸은 피투성이에. 검을 들고 있다.
난리통에 여기저기 구르고 다친 모양인지 몸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두 눈만이 타오르듯 생기가 있을 뿐.
“좀비들은?”
“다 처리했다.”
단천은 문에서 한 발 비켜났다. 여자가 문 너머에 있는 피바다를 보더니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다시 지어보였다.
“어떻게 한 거죠? 좀비가 백마리는 됐을 텐데.”
“언월도로 벴다.”
“···검도 유단자에요?”
“고작 검도 유단자가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이런 일이 가능한 사람이라면···.”
“그래. 하나뿐이지. 본좌는 천마다.”
“천마? 이름이 천마에요? 새로 부임한다던 검도 감독님이군요?”
“······.”
단천은 순간적으로 눈 앞에 있는 여자를 베어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보다. 여기에는 왜 혼자 남은 거지?”
“해동관에 좀비들이 몰려들었거든요. 부원들이랑 도망치는데, 한 명이 목숨을 버려서 미끼가 돼야 했어요.”
“네가 미끼가 됐단 말이군.”
“제가 검도부 주장이거든요. 제가 소리를 내서 좀비들을 지하로 모으고, 그 사이에 부원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었어요.”
“요새 주장은 그런 것까지 해야 하나?”
“그러니까 주장인거죠. 마지막 라운드에 승리를 가져온다. 제일 먼저 일어나고 제일 먼저 잔다. 힘든 부원이 있으면 함께 끝까지 한다. 좀비가 나타나면 자신을 희생한다. 상식이잖아요.”
> 상식 아니야 ㅋㅋㅋㅋㅋ
> 거의 천마님의 상식이랑 비슷한 수준의 상식인데??
> 상상 이상의 미친년이 나타났다
“아. 자기 소개를 안 했네요. 제 이름은 청연이에요.”
“본좌의 이름은···.”
“천마. 소속은 검도 감독님. 다 알았어요.”
설명하기에 귀찮았기에 단천은 그러려니 하기로 마음먹었다. 애초에 세상이 망한 곳에서 이름도, 지위도 별 의미가 없기도 했으니까.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 그뿐이다.
“그보다 그 눈. 좀 어떻게 안 되나?”
“눈이요?”
“네 눈을 이야기하는 거다.”
“제 눈이 왜요?”
“세상이 망했다. 본인이 희생해서 죽었다. 그런데도 확신 가득한 눈을 하고 있는 게 맘에 안 든다.”
“별게 다 맘에 안 드시네요. 그리고 안 죽었어요.”
“운이 좋았던 거지. 죽은 거나 다름없다. 내가 없었다면 일백 퍼센트 죽은 거였고.”
“하지만 살았죠?”
> 강적이다 ㅋㅋㅋㅋ
> 한 마디를 안 지네 ㅋㅋㅋㅋ
단천은 청연의 눈알을 바라보며 얼굴 가득 짜증을 보였다.
자신이 희생해서 죽기 직전까지 갔는데도 눈알에 확신과 신념이 가득가득 흘러내린다.
단천이 중원에서 가장 띠꺼워하는 부류. 소위 정파에서 대협大俠이라는 소리를 듣는 종류의 인간들이 저런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믿는 신념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미친 놈들이 저런 눈을 한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정신을 차릴 때까지 정신교육을 하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다.
[해가 완전히 졌습니다.]
[수면할 장소를 확보하십시오!]
[불침번을 설 다른 사람을 찾으세요!]
[‘핵전쟁’까지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습니다! 버텨낼 방공호를 찾으십시오!]
“나오도록. 시간 없다. 곧 핵폭탄이 떨어질 거다.”
“핵폭탄도 떨어져요? 좀비에, 핵폭탄에, 대체 무슨 난리인지. 누가 악의적으로 세상을 이 모양으로 만들기라도 한 것 같네요.”
> 그거야 천마님이 종말 옵션을 다 선택해서···
> 이 모든 일의 원인 ‘BJ천마’
> 솔직히 천마님 아니었으면 옵션 네다섯개정도는 더 선택해도 됐다 ㅋㅋㅋㅋ
“핵을 피할 만한 장소. 아는 곳 있나?”
그냥 무작정 찾는 것보다는 이곳에서 대학 생활을 해 본 청연에게 길 안내를 맡기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일종의 네비게이션이다.
“학교 내부에 방공호가 여기저기 설치돼 있긴 해요. 많은 건 아니지만.”
“제일 가까운 방공호는?”
“음. 아마 자과대 쪽에 방공호 비스무리한 게 하나 있던 걸로 기억해요.”
“거리는?”
“대략 5,6키로 정도 될 걸요?”
거리가 꽤 멀다. 경공을 쓸 수 있는 몸이라면 금방 갈 수 있겠지만 지금 단천의 몸은 경공을 쓸 내공이 존재하지 않는다.
핵이 떨어지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까지 달고 가기에는 위험한 거리 같은데.”
“혹이요? 제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렇다.”
> 여기서 솔직하게 말하면 어떡해 ㅋㅋㅋㅋ
> 할 말은 한다 천 카 콜 라
> 인성 수준 ㅋㅋㅋㅋ
> 세상이 망했는데 인성이 어딨어ㅋㅋㅋㅋ
청연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입을 다시 열었다.
“먼가요? 오토바이 타면 금방인데.”
“오토바이?”
“네. 오토바이.”
청연이 호주머니에서 짤그락거리며 열쇠를 꺼내들었다. 오토바이 열쇠였다.
주운 혹이 때마침 오토바이를 운전할 수 있는 혹이라니.
“운이 좋군.”
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방금 저보고 오토바이 운전할 수 있는 혹이라고 생각했죠?”
“그렇다.”
“······.”
> 사실적시만을 하는 것. 그것이 천마의 길···
> 천마님한테 입 발린 말 기대 ㄴㄴ
청연이 불만스러운 얼굴을 보였지만 어쩌겠는가.
꼬우면 본인이 생명의 은인을 했어야 하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