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종말 선물 세트 (1)
[종말이 임박했습니다!]
[종말이 임박했습니다!]
[종말이 임박했습니다!]
[종말이 임박했습니다!]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울려대는 메시지에 단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거 참. 한 번만 말하면 알아듣는 것을. 몇 번이나 말을 하는 건지.”
> 니가 죄다 골라놨으니 그런 거잖아 ㅋㅋㅋㅋ
> 아니 두세개 정도만 하라니까;;;
> 야 어쩌냐 게임 시작 10분컷 당하겠는데
> 종말 뭐뭐 골랐음?
> 핵전쟁, 해일, 운석충돌, 좀비 아포칼립스··· 걍 다 골랐음
> 새해맞이 종말 선물 세트냐고 ㅋㅋㅋ
채팅창의 비관적인 전망을 보고 있을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단천은 주변을 둘러봤다. 단천이 있는 곳은 학교 안이었다.
> 맵은 학교 걸렸네
> 그나마 다행이네;
“학교라. 꽤 오랜만에 와 보는 기분이군.”
단천은 학교를 오래 다니지 못했다. 몸이 아팠던 탓에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둔 까닭이다. 중원에서야 학교 비스무리한 곳에 가 본 적도 없으니 학교는 단천에게 있어서 생소한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교실 구석에 있는 TV에서 음성이 반복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계 전역에 알 수 없는 역병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건강에 유의하시면서 집 안에서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 세계적 역병? 이거 완전···읍읍!
> 근데 뭔 역병임?
어느 시청자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은 금방 나왔다.
그워어어어.
교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짐승과 같은 울음소리.
“좀비 바이러스겠지.”
단천은 귀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 층에만 십여 마리의 좀비들이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이 복도에서 길을 가로막고 있는 상황.
평범한 플레이 상황이라면 천천히 전진하는 게 정답이지만. 지금은 평범한 상황이 아니었다.
언제라도 추가적인 ‘종말’이 닥칠 수 잇는 상황인 것이다.
[교실을 빠져나와 학교 건물을 빠져나오세요!]
[기부금 가산 + $1,000]
[빨리 탈출하세요! 1초마다 기부금이 $1씩 줄어듭니다!]
거기에 빠르게 빠져나갈수록 기부금이 높게 책정된다.
일종의 미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최대한 빨리 빠져나간다.”
> 근데 무기가 없잖아
무기야 만들면 된다. 단천은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테이프를 집어들었다.
우드득!
단천은 교실 뒤에 있는 막대걸레들을 부러뜨렸다. 네 자루의 막대걸레의 모가지를 부러뜨리자 썩 괜찮은 길이의 곤봉이 됐다.
단천은 곤봉 한 자루를 손에 쥐고, 나머지 곤봉을 등 뒤에 테이프로 묶었다.
탈출 준비를 하는데도 실로 전광속도와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이제 빠져나가지.”
말을 마친 단천은 뜀박질을 시작했다.
> ㄱㄱㄱ
> 근데 그쪽은 문이 아닌데요?
BJ천마가 지금 뛰어가고 있는 곳은 문 방향이 아닌 창문 방향이었다.
지금 있는 교실은 5층 높이나 되는 곳이다. 게다가 바닥은 통짜 콘크리트다. 어떻게 떨어져도 크게 다칠 수밖에 없는 상태.
하지만 단천은 밖을 향해 주저 없이 몸을 날렸다.
파앗!
몸을 날리는 동시에 창문에 달려 있던 커튼을 붙잡아 1차적으로 감속한다.
우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튼이 뜯겨져 나왔다. 단천은 커튼을 손에서 놓은 다음 바로 봉을 고쳐잡고 바닥을 향해 봉을 꽂아넣었다.
우드드득!
나무로 된 마대자루가 부러지면서 한번 더 충격이 흡수된다. 마대자루가 부러지기 시작하자마자 단천의 몸이 낙법을 준비했다.
착!
흡수되고 남은 충격까지 완전히 없애 버리는 완벽한 낙법이었다.
“쉽군.”
> ??
> 이게 뭐임 ㅋㅋㅋㅋㅋㅋ
> 3단낙법 지렸다 ㅋㅋㅋㅋㅋ
> 아니 좀비들 어떻게 돌파하나 두근두근했는데 내 기대감 어쩔거임
> 좀비 돌파보다 이게 훨씬 쩌는데??
> 학교 안 디자인했던 개발진들 피눈물 ㅋㅋㅋㅋ
[학교 건물을 빠져나왔습니다!]
[사용 시간 : 5초]
[$995가 기부금에 가산됩니다!]
> ㅋㅋㅋㅋㅋㅋ미친 ㅋㅋㅋㅋㅋㅋㅋㅋ
> 건물 탈출 5초컷 실화냐 ㅋㅋㅋㅋㅋㅋㅋㅋ
> 아니 뭔 개소리에요 좀비 가득한 학교건물을 어떻게 5초만에 돌파해
[미션맨 님이 $50를 기부해 주셨습니다.]
[예술점수 50점 추가로 드립니다.]
[당신은 학교 건물을 빠져나왔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생필품을 확보한 후 탈출하세요!]
“생필품?”
학교는 여러 가지 생존을 위한 물건들이 많이 구비되어 있는 장소다. 많은 학생들이 하루종일을 보내는 곳이니만큼 당연한 일이다.
> ㅇㅇ 생필품
> 근데 뭐가 필요하냐? 좀비 아포칼립스에 운석 떨어지고 해일 오고 아무튼 앞으로 넘어갈 산이 산더미인데
> 그러게ㅋㅋㅋㅋ 뭐가 있어도 부족함 ㅋㅋㅋㅋ
종말 생존자의 시작점인 ‘학교’에서 탈출을 하면서 확보해야 하는 생필품은 종말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혹한’의 경우에는 옷이. 운석 충돌의 경우에는 식료품이 필요한 식이다.
옷을 파밍하고 싶다면 학교 안에 있는 생활용품점을, 식료품이 필요하다면 음식 저장고를 털면 되는 식이다.
>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곳에서 다 파밍을 하고 가는 건 불가능함.
“왜지?”
> 일정 시간 지나면 재난으로 파밍 장소가 완전히 사라져 버림
이를테면 지금 상황은 생존에 필요한 단 하나만을 정해서 가져가라는 상황.
개발진이 강요하는 선택지인 것이다.
> 빨리 고르자
> 뭐가 제일 필요하냐?
> 살기 위해서 제일 필요한 걸 골라야됨
단천의 눈이 감겼다. 지금 자신은 수없이 많은 종말 앞에 서 있었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할 필요도 없군.”
단천의 눈이 뜨여졌다.
“검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지?”
> ?
> 김이라고 한 거임?
> 검. 검이라고 했음
> 검을 왜 여기서 골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무인은 검 한 자루만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다. 내 물건을 빼앗으려는 놈들에게서 스스로를 지킬 수도 있지.”
> 음식 없으면 어케 삼?
“검을 써서 음식이 있는 놈에게서 빼앗으면 된다.”
> 옷은?
“검으로 옷을 입고 있는 놈에게서 강탈하면 된다.”
> 그냥 노상강도잖아 ㅋㅋㅋㅋㅋㅋ
> 세상이 망했는데 강도가 세상에 어딨냐?
> 종말에 적응이 너무 빠르신데요?
> ? 적응 하나도 안했는데?
> 평소 천마님 그대로인데?
> 존재 자체가 포스트 아포칼립스 ㅋㅋㅋㅋㅋ
채팅창이 BJ천마가 종말에 적응한 것인지 종말이 BJ천마에게 적응한 것인지를 두고 의견교환이 활발하게 개진되는 사이, 단천은 지도에 보이는 검도부를 향해 뛰어나갔다.
***
“학교가 꽤나 넓군.”
검도부에 도착하기까지 뛰어서 10여분이 걸렸다. 단천이 지금 있는 학교의 크기는 일반적인 학교의 몇십 배는 되는 크기였다.
> 설정상 초중고대가 붙어있는 부설학교라서 그럼
> 거점지역으로 쓰기에 꽤 괜찮은 지역으로 알고 있음
> ㅇㅈ
이 정도 크기라면 꽤 큰 규모 이상의 문파도 넣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으니.
“일단. 이 세계에서의 천마신교 본부는 이곳으로 정해둘까.”
> 누구 맘대로
> 천마님 맘대로지
> 꼬우면 덤비시던지 ㅋㅋㅋㅋ
돌아다니는 김에 현판을 만들 나무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는 단천이었다.
“그보다. 좀비가 그렇게까지 많진 않군.”
단천은 검도 동아리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끼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안에 있는 기구들이 드러났다.
훈련장에는 목검과 호구, 죽도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핏자국은 꽤나 있었지만 좀비도, 사람도 없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만난 좀비들은 기껏해야 두세 마리 정도가 끝이었다.
> 애초에 좀비 아포칼립스 고르면 초반 스토리 진행되는데 그거 스킵된듯?
> 이것저것 다 골라서 그런가 좀 시간대가 좀비 바이러스 퍼지고 좀 뒤라고 봐야 되는 것 같은데
모든 종말을 죄다 선택해서인지 일반적인 플레이와 시간대가 살짝 뒤엉켜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단천이 있는 곳은 좀비가 한번 쓸고 지나간 다음 좀비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 모양이다. 먹을 만한 인간들이 없으니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단천은 무표정한 얼굴로 훈련장을 건너갔다. 목검이나 죽도는 막대기에 불과하다. 굳이 따지자면 지금 단천이 지고 있는 마댓자루가 사거리 면에서나 활용도 면에서나 더욱 더 좋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진검’뿐이다.
“여기 있군.”
훈련장 끝에 장식되어 있는 여러 종류의 진검. 당연하게도 날이 제대로 서 있지는 않다. 하지만 날이 안 서 있더라도 날붙이는 날붙이.
“좀비와 사람을 베는 데에는 이 정도로도 충분하지.”
> 사람 벨 생각은 왜 해ㅋㅋㅋㅋ
> 방송 안 봄? 옷이랑 음식 뺏어야지
> 인류애 ㅇㄷ?
단천은 장식되어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꽤 잘 만들어진 해동검海東劍이다. 단천이 가장 좋아하는 종류의 검이기도 했다.
그리고, 반대편에 장식되어 있는 날붙이.
“···청룡언월도라.”
아마 단순한 장식일 것이다. 애초에 검을 배우는 사람은 꽤 있지만 창을 배우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세상에서 세 번째로 좋은 무기이니. 가져가야겠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무기는 검, 두 번째는 방천화극, 그리고 세 번째가 청룡언월도라고 누군가가 그랬었다.
청룡언월도를 등에 고쳐매고, 해동검을 들고 나자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걸로 생존은 100% 확정이군.”
> 100%는 개뿔 ㅋㅋㅋㅋ
> 식량도 옷도 쉘터도 차도 없잖아 ㅋㅋㅋㅋㅋ
> 그냥 뉴비가 망하는 전형적인 테크트리인데 ㅋㅋㅋ
우민들이 비웃거나 말거나 단천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움직여 볼까.”
종말이 다가오고 있으니만큼 준비할 것이 꽤 많았다.
> 그래 지금부터라도 잘 준비하면 되겠지
> 아니 그냥 벌써 망했다니까요??
> 천마님 솔직히 저도 이번에는 등골이 쌔합니다 벌써 망한 것 같습니다
> ㄹㅇ ㅋㅋㅋㅋㅋ
채팅창의 반응은 그리 밝지 않았다. 아포칼립스류 게임에서 초반부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누구나가 아는 일이었으니까.
초반부에 아이템 파밍을 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 동료가 아무도 없는 게 너무 큰데;
> 아포칼립스 겜에서 혼자된 건 치명적임
> 잘 때 습격당하면 죽어야됨 ㄹㅇ;
> ㄹㅇ 잠 못잔다 이제
“본좌가 잘 때 습격당해서 당할 리가 없잖느냐.”
> 불침번 봐 줄 사람 무조건 필요함
> 아뇨 그냥 주사위 굴려서 시스템상으로 죽여 버리는데요?
> 컨트롤이 아예 안되고 자자마자 게임오버 뜨는데 어케하쉴?
잘 때 주사위를 굴린다는 말에 단천의 눈이 짜증으로 물들었다.
“똥겜 같으니라고.”
그런 식으로 강제로 게임오버를 시키다니. 실로 똥게임이라고 할 만 했다.
“자고로 무인은 잘 때에도 신경을 곧추세워 자면서도 적을 베어낼 수 있는 것을.”
> 아니 천마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허풍 아닙니까?
> 자면서돜ㅋㅋ적을 벤닼ㅋㅋㅋ
사람들이 웃거나 말거나 단천은 머리를 긁었다. 시스템상 빠져나갈 만한 부분이 없다면 아무래도 ‘동료’를 만들어야 하는 모양이다.
문제는 학교 안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한 번 좀비들이 쓸고 지나간 장소이니만큼 살아남아 있는 사람의 수는 극히 적다.
[곧 해가 집니다.]
이 와중에도 해가 지는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여느 게임이 그렇듯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신체적, 정신적 능력은 바닥을 기게 된다.
어쩌면 정말로 확률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단천이 그렇게 짜증을 터트리려는 순간.
덜컹. 덜컹.
단천의 귀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천의 고개가 휙 옆으로 돌아갔다.
단천의 고개가 돌아간 곳에 있는 곳은 훈련장 옆에 있는 건물이었다.
[해동관]
“저긴 뭐 하는 곳이지?”
> 설정상 훈련하고 나서 간단하게 자고 쉴 수 있는 건물일걸?
> 근데 별 쓸모없는 건물임
> ㄹㅇㅋㅋ 저기 걍 좀비밖에 없음
> ㅇㅇ 아무것도 없음 겜 시작하자마자 100% 좀비만 남아 있는 곳임
좀비만 남아있는 곳이라는 채팅들.
하지만.
덜컹. 덜컹.
뭔가가 흔들리는 소리는 이성이 없는 존재가 만들어낸 것이라기에는 정도 이상으로 규칙적이었다.
[피로도가 높습니다. 수면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저것 재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단천의 눈이 주저 없이 해동관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